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3)
신마의선-13화(13/500)
신마의선 (13)
“후우.”
눈앞에 흩어지는 뿌연 입김.
그 너머로 눈부시게 하얀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범계위는 한시라도 이 지랄맞은 추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목표했던 곳이 바로 코앞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이딴 곳에서 사는 거야?”
투덜거리면서도 범계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한파를 계속해서 뚫고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끝이 없을 것 같던 설원.
그 끝자락에 숲이 나타났다. 어떻게 이런 곳에 나무가 자라는지 신기했다.
우지끈.
범계위가 얼어붙은 나뭇가지들을 부수며 숲속에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작은 연못 하나를 발견했다.
그 옆에는 나무로 지어진 모옥이 위치해 있었는데 작은 바람에 흔들리는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수빙궁(修氷宮)?’
기껏해야 움막 수준인 모옥을 궁궐이라니.
하는 짓부터가 제정신이 아니다.
연못을 지나 모옥을 향해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휘잉.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범계위의 얼굴을 쓸었다. 가공할 한기를 품은 눈보라가 엄습해 온 것도 그때였다.
짜자작.
범계위의 수염이 얼어붙나 싶더니, 그대로 부서져 내렸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지독한 한기였다.
범계위가 급히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그제야 범계위는 지금 불어오는 바람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정도 위력의 가공할 음한진기(陰寒眞氣)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강호 전체를 뒤져도 한 사람뿐이었다.
“야! 이 미친년아!”
버럭 고함을 지른 범계위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대초자곤을 휘둘렀다.
쩌엉!
충격음과 함께 한순간 주위의 경물이 일그러졌다.
범계위의 일격에 의해 대기가 일순 진공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눈보라 한가운데가 썰물처럼 갈라졌다.
그리고 그 끝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옷을 입고 칠흑 같은 머리칼을 흩날리는 여인이었다. 그녀를 발견한 범계위가 대놓고 으르렁댔다.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이거 싸우자는 거 맞지?”
그 말에 여인이 손을 들어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었다.
그러자 그녀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이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하얗다 못해 투명하게까지 느껴지는 피부.
이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검은 머리칼과 붉은 입술은 더없이 고혹적이었다.
거기에 맑은 찻물처럼 깊은 눈빛이 더해지니 침어낙안(沈魚落雁)이니, 폐월수화(閉月羞花)니 하는 온갖 미사여구가 의미를 잃었다.
경국지색(傾國之色).
그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미모에 가슴이 진탕되지 않을 사내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나 확실히 범계위만큼은 예외였다. 저 얼굴에 속아 저승행 배에 몸을 실은 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싸워?
여인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전음을 날렸다.
―고작 너 따위와?
얼음을 깎아 놓은 듯 여전히 냉막한 표정.
그녀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범계위는 순간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전음으로 의사를 전달한다는 건, 자신과 말도 섞기 싫다는 뜻이 분명했다.
그러나 범계위는 그답지 않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참자. 참아야 해. 단 의원을 위해서!’
그렇게 몇 번씩 속으로 되뇐 후에야 치미는 화를 겨우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시 한 번 전음이 날아들었다.
―여긴 왜 온 거지?
“아, 맞다!”
탄성을 흘린 범계위가 씨익 웃었다.
“기다려 봐. 내가 선물 가져왔어.”
범계위의 행동에 한설화가 흠칫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범계위가 자신의 바지춤 안에 손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타구니 근처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런 파렴치한…….
“응? 뭐가? 이게 왜 파렴치해?”
범계위를 외면했던 한설화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범계위가 히죽 웃었다.
“해물 교자 좋아했잖아.”
―…….
“자, 던진다? 잘 받아.”
범계위가 종이로 감싼 교자를 그녀에게 던졌다. 그러나 정작 한설화는 오히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철푸덕.
감싸고 있던 종이가 찢어지며 교자가 눈밭 위를 나뒹굴었다.
