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27)
신마의선-127화(127/500)
신마의선 (127)
초악량은 웃지도,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탄 배가 해남도의 항구에 들어섰다.
돛을 걷고 닻을 내려 정박을 마친 해남파의 무인들이 곧장 선박 내부의 수하물 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굵은 줄로 포박된 채 줄줄이 끌려 나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저놈들은 뭐야?”
범계위의 질문에 벽화령이 스산한 눈빛을 흘렸다.
“근처를 노략질하던 놈들.”
해남도를 비롯한 인근 해역은 오래전부터 왜구를 비롯한 해적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이 문제로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어 온 조정이 그 해결책으로 해남파를 적극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조정이 해남파와 전례 없는 호혜(互惠)적 조건을 제시한 것도 그 때문이다.
주변의 해적들을 소탕하는 대신 이 지역에 한해 세금을 면제해 주고, 해남파에게 무소불위에 가까운 권한을 허락한 것이다.
그건 벽화령이 데리고 다니는 매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일응이마삼첩(一鷹二馬三妾).
세상에 첫째가는 재미는 매사냥이고, 둘째는 승마이며, 셋째가 첩을 두는 것이란 의미다.
그만큼 아무나 키울 수 있는 짐승이 아니었다.
벽화령의 어깨에 앉아 있는 송골은 특히 그랬다.
해동 지역에서만 사는 데다 길들이기가 무척 까다로워, 나라의 왕이 매를 길들인 응사(鷹士)와 함께 황실에 진상하곤 하는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제와 가까운 친족에게만 허락된다.
제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는 고관대작이라도 송골만큼은 키울 수도 없고, 키워서도 안 됐다.
이는 곧 황실의 위엄을 넘보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중죄였다.
그런데도 벽화령은 대놓고 송골을 데리고 다녔고, 관부의 인물들은 이를 알면서도 철저하게 묵인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해남파가 운용하는 선박은 해전을 상정해 제대로 건조된 전함이었다.
심지어 화포까지 실려 있다.
화약을 이용한 병기는 어디까지나 조정의 권한.
과거 폭뢰로 이름 높았던 산서의 벽력당(霹靂堂)이 쓸려 나간 이유도 그 때문이다.
현재 조정이 화약을 이용한 화기의 사용을 허락한 무림방파는 해남파만이 유일하다.
* * *
초악량과 범계위가 벽화령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해남파의 모든 대소사가 결정되는 창해각(滄海閣)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십 년 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우리 사위 아니신가!”
험악한 인상만큼이나 풍채가 좋은 노인이 범계위를 반겼다.
벽화령의 부친이자 해남파의 문주인 벽대경이었다.
어지간히 뼈 있는 말이건만, 그 옆을 지키고 있던 세 명의 중년 사내들은 진심 어린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막내가 저놈에게 시집가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온다!’
‘내가 부문주가 못 돼도 좋으니 제발 데리고만 가라!’
‘화령이만 이곳을 떠나면 우리 세상이다!’
각자 저마다 생각은 달랐지만 공통의 목표는 오직 하나.
바로 벽화령이 범계위와 혼인해 해남도를 떠나는 것이었다.
출가외인.
해남의 법도에 따라 벽화령은 혼인과 동시에 부문주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제발!’
세 형제들이 간절한 눈빛으로 범계위와 벽화령을 바라봤다.
왜구와 같은 해적을 늘 상대해야 하다 보니 해남파의 법도는 중원의 핵심 방파와는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효율과 실리를 추구하다 보니 그 성향이 자연스럽게 문파의 기조에도 영향을 끼쳤고, 그런 만큼 무공 역시 더없이 실전적이다.
즉 해남도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능력이 필요하다.
지위에 따른 책임과 권한도 오롯이 성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약관을 넘긴 이후 두각을 드러낸 벽화령의 업적으로 인해 세 사람은 늘 그녀와 비교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단지 벽화령이 너무나 뛰어날 뿐.
남매의 사이가 나쁜 편도 아니건만 벽화령의 존재는 그들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범계위가 희망일 수밖에.
범계위에게 마뜩잖은 눈빛을 보내던 벽대경이 흠칫했다.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니 벽화령이 표독스럽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커험.”
헛기침을 터트린 벽대경이 범계위를 향해 말했다.
