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30)
신마의선-130화(130/500)
신마의선 (130)
꿀꺽.
범계위가 한 차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벽화령이 휙 고개를 돌려 초악량을 노려봤다.
“진짜예요?”
“그, 그게…….”
초악량이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놀란 사람은 비단 그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 자식이 대체 어쩌려고?’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초악량을 향해 범계위가 전음을 날렸다.
―마녀 정도는 되어야 쟤가 포기를 하지!
초악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사실이다.”
“……!”
“최근에도 함께 여행을 했지. 이번 일을 마무리한 뒤 다시 그쪽으로 합류할 예정이다.”
벽화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떻게 설화 언니가…….”
벽화령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의 그 어떤 여자라도 범계위를 되찾아 올 자신이 있었지만 딱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미모면 미모, 무공이면 무공.
어느 것 하나 자신은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망연자실.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앉아 있던 벽화령이 비틀거리며 신형을 일으켰다.
그리곤 핏기 한 점 없는 창백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초악량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오랜 시간 동안 온 마음을 다해 범계위에게 부딪쳐 온 벽화령이었다.
그런 만큼 지금 그녀가 감내해야 할 충격과 절망이 얼마나 클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상사병은 약도 없거늘.’
내심 혀를 차던 초악량이 범계위를 노려봤다.
대체 벽화령 정도씩이나 되는 여자가 왜 이런 놈에게 목을 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월동문으로 향하던 벽화령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서 범계위에게 말했다.
“그래도 기다릴 거야.”
“……?”
의아해하는 범계위를 향해 벽화령이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가가보다 더 멋진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범계위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말을 해 주기도 애매한 상황이라 그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는 눈치를 본 것이지만 이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벽화령이 구슬 같은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뺨을 타고 흐르다 턱 끝에 맺혀 방울져 떨어진 눈물이 그녀의 붉은 당혜를 적셨다.
눈물을 닦아 낸 벽화령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가가에게 무엇도 강요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만약…….”
“……?”
“만에 하나라도 방금 한 말이 거짓이라면…….”
이어진 벽화령의 말에 범계위와 초악량이 흠칫했다.
“죽는 거야. 전부 다.”
벽화령이 애써 웃었다.
비에 젖은 배꽃처럼 더없이 처량하고 쓸쓸한 미소였다.
해남도를 떠나는 배 위.
한참 멀어진 해남도는 이미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윽고 해남도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범계위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삐이익!
어디선가 들려온 매의 울음소리에 흠칫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벽화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배를 몰던 해남파 무인들이 눈에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좇아 눈을 드니 창공을 가르며 쏜살같이 날아드는 매 한 마리가 보였다.
벽화령이 키우는 송골이었다.
해남파 무인 중 한 명이 매가 내려앉은 홰로 다가갔다.
그리고 매의 다리에 묶여 있던 쪽지를 풀어 내용을 확인하더니 범계위에게 건네주었다.
“대랑께서 보내신 전서입니다.”
“나한테?”
쪽지를 받아 든 범계위가 머리를 긁적였다.
글자가 어지럽게 번져 있어 도무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런 범계위를 대신해 옆에 서 있던 초악량이 서신을 읽었다.
―내 말 명심해.
서신에 적힌 건 그게 전부였다.
범계위가 미간을 찌푸렸다.
“뭘 명심하라는 거지?”
초악량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던졌다.
“둘 다겠지. 기다리겠다는 것과 거짓말이면 전부 죽는다는 것까지.”
그 말에 범계위가 나직이 툴툴댔다.
“쳇.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뭐?”
“십 년 전에 분명히 화령의 마음을 거절했고, 그 당시 내기도 내가 이겼수.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거유?”
“지금 네가 들고 있는 그게 잘못한 거다.”
“이거?”
범계위는 염화단철이 담긴 상자를 들고 있었다.
“염치가 없지 않느냐? 사람 마음을 이용해 필요한 것만 가져왔으니.”
“무슨 소리요? 해남파도 골치 아파서 어쩌지 못하는 놈들을 처리해 줬으니 그냥 가져온 건 아니지.”
“됐다. 말을 말자.”
“너무 그러지 마슈. 나도 날 좋아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건 싫으니까.”
이건 초악량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진심도 아닌데 받아 주면 화령이가 행복해지는 거유?”
초악량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람 마음을 어찌 이성으로 판단할까?
그렇게 생각하자 범계위도 안쓰러웠다. 실제로 이 여정 자체가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을 위해 나선 것이니까.
“그래도 단 의원은 좋아하겠지?”
범계위는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는 염화단철이 들어 있는 상자를 끌어당겼다.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진짜 문제는 어쩔 셈이냐?”
“진짜 문제?”
고개를 갸웃하던 범계위가 초악량의 말에 그대로 낯빛이 굳어졌다.
“한 누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
한설화를 떠올린 범계위는 섬뜩한 오한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친 범계위가 초악량을 노려봤다.
“잊지 마슈.”
“뭘?”
“초 형도 공범이유.”
“뭐, 인마? 그건 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럭 하던 초악량은 주변의 이목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삼켰다.
초악량이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어쩌다 이런 놈하고 엮여서…….”
범계위가 억울한 듯 초악량을 노려봤다.
“무슨 소리유? 심산유곡에서 잘 지내고 있던 사람 꼬드겨 낸 게 누군데?”
“…….”
초악량은 그만 할 말이 없어졌다.
