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26)
신마의선-126화(126/500)
신마의선 (126)
초악량이 황급히 그녀를 만류했다.
“벽 누이! 참아!”
화포에 불을 댕기려던 벽화령이 스산한 눈빛으로 초악량을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날려 버릴 인간이 하나 더 있었네.”
섬뜩한 벽화령의 표정에 초악량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벽 누이, 이대로 포기할 거야?”
“……?”
“그거 쏘면 진짜 끝이야.”
“이미 끝난 거 아닌가?”
“아니야.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초악량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 갔다.
“오랜 기다림을 고작 분풀이 한 번으로 날려 버리지 말아. 화포를 날리면 잠깐은 후련할지 몰라도 후회는 오래갈 거야.”
그 말에 벽화령의 눈빛이 흔들렸다.
거기에 초악량이 쐐기를 박았다.
“저 녀석의 마음을 얻었을 때를 생각해 봐! 그때까지 쏟아부은 노력도! 고작 분풀이로 날려 버리기엔 벽 누이의 인생이 아깝지 않나?”
“…….”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범계위와 화포를 번갈아 보길 잠시.
“아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뒤늦게 이성을 찾은 벽화령이 근처에 말려 있는 밧줄 하나를 잡아 범계위에게 던졌다.
그리곤 처음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얼른 올라와.”
그러나 범계위는 분기탱천한 얼굴로 소리쳤다.
“야, 이 미친년아! 그냥 쏴! 오늘 둘 중 한 명 죽자!”
“왜 그렇게 무서운 말을 해? 고작 장난 좀 친 걸 가지고.”
“장난? 이게 장난이야?”
“오랜만의 해후인데 이 정도 투정도 못 부려?”
“투정은 개뿔! 반드시 물고기 밥으로 만들겠다는 눈빛이었잖아!”
“이거 쏜다고 죽지도 않을 거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애교 섞인 미소를 건네는 그녀였다.
“그리고 이 정도 벌은 받아야지.”
“벌? 무슨 벌?”
“그동안 나를 외롭게 만들었잖아.”
“……!”
“어떻게 사람이 그래? 십 년 동안 찾아오기는커녕 서신조차 한번 없다니.”
범계위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누가 뭐라 하건 그녀를 방치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범계위는 마지못해 그녀가 늘어트린 밧줄을 잡고 배 위로 올라왔다.
흠뻑 젖은 범계위를 향해 벽화령이 손을 뻗었다.
범계위가 잠시 움찔했지만 자신의 수염을 매만지는 그녀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었다.
“젖어도 멋있네. 역시 내가 남자 하난 잘 골랐지.”
소름 끼치는 그녀의 변모에 범계위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초악량도 마찬가지.
드물게 범계위를 향해 안쓰러운 눈빛을 던지는 초악량이었다.
“닻을 올려! 전속력으로 돌아간다!”
“복명!”
벽화령의 명령에 해남파의 무인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잠시 후 항구를 떠나 뱃머리를 돌린 선박은 파도를 가르며 무서운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점창산 인근 객잔.
누더기를 걸친 중년의 거지가 이 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마침 유일하게 식탁을 차지한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단 소협 되십니까?”
거지는 종종걸음으로 그쪽에 다가섰다.
“개방 분이시군요?”
단악선이 아는 척을 하자 거지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운남 지역에서 향주를 맡고 있는 진위양이라고 합니다. 방주님으로부터 전언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가셨던 일은 잘 처리가 되셨나요?”
“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원만히 해결이 되었나 봅니다. 방주님께서는 곧바로 이쪽으로 향하셨고, 내일 아침에 합류를 하실 수 있을 것 같다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감사는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직 식사 전이시죠? 함께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진위양이 곤란한 표정으로 한설화를 힐끔거렸다.
“아닙니다. 방주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보고만 하고 바로 도망……, 아니 물러나라고요.”
몇 번이나 당부한 방주의 설명을 통해 한설화가 얼마나 거지를 싫어하는지 익히 아는 그였다. 단악선이 미안한 얼굴로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진위양을 배웅했다.
다시 식탁으로 돌아온 단악선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범 아저씨와 초 아저씨가 없으니 허전하네요.”
오는 내내 눈에 담았던 뛰어난 경관과 미식도 전처럼 즐겁지가 않았다.
반면 한설화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조용하고 좋은데, 뭐.”