“일단 여독을 풀게. 미리 말해 두지만 이곳에서는 우리 해남검파의 규칙을 지키게.”
이곳 또한 명색이 정도인 해남파다.
십대악인 두 사람을 손님으로 받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나뿐인 딸의 소원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벽화령은 범계위가 아니면 차라리 평생 혼자 살겠다 진즉에 선언한 상태.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그녀의 고집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인지라 범계위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범계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자식을 산적 같은 놈에게 빼앗기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벽대경이 초악량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부디 편하게 머무시길.”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는 벽대경의 태도에 초악량 역시 마주 포권했다.
“문주님의 호의에 감사드리오.”
범계위는 예비 사위인 만큼 편하게 하대할 수 있었지만 초악량은 아니었다. 강호에서 차지하는 그의 명성과 위치를 감안하면 더욱 그랬다.
그렇게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초악량과 범계위는 하인의 안내를 받아 숙소로 향했다.
벽대경과 벽화령, 그리고 그의 오라비들은 나포한 해적의 처리를 두고 회의를 시작했다.
배정된 숙소로 향하던 중 범계위가 초악량에게 작게 속삭였다.
“초 형, 좋은 방법 없겠수?”
“있지.”
범계위가 반색했다.
“역시 우리 초 형! 믿고 있었수!”
“해결책은 간단해. 네가 화령이랑 혼인하면 된다.”
범계위가 소태 씹은 표정이 되었다.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 범계위의 표정에 초악량이 설득을 이어 갔다.
“우리끼리니 솔직히 말하자. 지금까지 너를 이토록 진심으로 사모하는 여인이 있었냐?”
“…….”
“십 년. 무려 십 년이다. 무림 공적인 너를 아무 조건도 없이 기다렸다. 게다가 해남파의 부문주니 배경도 모자람이 없지. 어디 가서 빠지는 미모도 아니잖아. 나이는 말할 것도 없고.”
“…….”
“이 정도면 네가 절을 해서라도 모셔 가야 하는 거 아니냐?”
고심하는 범계위를 향해 초악량이 결정타를 날렸다.
“더구나 혼인 이야기는 네가 직접 약조한 것이 아니냐. 천하의 망산초자가 한 입으로 두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내가 약속을 어길 수는 없지.”
초악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뱉은 말만큼은 철저하게 지키는 게 망산초자의 유일한 장점이지.”
초악량이 웃으며 범계위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아. 간단히 해결되었구나. 그럼 어디 가서 꽃이라도 한 줌 꺾어 벽 누이에게 청혼해라.”
그 말에 범계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런데 초 형이 모르는 게 있수.”
“뭔데?”
“난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는 거요.”
그리고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오 년 안에 정인을 만들겠다던 내기. 그거 내가 이겼수.”
“뭐? 네게 정인이 있었다고? 그게 누군데?”
“민소린.”
“민소린?”
고개를 갸웃하던 초악량이 이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설마 내가 아는 그 민소린? 운남 조형방주의 여식?”
범계위가 고개를 끄덕이자 초악량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야, 이 미친놈아! 걔 화령이 친구잖아!”
“남녀 관계는 누구도 예상 못 하는 법 아니오? 그리고 내가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잖수. 그땐 화령이랑 사귀기로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범계위가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렇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슈. 내게도 아픈 기억이니까.”
“아픈 기억?”
“정말 혼인까지 생각했었는데…….”
“……?”
“결정적인 순간에 차였수.”
“왜?”
범계위는 대답 대신 자신의 아랫도리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초악량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
“벽 누이가 알면 발칵 뒤집히겠군.”
그녀 성격상 절대 그냥 넘어가는 일은 없을 터.
초악량은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가 않아졌다.
“갑자기 단 의원이 보고 싶구나. 잘 있어라.”
턱.
범계위가 초악량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미 초 형도 모든 걸 알게 되었으니 공범이유.”
초악량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애초에 너와 뭘 함께 하는 게 아니었어.”
초악량이 범계위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혼인해. 지금 상황에서는 달리 뾰족한 수도 없잖아.”
“그러다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나만 죽는 게 아니유. 민소린도 같이 죽는 거지.”
“그래도 설마 낭군을 죽이기야 하겠냐.”
