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29)
신마의선-129화(129/500)
신마의선 (129)
신랄하게 움직이는 검 끝을 따라 차가운 검광이 번뜩였다.
해남파의 독문절학, 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날카롭게 허공을 그어 대는 섬뜩한 검기가 기이한 궤적을 그리나 싶더니.
서컥!
그 궤적 끝에 걸린 팔다리가 그대로 잘려 나갔다.
“……!”
눈 깜짝할 사이 사지가 날아간 수적 두목의 얼굴에 경악의 감정이 가득했다.
지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범 가가.”
벽화령의 말에 범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지혈해 달랬지.”
범계위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강전 하나를 집어 들더니 진기를 끌어 올렸다.
무쇠로 만들어진 강전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구어졌다.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수적 두목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이리 내.”
벽화령이 범계위의 손에서 달궈진 강전을 낚아챘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두꺼운 가죽이 감겨 있었다.
의아해하는 범계위의 시선에 벽화령이 빙긋 웃었다.
“험한 일은 내가 할게.”
그리고 이어진 말에 범계위는 소름이 쭉 끼쳤다.
“범 가가는 소중하니까.”
벽화령이 수적 두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더없이 상냥하던 그녀의 눈빛이 한순간에 달라졌다.
“자, 잠깐…! 크아아악!”
치익.
살을 지지는 매캐한 연기와 함께 참혹한 비명이 허공을 흔들었다.
그러나 벽화령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상대의 팔꿈치와 무릎 아래로 잘려 나간 절단 부위를 지져 댔다.
말이 지혈이지 고문과도 다름없는 우악스러운 수법이었다.
결국 그 끔찍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 수적 두목은 이내 거품을 게워 내며 혼절했다.
질펀한 핏물 위에 누운 채 정신을 잃은 수적 두목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던 벽화령이 천천히 돌아섰다.
언제 그랬냐는 듯 화사한 미소를 배어 문 채였다.
짧은 시간 동안 얼음과 불을 오가는 듯한 그녀의 변모에 범계위가 짧게 진저리를 쳤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이놈은 왜 살려 두는 거야?”
“관부에 넘겨야지. 어차피 거기서 참수할 거야.”
“그럼 굳이 사지를 자를 필요도 없었던 거 아냐?”
“워낙 교활한 놈이라서. 전에도 관부를 매수해 탈출한 전력이 있거든.”
벽화령이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번거로워도 어쩔 수 없어. 그게 거래 조건이니까. 이런 놈을 잡아다 주는 대가로 관부는 우리의 편의를 봐주고, 관부는 윗선에 보고할 수 있는 공을 세우는 거야. 상부상조라는 거지. 게다가…….”
벽화령의 시선이 뒤쪽을 향했다.
두려움에 떠는 여인과 아이들을 눈에 담은 벽화령이 씁쓸한 눈빛을 흘렸다.
“저들을 위해서기도 해. 이자의 비참한 말로를 눈으로 확인해야 비로소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범계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그냥 미친년인가 싶었는데, 그 행동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섬을 에워싸고 있던 자욱한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벽화령이 주위를 돌아다니며 큼직한 바위들을 모았다.
처음엔 의아해하던 범계위였지만 그 바위들의 용도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개가 완전히 사라지자 벽화령이 바다를 향해 바위를 던지기 시작했다.
첨벙!
바다에 떨어진 바위로 인해 물기둥이 솟구쳤다.
“뭐 하는 거야?”
“이거? 부표 대신이야.”
“부표?”
고개를 끄덕인 벽화령이 계속해서 바위를 던졌다.
연이어 솟구친 물기둥이 점점 더 먼바다 쪽으로 이어졌다.
그 물기둥을 따라가던 범계위의 시야에 한 척의 선박이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해남도의 전투선이었다.
이곳으로 향하기 전 벽화령이 미리 언질을 해 두었던지 먼 해상에 떠 있던 배가 천천히 섬 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경로가 물기둥이 솟구친 곳과 정확히 일치했다.
“아까 쾌속선으로 섬에 접근하면서 근처의 암초들을 확인했거든.”
벽화령의 말에 범계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눈에 보여?”
벽화령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물의 색깔과 흐름으로 읽어 내는 거지.”
범계위가 새삼스런 눈빛으로 벽화령을 바라봤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이 여자는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건 아닌 것이다.
범계위가 재빨리 전투선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을 돌렸다.
“그런데 용케 길을 기억하네.”
부표 대신 암초 위치를 표시했던 물기둥은 이미 한참 전에 사라졌다.
게다가 물기둥 주변으로 번지던 둥근 물결도 파도에 삼켜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해남도의 전투선은 망설임 없이 파도를 가르며 섬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범계위가 힐끔 벽화령을 곁눈질했다.
다행히 칭찬이 먹힌 모양이었다.
“우리 해남파를 얕보지 말라고. 내가 쟤들을 어떻게 가르쳤는데. 배 다루는 실력만큼은 조정의 수군과도 비교가 안 돼.”
시력이 좋기로는 초원의 오랑캐가 으뜸이라지만, 뱃사람을 따라올 수가 없었다.
그것도 그녀가 직접 훈련한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런데 그 순간.
잘 달리던 배가 휘청였다.
암초에 살짝 긁힌 것이다.
한껏 으스대던 벽화령의 얼굴이 구겨졌다.
방금 전에 늘어놓은 자랑이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저 얼간이들이?”
범계위 앞에서 체면을 구긴 벽화령의 눈빛이 다시 나찰의 그것이 되었다.
그 살벌한 눈빛에 범계위는 이쪽으로 향하는 해남파 무인들이 불쌍해졌다.
잠시 후.
작은 배 여러 대로 섬에 도착한 해남파 무인들이 벽화령 앞에 도열했다.