가두달 역시 마찬가지.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이 셋에서 한 명으로 줄어드니 그만큼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다.
“그래요? 저는 뭔가 아쉬운데…….”
객잔 밖에 펼쳐진 풍광을 눈에 담으며 아쉬움을 달래기를 잠시,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오른 단악선이 물었다.
“그런데 범 아저씨와 인연이 있다는 해남파 분은 누구예요?”
“음……. 한 십오 년쯤 됐나?”
잠시 생각을 정리한 한설화가 입을 열었다.
“광동 지역에서 나름 영향력을 지닌 위불군이라는 자가 있었다. 꽤 특이한 이력을 지닌 자로, 정파의 명숙이었지.”
한때 군문에 몸담았으나 정치적 이유로 상관이 숙청되자 군문을 떠나 무림에 투신한 자였다.
오랜 세월 전장을 떠돌았던 탓에 실전적인 무공을 지녔는데 광명정대한 성격과 호방한 인품 덕에 뭇 사람의 존경을 받아 왔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금분세수(金盆洗手)를 한다고 공표했다.”
금분세수는 금으로 만든 대야에 손을 씻는 것으로, 복잡하게 얽힌 과거의 은원을 정리하는 행사였다.
그 이후에는 어느 누구도 과거의 은원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었고, 금분세수를 거친 사람 역시 강호의 일에 일절 관여할 수가 없다.
“당시 위불군은 평소 친분을 지닌 정파 인사들을 잔뜩 초빙했단다. 오랜 은원을 청산하는 자리인 만큼 당일에 원한을 품은 자들이 몰려들까 두려웠기 때문이지.”
원한을 청산하기 위해 새로운 원한을 맺을 수 없다는 명목도 있으니 아예 사람들을 잔뜩 불러 모으는 것이다.
“그런 일도 있군요. 그런데 그분은 왜 금분세수를 한다고 한 거죠?”
“초 오라버니 때문이다.”
“초 아저씨요?”
한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 오라버니가 그를 죽이겠다고 선언했거든.”
“왜요?”
“명분에 목을 매는 정파인은 정파인대로,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사파인은 사파인대로. 각각의 사는 방식을 좇아 살아가면 된다. 서로 싫어할 순 있지만 악인이 아닌 이상, 그걸 탓하며 시비를 걸긴 어렵지. 그러나 정파인도 사파인도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
“위선이란다.”
위불군은 과거 악명 높은 사파인을 많이 죽였고, 이를 통해 정파 내에서도 상당한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 살해당한 사람 중 초악량의 몇 안 되는 지인이 있었다.
“철사방의 방주를 하던 자였는데, 사파 놈들 중 그래도 꽤 염치가 있는 자였지.”
위불군은 그가 술에 취한 틈에 기습을 가해 죽여 버렸다.
거기까진 그러려니 할 일인데, 그가 직접 나서서 강호에는 정당한 비무였다며 떠벌리고 다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뒤 몇몇 사람들이 조사를 해 보니 내세우는 공적 대부분이 소문보다 훨씬 약한 사파인을 골라 죽였었고, 그 뒤 호사가들을 매수해 소문을 부풀렸다.
“알고 보니 광명정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게지.”
그의 금분세수 자리에는 한설화도 참여했었다.
어린 소녀를 몰래 겁탈한 뒤, 죽여 입막음한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범계위도 왔었다.”
그는 범계위에게 도전했다가 달아난 적이 있었는데, 이를 왜곡해 범계위가 달아난 것으로 강호에 퍼트렸던 것이다.
“해남파에서도 문주인 벽대경이 자신의 딸과 이백 명이 넘는 무인을 대동하고 참여했단다.”
해남파와 그 사이에 존재하는 채무 때문이었다.
군부 출신이라는 점을 이용해 위불군은 해남파로부터 소개비와 수수료 명목으로 많은 돈을 뜯어 갔다.
그런데 결국 그 모든 것이 거짓말로 밝혀졌다.
조정과 해남파가 직접 관계를 구축하자 오랜 세월 해남파를 기만해 온 허무맹랑한 사기가 낱낱이 드러나 버렸다.
“서로 설전을 주고받는 중이었는데, 범계위가 다짜고짜 난입했지. 물을 받아 놓은 금대야를 날려 버리고 그대로 그자의 머리까지 터트려버렸다.”
단악선이 깜짝 놀랐다.