범계위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짓이야? 사람이 성의를 보였으면 받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더러워.
“뭐?”
―그걸 왜 거기서 꺼내는 건데?
“여기가 제일 따듯하니까! 그냥 들고 왔으면 이 추위에 꽁꽁 얼었을걸?”
―감히 날 희롱해?
“살다 살다 별…….”
어이없다는 듯 범계위가 피식 웃었다.
“내가 미쳤냐? 몇 살인지 짐작도 안가는 할망구를 희롱하게? 나도 취향이란 게 있어.”
―……죽인다!
쿠웅.
한설화가 발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모옥 지붕 위의 눈 더미와 처마에 달려 있던 고드름이 후두둑 쏟아졌다. 고드름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허공에 떠 있었다.
노골적인 적의.
그 안에 담겨 있는 선명한 살기를 마주한 범계위가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자신은 있고?”
한설화는 손을 들어 범계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찌익!
범계위의 상의가 길게 찢어지며 핏물이 튀었다.
“…….”
범계위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어깨를 바라봤다.
피부 위로 남겨진 한 줄기 혈선이 눈에 들어왔다. 화살처럼 날아든 고드름이 훑고 지나간 자리였다. 사전의 예비 동작도, 심지어 그 어떤 전조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십여 장의 거리.
그 거리를 찰나에 지워 버린 것이다.
심지어 범계위는 눈앞에서 번쩍이는 섬광밖에 보지 못했다.
어깨를 파고드는 예리한 경력을 느끼고 나서야 암기의 존재를 깨달았던 것이다.
본능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험한 꼴을 면치 못했을 터.
범계위의 인내심도 거기까지였다.
“이 미친년이!”
범계위가 눈밭을 박차며 달려든 것과 한설화가 손을 뻗어 허공의 한 점을 두드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번쩍.
범계위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젖혔다.
화끈한 느낌에 범계위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쓸었다.
길게 갈라진 뺨에서 흥건한 핏물이 묻어 나왔다. 범계위의 눈에서 흉흉한 한광이 솟구쳤다.
‘이 미친놈!’
그 와중에도 계속해 거리를 좁혀 오는 범계위의 모습에 한설화는 내심 어이가 없었다.
범계위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모함에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절정에 이른 고수는 일정 거리 안의 공간을 완벽히 자신의 지배 아래 둘 수 있다. 그 어떤 조건이나 제약이 붙지 않는, 그야말로 모든 생사여탈권(生殺與奪權)을 결정하는 절대 공간이다.
그녀 자신이 그렇고, 당금 최고 고수라는 천하오절이 그랬다.
그만큼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였다.
물론 범계위도 상당한 고수다.
그렇지 않고서야 십대악인에 포함된 채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없을 테니까.
그 역시 자신만의 절대 공간을 지니고 있었고, 그 안에서만큼은 상대의 삶과 죽음을 주재하는 지배자다.
‘하지만…….’
한설화는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확신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그녀를 중심으로 한 십 장 안의 공간은 이미 하나의 거대한 결계와도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처럼 무턱대고 달려들다니.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다.
―흥!
그녀의 발밑에 은은하게 깔려 있던 경력이 일제히 칼날처럼 솟구쳤다.
그 순간.
범계위의 손에 들려 있던 대초자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희뿌연 그림자가 가득 차 버렸다.
쩌엉!
거대한 충격파가 장내를 집어삼켰다.
시간이 멈추고, 공간이 갈라진 것도 한순간이었다.
―너……?
한설화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어느새 거리를 좁힌 범계위가 불쑥 손을 뻗어 왔다.
여러 겹으로 중첩된 삼엄한 경력의 파도를 비집고 들어와 끝내 자신의 공격을 욱여넣은 것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알던 범계위가 아니었다.
‘피를 보고도 멀쩡해?’
범계위와 시선이 마주친 것도 그때였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핏발로 가득했다. 그런데 눈빛은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뚜렷한 이지(理智)가 광기를 대신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의아함도 잠시.
