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28)
신마의선-128화(128/500)
신마의선 (128)
흔들리는 배 안에서 둘만의 시간을 만끽하던 벽화령이 뱃머리를 돌린 건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범계위의 눈에 의아함이 떠오른 것도 동시였다.
왔던 길을 되돌아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배가 더욱 먼바다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범계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냐?”
벽화령이 배시시 웃었다.
“염화단철 필요하다며?”
“……?”
벽화령이 손을 들어 먼 곳을 가리켰다.
“저기 있어.”
벽화령이 가리킨 방향으로 범계위가 고개를 돌렸다.
멀리 수면 위에 아슬하게 걸친 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쾌속선이 빠르게 나아가며 섬과의 거리를 좁혀 갔다.
“무중도(霧中島)라는 섬이야. 일 년 내내 자욱한 해무(海霧)에 휩싸여 있어서 해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곳이지. 혹자는 불귀도(不歸島)라고도 하고.”
“불귀도?”
“저 안에 들어가서 돌아온 사람이 없거든.”
범계위가 점차 가까워지는 섬을 응시했다.
벽화령의 말대로 짙은 안개가 감싸고 있는 섬은 이름만큼이나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저런 곳에도 사람이 살아?”
범계위의 물음에 벽화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싸늘한 눈빛을 흘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이쪽에서는 꽤 유명한 놈들이야. 우리뿐만 아니라 왜국 배까지 닥치는 대로 약탈하지.”
“그걸 보고만 있진 않았을 텐데?”
벽화령의 성격상 놈들의 본거지를 알고도 그냥 넘어갈 리 만무했다.
“꽤 강한 놈들이야. 배 다루는 솜씨도 제법이고.”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벽화령이 인정할 정도라면 꽤 훌륭한 뱃사람이라는 의미다.
“문제는 놈들을 잡으려 하면 잽싸게 저 섬으로 달아나 버린다는 거야. 안개와 암초 때문에 섣불리 전투선을 끌고 갈 수 없었어.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야.”
벽화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바다 위에서 날고 기는 놈들이라도 땅에서는 가가의 상대가 되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까 저놈들한테 염화단철이 있다는 거지?”
범계위가 씨익 웃었다.
“나한테 맡겨.”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지?”
“같이 가려고?”
“당연하지.”
범계위는 내심 꺼림칙했다.
자칫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해남도 전체가 발칵 뒤집힐 터.
“그냥 나 혼자 가면 안 될까?”
“왜?”
그녀의 반문에 머뭇거리던 범계위가 이내 적당한 이유를 찾아냈다.
“나 피 보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그러니까 더 가야지.”
“……?”
“호쾌하면서도 야성적인 범 가가의 모습을 놓칠 수는 없으니까.”
뜨거운 벽화령의 눈빛이 범계위는 무척 부담스러웠다.
그사이 배는 안개를 뚫고 무중도의 해안에 도착했다.
그런데 암초에 단 한 번도 부딪치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범계위의 눈빛에 벽화령이 타고 있는 배를 두드렸다.
“이건 쾌속선이라 괜찮아. 육중한 전투선보다 가벼워 그만큼 얕게 잠기거든.”
벽화령이 희뿌연 안개 속을 노려봤다.
“미리 말해 두지만 살려 둘 가치가 없는 놈들이야.”
약탈로도 모자라 살인과 강간, 거기에 인신매매까지.
죽여야 할 이유가 셀 수도 없는 쓰레기들이었다.
범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벽화령이 이상한 여자이긴 해도 없는 말을 지어낼 성격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그렇다니 일이 더 쉬워지네. 그냥 몽땅 쓸어버리면 된다는 거잖아.”
그 말과 함께 범계위가 신형을 날렸다.
아무리 짙은 안개가 시야를 방해한다 해도 범계위는 상관없었다.
사방으로 뻗어 나간 기감의 그물이 눈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섬 중앙 근처로 나아가자 이 장 높이의 목책이 나타났다.
범계위는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쇄도해 목책을 들이받아 버렸다.
꽈앙!
“크악!”