이럴 때만 쓸데없이 예리한 범계위였다.
* * *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점창산을 내려오는 길.
들고 있던 연판장을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단악선이 이립과 홍적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허허, 아닐세. 우리가 한 게 뭐 있다고.”
이립의 겸양에 나란히 서 있던 홍적문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구려.”
이립이 째려보자 홍적문이 시선을 회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할 말은 계속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이게 전부 신의께서 덕을 쌓았기에 가능한 일 아니오? 우리야 뭐, 전서구 몇 번 날린 게 다인걸.”
이립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단악선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개방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점창파 장문인의 수결을 얻지 못했을 거예요. 다시 한 번 두 분께 감사드려요.”
예의 바른 단악선의 모습에 이립이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보면 볼수록 어찌나 기특하고 대견한지…….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욱 마음이 갔다.
“연판장을 완성하려면 이제 얼마나 남은 것이냐?”
한설화의 물음에 단악선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거의 다 된 것 같아요. 이제부터는 가는 길에 중소 문파의 명숙들도 찾아뵈려고요.”
한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눈을 들어 더없이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가을이구나.”
원단을 넘기고 신마곡을 떠난 이후, 봄과 여름을 지나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벌써 백로(白露)가 코앞인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갈 건가?”
홍적문의 물음에 단악선이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곤 빙그레 웃었다.
“아미파로 가려고요.”
단악선의 대답에 이립이 움찔했다.
“아미파?”
“네. 그래야 아저씨들도 수월하게 합류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에 이립이 곤란한 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유를 짐작한 홍적문이 이립을 향해 안쓰러운 눈빛을 던졌다.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어색한 침묵에 단악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하하, 아니다. 아무것도.”
짐짓 쾌활하게 웃은 이립이 홍적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미파는 여기 홍 장로가 안내해 줄 것이다. 나는 아미파의 일이 마무리되면 나중에 다시 합류하도록 하마.”
“네? 왜요?”
“아미파에는 내가 가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 게다. 아니, 오히려 방해가 될 테지.”
이립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거기에 날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있거든.”
“……?”
“자세한 건 홍 장로가 가면서 이야기해 줄 것이다.”
아무리 떠들기 좋아하는 이립이라도 자신의 과거를 입에 담는 건 곤욕스러웠던지 홍적문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그럼 나중에 보자꾸나.”
그 말만을 남긴 채 이립이 언덕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 보름이 지났다.
* * *
사천 아미산 인근.
단악선 일행은 가까운 마을에 방문했다.
아미파를 방문하기 전에 휴식도 취하고 선물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게 좋을까요?”
단악선의 고민에 한설화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등을 밝힐 기름이 좋을 것 같구나.”
“기름이요?”
“값비싼 선물은 그녀들이 먼저 거부할 것이다. 구파일방 중 가장 검소한 삶을 추구하고, 실제로도 가장 검소한 문파가 아미이기 때문이다.”
단악선의 의아한 시선이 홍적문을 향했다.
과연 거지들의 방파인 개방보다 검소한 곳이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이를 눈치챈 한설화가 한마디로 일축했다.
“검소와 궁상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 말에 홍적문의 얼굴이 붉어졌다.
여느 때라면 개방의 모욕을 참지 않을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한설화였기 때문이다.
‘궁상이 아니라 스스로 빈한(貧寒)을 추구하는 겁니다.’
가난한 만큼 물욕에 얽매이지 않았고, 그래서 그만큼 대의를 걸을 수 있었다.
그게 개방의 정신이고 혼이었다.
아울러 개방에 몸담은 자들의 긍지이기도 했다.
하나 그 말을 차마 꺼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뭐라는 거야?”
난데없는 목소리에 홍적문이 화들짝 놀랐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시야를 가득 메운 거대한 체구가 눈에 들어왔다.
‘망산초자!’
범계위였다.
게다가 혈수존자도 함께였다.
‘하다 하다 이제는 생각까지 훔쳐 읽는 것인가?’
예상치 못한 그들과의 조우에 홍적문이 당황한 사이.
“아저씨!”
“단 의원!”
단악선이 날 듯이 달려와 범계위의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으하하하! 나도. 우리 단 의원이 보고 싶어서 잠이 안 오더군.”
그래서 잠도 안 자고 몇 날 며칠을 달려왔다.
초악량이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졸지에 쉬지도 못하고 범계위와 나란히 밤을 새워 달려야만 했던 것이다.
단악선이 고개를 돌려 초악량을 바라봤다.
“초 아저씨는 괜찮으세요?”
“문제없다.”
초악량이 애써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마터면 중간에 내상이 도질 뻔한 적도 있었지만 단악선의 걱정 어린 표정을 보자 차마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이때 범계위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못내 염려가 되었던지 단악선이 자신의 품을 벗어나 초악량에게 향했기 때문이다.
반면 초악량은 곤란한 표정으로 손목을 내밀었다.
단악선이라면 으레 맥부터 짚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한데 아니었다.
“어엇?”
초악량의 입에서 당혹성이 새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단악선이 그가 내민 손을 지나쳐 그대로 허리를 안아 왔기 때문이다.
“걱정 많이 했어요.”
“난 괜찮다. 그러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짐짓 무뚝뚝하게 말하는 초악량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슬쩍 올라간 그의 입매는 광대 근처를 노닐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설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시절은 다 갔군.”
사고뭉치들이 돌아왔으니 한동안 마음 편했던 여정도 오늘로써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