―흥!
범계위의 공격을 걷어 내기 위해 한설화 역시 마주 손을 휘둘렀다.
콰앙!
손과 손이 부딪쳤다고 믿기지 않는 굉음이 천지를 가득 메웠다. 동시에 두 사람의 격돌이 만들어 낸 충격파가 주위를 집어삼켰다.
“젠장!”
주르륵 뒤로 밀려난 범계위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한설화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범계위 때문이었다.
한설화가 뒤로 물러서며 손바닥을 내보였다.
“이제 와서 왜? 항복이라도 하려고?”
으르렁대는 범계위를 향해 전음이 날아들었다.
―아니지?
“뭐가?”
―방금 부딪친 손.
“……?”
―아까 사타구니 만졌던 손이잖아!
“어? 글쎄?”
범계위가 손을 들어 코로 가져가더니 킁킁 냄새를 맡았다.
“맞는 것도 같고?”
―너어…….
황당함과 분노에 한설화가 전음을 잇지 못했다.
한설화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닦기 시작했다.
범계위는 황당할 수밖에.
“싸우다 말고 뭔 짓이야?”
―더러워.
끔찍한 것이 묻은 것처럼 한설화가 진저리를 쳤다.
참다못한 범계위가 먼저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이미 한설화는 멀찌감치 물러선 뒤였다.
“어?”
그녀가 피할 줄은 예상치 못했던 터라 범계위는 일순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한설화를 쫓기 시작했다.
한설화는 거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딱 정확히 범계위가 좁히는 거리만큼 물러섰다.
“거기 서!”
―그 더러운 손으로 어딜!
그렇게 연못을 사이에 끼고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결국 먼저 지친 것은 범계위였다.
다른 건 어떻게 비벼 볼 수 있겠는데, 경공에서만큼은 그녀의 상대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봐. 너 나 무섭지?”
범계위가 한설화를 도발해 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냐. 더러워서 피하지.
“그건 똥이고!”
―잘 아네?
태연하게 응수하는 한설화의 전음.
그것이 범계위의 속을 뒤집었다.
“어떤 미친놈이 싸우기 전에 손을 씻어?”
―그럼 평소에 깨끗이 관리했어야지.
“그놈의 결벽증!”
―닥치고 꺼져. 아니면 씻고 다시 오든가. 이대로 널 죽이면 이곳이 오염될 것 같으니까.
“에이 씨!”
쿠웅.
범계위가 힘껏 발을 굴렀다.
그 충격에 바닥의 눈더미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그리곤 허공을 움켜쥐듯 잡아당긴 범계위의 손을 따라 그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그 상태에서 범계위가 다시 한 번 진기를 끌어 올렸다.
치익.
허공에 뭉쳐 있던 눈더미가 순식간에 녹아 물웅덩이를 이뤘다.
쏴아아.
쏟아진 물을 흠뻑 뒤집어쓴 범계위가 당당하게 외쳤다.
“이제 됐냐?”
한설화는 그 모습을 한심하게 지켜봤다.
격공섭물(隔空攝物)에 이은 삼매진화의 신기(神技)를 고작 저렇게 사용하다니.
―넌 역시 멍청해.
한설화가 손을 들어 범계위를 가리켰다.
휘이잉!
동시에 엄청난 한기가 범계위를 향해 몰아쳤다.
“어?”
범계위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젖은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기 시작한 것이다.
“큭!”
뒤늦게 범계위가 내공을 끌어 올렸지만, 대응이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쩌저적.
몸이 얼어붙는 건 간신히 막았다.
하지만 그 상태로 싸움은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한기에 맞서는 내력이 분산될 터.
“치사한 년!”
―멍청한 것보단 낫지.
“내가 왜 멍청해!”
한설화가 한심하다는 눈빛을 던졌다.
―애초에 나를 찾아온 이유도 잊어버렸잖아.
“어? 그러고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