두꺼운 나무를 깊게 박아 만든 목책이 터져 나가며 그 충격에 휩쓸린 수적 몇이 처절한 비명을 터트렸다.
삐익!
뒤늦게 곳곳에서 호각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시 후 고함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위를 살피던 범계위의 눈에서 자욱한 살기가 흘러나온 것도 그 때였다.
목책이 터져 나간 폭발의 여파로 인해 안개가 흩어지면서 장내의 광경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체로 결박되어 짐승처럼 묶여 있는 여인들.
그 맞은편에는 두꺼운 나무로 만든 우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피골이 상접해 앙상한 어린아이들이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단악선보다 한참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온몸에는 끔찍한 상처와 멍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네 말대로야.”
범계위의 전신에서 뭉클거리는 살기가 흘러내렸다.
“살려 둘 가치가 없어.”
그 말과 함께 범계위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모습을 나타냈을 때에는 각각 한 손에 하나씩, 수적들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우두둑.
손아귀에 붙들려 버둥대던 수적 둘의 목이 그대로 꺾였다.
“고수다!”
수적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오나 싶더니.
“쇠뇌를 쏴!”
“노예들은 어떡합니까?”
“상관없어! 다 쓸어버려!”
안개 속에서 누군가가 명령했다.
쉬쉬쉬쉭!
안개를 뚫고 시커먼 강전이 비처럼 쏟아졌다.
퍼버버벅.
육중한 격타음과 함께 범계위의 신형이 휘청였다.
“맞았다! 놈에게 적중했어!”
수적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치익!
기이한 소성과 함께 눈앞의 안개가 그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가공할 열기로 인해 끓어오른 안개가 그대로 기화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범계위가 서 있었다.
수적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범계위의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범계위는 양손에 강전을 하나씩 움켜쥐고 있었다.
뒤쪽의 인질들을 향해 날아가던 강전이었다.
저벅.
범계위가 걸음을 옮기자 온몸에 빽빽하게 박혀 있던 강전들이 뒤늦게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호, 호신강기?”
수적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사용한 쇠뇌는 일반적인 물건이 아니었다.
대인전이 아닌, 수상전에 대비해 준비된 무기인 만큼 그 위력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손으로 시위를 걸 수도 없어 두 발로 활대를 밀며 온몸으로 시위를 당겨야 하는 괴물 같은 무기였다.
그러나 제아무리 무겁고 빠른 쇠뇌라 할지라도 호신강기를 뚫는 것은 불가능했다.
범계위가 들고 있던 강전을 던졌다.
“커헉!”
바닥에 누워 쇠뇌의 시위를 걸던 수적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의 가슴에는 어느새 굵은 강전이 박혀 있었다.
쿠웅.
범계위의 발이 바닥을 구른 것도 그때였다.
대지를 흔드는 진각의 충격에 범계위의 발치에 떨어져 있던 강전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범계위가 이를 낚아채 수적들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쉬쉬쉬쉭!
허공을 찢는 파공음.
그 끝에는 섬뜩한 비명과 함께 나뒹구는 수적들이 있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정확히 한 명씩 숨통을 끊는 가공할 이발불요(二發不要)의 신위!
심지어 쇠뇌로 쏘는 것보다 빠른 강전을 피할 방법은 전무했다.
“괴, 괴물…… 컥!”
비척거리며 물러서던 수적의 목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강전이 뚫고 지나간 자리였다.
피를 쏟으며 절명하는 동료들의 모습에 수적들이 이내 등을 돌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흥!”
차가운 코웃음과 함께 범계위가 안개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섬 곳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좁은 섬 안을 벗어날 방법은 전무했다.
간혹 바다로 몸을 던지는 놈도 있었다.
하나 범계위의 이목을 속일 수 없었다.
어디선가 날아든 바위에 맞고 거대한 물기둥과 함께 그대로 물고기 밥이 되었다.
잠시 후.
범계위가 벽화령이 서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있는 범계위를 황홀한 눈으로 응시하던 벽화령이 이내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어? 범 가가. 광증은 고친 거야?”
범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단 의원 덕분에 많이 좋아졌지.”
“우리……?”
벽화령의 눈에서 차가운 불꽃이 튀었다.