“전원 하선을 마쳤습니다!”
사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한눈에 봐도 바다 내음 물씬 풍기는 갈색 피부의 중년인이 벽화령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돌아온 건 한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였다.
“똑바로 안 하지?”
“예?”
“예는 무슨 놈의 예. 너희들은 돌아가서 특훈 한 시진이다.”
중년인이 울상을 지었다.
“대, 대랑(大娘)…….”
“내가 우리 가가 앞에서 망신을 당해야겠어?”
“하지만 아까 그 위치는 대랑께서…….”
“됐고. 딱 이 각 준다. 저쪽의 인질들 포함해 모두 챙겨. 특히 저놈.”
벽화령이 수적 두목을 가리키자 해남파 무인들이 한숨을 내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벼락이 떨어졌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눈치 없이 굴지?”
그 말에 해남파 무인들이 흠칫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곤 이내 부리나케 사방으로 흩어졌다.
바짝 군기가 들다 못해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래서인지 장내는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숨겨 두었던 수적들의 노획물을 전리품으로 챙기고, 인질과 수적 두목 역시 배에 실렸다.
범계위가 섬뜩한 기분을 느낀 것도 그때였다.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돌리니 그윽한 눈빛을 건네는 벽화령이 보였다.
“쟤들 보내고 며칠 있다 오라고 할까? 그동안 우린 이 섬을 신방 삼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범계위의 신형이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뭐 해? 얼른 타지 않고.”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벽화령이 범계위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범계위는 이미 배 위에 몸을 싣고 있었다.
“부끄러워하기는.”
눈을 흘기며 배에 오르는 벽화령의 모습에 범계위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해남파로 돌아온 범계위는 곧장 초악량에게 달려갔다.
“이제 여길 뜹시다.”
“벌써? 하지만…….”
범계위가 초악량의 말을 자르며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상자를 두들겼다.
“염화단철 챙겼으니까 얼른 튀자고.”
범계위의 반말에 초악량이 피식 웃었다.
“왜? 화령이도 데리고 가야지.”
그런데 발끈할 줄 알았던 범계위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인생이 도박이라지만 이건 아니오.”
진지하기 짝이 없는 범계위의 눈빛에 초악량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야지.”
“아, 초 형 쫌!”
참다못한 범계위가 버럭 하는 순간.
한 사람이 월동문을 넘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산처럼 가득 쌓아 올린 다과를 들고 온 벽화령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초악량이 놀란 눈으로 벽화령을 바라봤다.
평소 입던 달라붙는 경장이 아닌, 더없이 유려하고 화사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의 모습 때문이었다.
단지 옷이 바뀌었을 뿐인데도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바다를 호령하던 여장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청초함이 묻어나는 엄청난 미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갈 때 가더라도 차 한잔은 하고 가.”
그 말에 범계위는 움찔했고, 벽화령은 쓸쓸하게 웃었다.
그 아련하고 안타까운 눈빛에 초악량이 범계위를 끌어다 억지로 앉혔다.
다과를 내려놓은 벽화령도 단아한 자태로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세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기를 잠시.
범계위가 불쑥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있어?”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잖아.”
벽화령의 대답에 범계위가 재빨리 조건을 달았다.
“혼인만 빼고.”
물끄러미 범계위를 보던 벽화령의 눈 위로 감출 수 없는 슬픔이 묻어났다.
“내가 그렇게 싫어?”
“…….”
괜히 미안해진 범계위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니라…….”
“그냥 가져가.”
“어? 그래도 돼?”
“필요하다며.”
“물론 필요하지. 그런데 이걸 그냥 준다고?”
“난 말이지…….”
잠시 말끝을 흐린 벽화령이 애틋한 눈빛으로 범계위를 응시했다.
“가가가 원하는 건 다 줄 거야.”
움찔하는 범계위의 모습에 벽화령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미 내 마음은 줬고, 몸이든 재산이든 범 가가가 필요한 건 다 줄 거야. 원한다면 해남파도 안겨 줄 수 있어.”
그녀는 목소리에 힘을 담아 진심을 말했다.
“그러니까 거절할 테면 해 봐.”
“……!”
범계위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 이 상황이 심히 곤란하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차라리 기련산 너머로 사라진 마귀들과 한데 뒤엉켜 싸우던 그 시절이 그리울 정도였다.
범계위의 입에서 깜짝 놀랄 말이 튀어나온 것도 그때였다.
“십 년 전에 했던 내기 기억하지?”
“…….”
“그거 내가 이겼어.”
초악량이 옆에서 눈치를 줬지만 범계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정인이 있다고.”
벽화령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놀라기는 초악령 역시 마찬가지.
“야, 이 미친놈아! 그걸 말해 버리면 어떡해?”
벽화령의 시선이 초악량에게 향했다.
“오라버니도 알고 있었어?”
“그, 그게…….”
당황한 초악량이 말끝을 흐리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차마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기 어려워 초악량이 무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벽화령이 표독스러운 눈빛을 흘렸다.
“그게 누군데? 설마 아까 가가가 말했던 ‘우리 단 의원’이라는 그 년이야?”
“아니야! 단 의원은 남자애라고!”
“그럼 누군데!”
벽화령이 빽 소리를 질렀다.
범계위와 초악량의 시선이 마주친 것도 동시였다.
―그걸 밝히면 줄초상을 치러야 할 게다! 운남 일대가 피바다가 될 거야!
초악량의 전음에 범계위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벽화령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경고였다.
그런 그를 벽화령이 다그쳤다.
“대체 어떤 년인데 그래?”
“한설화!”
“뭐?”
놀란 벽화령을 향해 범계위가 재차 대답했다.
“한설화라고.”
“빙옥선자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