“숨만 붙여 놓겠지. 내가 능소밀 그놈하고 가두달에게 하는 것처럼.”
“전부 다 인과응보다. 네놈이 저지른 일이니 책임을 져.”
“초 형은?”
“나? 염화단철 받아서 돌아가야지.”
“정말 이러기요?”
“내가 시켰냐? 사고는 네놈이 다 쳐 놓고 나더러 어쩌라고?”
숙소 앞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참을 그렇게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고 있을 때였다. 회의가 끝났는지 벽화령이 걸어와 나긋한 태도로 범계위의 팔짱을 끼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초악량과 범계위가 어색하게 웃었다.
팔뚝에 돋는 소름을 문지르는 범계위를 향해 초악량이 한 차례 눈을 부라리고는 벽화령에게 물었다.
“혹시 염화단철에 대해 알고 있나?”
“염화단철?”
의아한 얼굴로 반문한 벽화령이 배시시 웃으며 범계위를 올려다봤다.
“물론 알지. 어디 있는지도 알고.”
벽화령이 범계위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건넸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가져다줄 수 있는데…….”
초악량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지금 당장…….”
그 순간 벽화령이 초악량의 말을 잘랐다.
“그 전에 승낙이 필요해.”
“승낙?”
고개를 끄덕인 벽화령이 뚫어져라 범계위를 응시했다.
“응, 범 가가(哥哥)의 승낙.”
범계위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무리 눈치 없는 그라 해도 그 승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냥 주면 안 돼?”
범계위의 당당한 요구에 벽화령은 잠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초악량은 내심 기가 막혔다.
대체 머릿속이 얼마나 꽃밭이면 저 뻔뻔한 모습마저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벽화령은 이내 표정을 달리했다.
“안 돼.”
벽화령이 새초롬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설마 그걸 얻고 나서 나 몰라라 내빼려는 심산은 아니지?”
범계위가 뜨끔한 표정을 짓자 벽화령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아닐 거야. 그치?”
분위기가 점차 살벌해지기 시작하자 초악량이 재빨리 나섰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모처럼 둘이 오붓하게 산책이라도 하는 게 어떠냐?”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 범계위와 달리 벽화령은 그 말에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좋은 생각이야.”
고개를 끄덕인 벽화령이 범계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가자. 해남도의 매력에 반하게 해 줄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범계위가 초악량을 향해 간절한 눈빛을 던졌다.
그 모습에 내심 혀를 차면서도 초악량은 끝내 범계위를 외면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을 태운 한 척의 쾌속선이 해남도의 항구를 떠났다.
평생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온 사람답게 벽화령은 배를 다루는 게 노련했다.
파도를 가르며 먼바다로 나아간 쾌속선은 해남도가 아득히 멀어지고 나서야 멈춰 섰다.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출렁이는 배 안에서 두 사람은 말없이 먼바다를 응시했다.
“참 넓지?”
벽화령이 입을 연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난 바다가 좋더라.”
범계위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벽화령이 천천히 일어나 닻을 움켜쥐었다.
움찔하는 범계위를 향해 벽화령이 미소를 건넸다.
그러다 냅다 수면을 향해 닻을 휘둘렀다.
어마어마한 물보라와 함께 쾌속선이 크게 휘청였다.
범계위가 버럭 했다.
“무슨 짓이야!”
벽화령은 조용히 웃더니 대답 대신 닻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푸른 수면 위로 붉은 핏물이 번져 갔다.
쿠웅.
거대한 백상아리가 쾌속선 위로 끌어 올려진 것도 동시였다.
대가리에 닻이 꿰뚫리고도 버둥대는 백상아리를 벽화령이 움켜쥐더니 소도를 꺼내 커다란 살점을 도려냈다.
그리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살점을 덥석 베어 물었다.
“그래서 범 가가를 좋아하나 봐.”
백상아리의 살점을 우물거리는 벽화령의 입 주변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그 상태로 벽화령이 씨익 웃었다.
“거침없고 변화무쌍한 모습이 바다를 닮았거든.”
“누군 생각이 없고 변덕스럽다고 하던데?”
벽화령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감히 누가 그런 헛소리를? 누구야?”
살벌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범계위는 차마 초악량의 이름을 댈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이건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저 여자는 절대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