“단 의원이 어떤 년이야?”
범계위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열세 살짜리 사내아이다.”
“어? 미, 미안.”
당황한 벽화령이 말을 더듬다 이내 새초롬히 눈을 흘겼다.
“범 가가가 그렇게 다정한 눈빛을 하니 오해할 수밖에…….”
범계위가 피식 웃고는 벽화령의 발밑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발치에는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오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보란 듯이 얼굴에 흉측한 문신을 새겨 놓은 사내였다.
범계위가 이 잡듯 섬을 뒤지고 있는 동안 그녀도 손 놓은 채 놀고만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놈은 왜 안 죽여?”
“아, 이놈?”
마혈과 아혈이 제압당한 듯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 누워 있던 수적이 뒤룩뒤룩 눈알을 굴렸다.
벽화령이 차가운 미소를 말아 올렸다.
“이놈이 여기 대백사(大白鯊), 즉 두목이거든.”
벽화령이 발끝으로 누워 있던 사내의 명치를 걷어찼다.
“케헥!”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꺽꺽대던 중년인이 뒤늦게 자신의 아혈이 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래! 거래를 하자!”
“하자? 반말이네?”
화사하게 웃은 벽화령이 천천히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스릉.
그녀의 허리에 매달려 있던, 해남파를 상징하는 독문병기가 섬뜩한 나신을 드러냈다.
커다란 바늘처럼 끝이 뾰족한 협봉검(狹蜂劍)이었다.
푹.
“끄아악!”
날카로운 검이 허벅지를 파고들자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하나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마혈이 풀리지 않은 상태라 자지러지는 비명을 토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벽화령이 웃으며 손목을 틀었다.
상대의 허벅지에 찔러 넣은 협봉검을 휘저으며 벽화령이 웃었다.
“뭘 줄 수 있는데?”
“보물! 모아 둔 보물을 숨긴 곳이 있다!”
“있다?”
“이, 있습니다!”
공손해진 사내의 말투에 벽화령이 손을 멈췄다.
“어머? 정말? 그거 전부 나한테 주는 거야?”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부디 목숨만은…….”
“좋아. 살려 주지.”
너무나 선선히 대답하는 벽화령의 모습에 사내가 오히려 당황했다.
그 눈빛에 벽화령이 아미를 찡그렸다.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
“난 너 같은 쓰레기와 달라. 한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지.”
웃고 있는 벽화령의 눈 위로 자욱한 살기가 떠올랐다.
“으아악! 그만! 그마안!”
사내의 입에서 다시 한 번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협봉검으로 사내의 허벅지를 휘젓던 벽화령이 태연히 대꾸했다.
“어머, 미안. 너무 속상한 나머지 손이 멋대로 움직여 버렸네?”
그 모습에 범계위는 소름이 쭉 끼쳤다.
상황이 이쯤 되니 누가 더 악당인지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모화봉! 모화봉 뒤쪽에 수풀로 숨겨진 작은 동굴이 있습니다!”
“거짓말이면 알지?”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벽화령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허벅지 살이 썰려 나가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사내가 소리쳤다.
“거기에 다 모아 뒀습니다. 크흐흑!”
눈물 콧물 쏟으며 절규하는 사내의 모습에 벽화령이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손을 거두었다.
“다녀올 테니 이놈 좀 지키고 있어.”
그 말과 함께 벽화령이 어딘가로 신형을 날렸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기다란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녀가 범계위를 향해 상자를 건넸다.
“자, 가가가 찾던 물건이야.”
범계위가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기이한 열기를 뿜어내는 핏빛 금속 몇 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주는 거야?”
범계위의 물음에 벽화령이 되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필요하다며?”
“필요하지.”
“그럼 가져가.”
뭔가 찜찜했지만 범계위는 말없이 상자를 닫고 옆구리에 끼웠다.
벽화령이 웃으며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그런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뭔데?”
“지혈 좀 부탁해. 범 가가 주특기잖아.”
“왜? 어디 다쳤어?”
“아니, 나 말고.”
벽화령과 시선이 마주친 수적 두목이 움찔했다.
그 순간 벽화령이 벼락처럼 검을 뽑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