“쾌도난마(快刀亂麻)의 기세로 호쾌하게 위불군의 머리를 날려 버린 사내다운 기상에 반했다나? 벽화령이 녀석을 따라다니는 것도 그 무렵부터다.”
한설화가 피식 웃었다.
“그 후 우연히 따로 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다시 한 번 반했다더군.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반한 사람에게 또 반할 수 있나요?”
“벽화령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물론 난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래서요?”
“듣자니 벽화령이 바로 고백을 했다더구나. 범계위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고. 그러자 벽화령이 그랬다더군. 거절하면 평생 후회할 거라고. 자신만 한 여자는 두 번 다시 못 만날 거라며 설득했다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흥미진진한 단악선의 표정이 귀여웠던지 한설화가 조용히 웃었다.
“범계위가 그 자리에서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오 년 안에 정인을 얻을 거라고. 만약 그러지 못하면 벽화령에게 장가를 가겠다며 큰소리를 쳤다고 들었다.”
“아! 그래서…….”
한설화가 실소했다.
“어쩌면 이번에 그 못생긴 대머리가 혼인하는 진귀한 광경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군.”
반면 단악선은 진지한 얼굴로 고심에 잠겼다.
“보통 일이 아니었군요.”
“넌 걱정할 것 없다. 그 바보 둘이 알아서 할 일이니까.”
“둘이요? 초 아저씨도 관련이 있나요?”
“당연하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한설화가 피식 웃었다.
“범계위가 그 멍청한 맹세를 했을 때 증인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바로 초 오라버니였거든.”
* * *
“그놈의 술이 원수지.”
눈앞으로 가까워지는 해남도의 모습에 초악량이 탄식을 흘렸다.
“그때 그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어.”
범계위가 이내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조주(花雕酒)였지 않소? 그때 벽화령이 건넸던 게.”
소흥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아이를 가지면 한 동이의 가반주(加饭酒)를 땅에 묻는다. 그 술을 태어난 아이가 딸이면 시집갈 때 꺼내 지인들에게 대접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아홍(女兒紅)이라 불린다.
반대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장성하여 시험 길에 오를 때 장원 급제를 기원하며 봉인지를 뜯는다.
이건 장원주(壯元酒)라 부른다.
술 자체는 같지만 성별에 따라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초악량이 입맛을 다셨다.
“입에 넣자마자 강렬하게 혀를 때리는 달콤한 맛이 아주 인상적이었지.”
말을 이어 가는 초악량의 눈빛이 아련하게 물들었다.
“목을 타고 넘어갈 때는 알싸하게 매우며, 뒤에 남는 쌉싸름한 여운은 꽃과 과일의 향기를 품은 채 길게 이어졌어. 뒤늦게 올라오는 강렬한 열기는 그 복합적인 맛을 뇌리에 강렬히 새기고. 하……. 정말 그만한 술이 없었는데 말이야.”
“유난은……. 소홍주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니유?”
범계위의 핀잔에 초악량이 버럭 했다.
“그건 무려 화조주라고! 제대로 오래 묵어 술독에 꽃무늬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진짜 화조주! 그냥 술독에 꽃 그림 그려 아무렇게나 팔아 대는 가짜 화조주 말고!”
“걱정 마슈.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내 거하게 한잔 사리다.”
초악량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오십 년 묵은 노주(老酒)를 찾기가 그리 쉬운 줄 아느냐?”
그때 그들의 대화를 들었던지 벽화령이 슬쩍 끼어들었다.
“내 결혼식 날 뜯으려고 남겨 놓은 술이 있는데. 그것도 육십오 년이나 묵은…….”
초악량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모습에 불안해진 범계위가 재빨리 벽화령을 막아섰다.
“거짓말 마. 네 나이가 마흔다섯인데 어떻게 육십오 년 묵은 여아홍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우리 할아버지께서 묻어 놓으신 건데 얼마 전에 우연히 발견했거든. 아버지가 장성하기 전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뜯지 못하고 잊혔던 거래.”
그 말에 초악량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너 그냥 혼인해라.”
그 말에 범계위가 으르렁댔다.
“고작 술 한 동이에 날 팔아넘기겠다고?”
“그것도 높게 쳐주는 거다. 솔직히 쟤 아니면 누가 너처럼 못생기고 성격 나쁜 놈을 좋아해 주겠냐?”
벽화령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초 오라버니! 화포로 날려 버리지 않길 잘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