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33)
신마의선-133화(133/500)
신마의선 (133)
아미산에 오를 준비를 마친 일행은 마지막으로 시장에 들렀다.
미리 주문했던 유등의 기름을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어른 한 명이 껴안아도 손이 닿지 않을 만큼 거대한 항아리를 보며 홍적문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팔자에도 없는 지게꾼 노릇을 하게 생겼군.”
혹시나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자신 말곤 달리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초악량과 범계위는 아미산을 오르지 않을 테니 제외.
가두달도 어딜 갔는지 이른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린 단악선에게 항아리를 옮기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니 남는 건 한설화뿐인데…….
그거야말로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별수 없이 지게를 짊어진 홍적문의 눈에 단악선이 모습이 들어왔다.
우두커니 선 단악선이 어딘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금정사의 사면십방보현좌상(四面十方普賢座像)이구나.”
홍적문의 말에 단악선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금정사라면 아미파의 사찰 아닌가요?”
“맞다. 그 금정사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불상이다.”
아미파에 불광아미(佛光峨嵋)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아미파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금정봉(金頂峰)의 복호사(伏虎寺)는 원래 도교 사원으로 창건되었었다.”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아미산은 도교의 성지였었다.
이후 크게 융성한 불교가 아미산에 자리를 잡으며 불교의 성지로 바뀐 것이다.
“복호사 외에도 수많은 사찰이 즐비하지만, 특히 유명한 곳이 바로 금정사다.”
십 장이 넘는 크기의 거대한 황금 불상.
이 때문에 아침마다 산봉우리를 감싼 안개가 금빛으로 물드는 것이다.
“그래서 금정(金頂)이라 하는군요.”
고개를 끄덕인 홍적문이 손을 들어 목불을 가리켰다.
“불상의 얼굴이 많지?”
“네. 저도 그게 신기해서 보고 있었어요.”
“거기에는 각각 모든 방면을 살펴 가엾은 자들을 구원하겠다는 중생 구도의 염원이 담겨 있다.”
“아!”
단악선이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겉모습과 달리 홍적문은 매우 박식했고, 설명도 귀에 착착 감겼다.
“그런데요…….”
말끝을 흐리는 단악선의 모습에 홍적문이 의아한 눈빛을 흘렸다.
“더 궁금한 것이 있느냐?”
“네. 그런데 여쭈어봐도 될지 몰라서요.”
홍적문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우리 사이에 어려울 게 뭐가 있을까. 얼마든지 물어봐라.”
잠시 망설이던 단악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미파와 방주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어째서 이립이 그토록 아미파를 곤란해하는지 그 이유가 내내 궁금했던 단악선이었다.
“그건 이대로 말하긴 어려우니 일단 좀 걸을까?”
홍적문이 지게를 짊어진 채 걸음을 옮겼다.
단악선이 그와 나란히 서서 움직이자 자연스럽게 나머지 일행도 그 뒤를 따랐다.
그사이 초악량과 범계위 사이에서 작은 실랑이가 오갔다.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는 게 어떻겠느냐?”
“그러슈.”
“응?”
“난 산 아래까지 단 의원 배웅할 거요.”
“그러다 아미파 비구니들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그게 뭐 어때서.”
“뭐?”
“이미 우리가 함께 다니는 건 다 알려졌다 하지 않았소? 아미파 안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그걸로 트집은 잡지 않겠지.”
초악량이 눈살을 찌푸리며 범계위를 노려봤다.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좀처럼 단악선 곁을 떠나지 않는 범계위였다.
결국 초악량도 마지못해 일행을 따라나섰다.
대화 상대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게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을 오르던 도중 홍적문이 입을 열었다.
“방주와 아미파의 정인사태(正仁師太)는 한때 사랑하던 사이였다.”
“방주님이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단악선의 모습에 홍적문이 빙그레 웃었다.
“지금이야 볼품없이 늙어 간다지만 소싯적엔 방주의 인물이 제법 괜찮았거든. 머리도 풍성했고.”
“아!”
단악선이 힐끔 고개를 돌려 범계위를 바라봤다.
뒤에서 따라오던 범계위가 단악선과 시선이 마주치자 영문도 모른 채 씨익 웃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단악선도 마주 웃었다.
홍적문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지금도 중원 최고의 연애담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려 황족과 거지의 연애담이었기 때문이다.
“불가에 귀의하기 전, 정인사태의 속명은 주은예였다. 황실의 핏줄을 이어받은 정난군주(靖暖郡主)가 바로 그녀지.”
“군주라면 친왕(親王)의 딸이라는 거군요?”
황제의 아들, 즉 황제의 서자나 황제의 형제 가운데 왕으로 책봉되었으나 봉지를 받지 못한 이들이 친왕(親王).
군왕(郡王)은 친왕에 다음가는 작위로, 황태손을 제외한 아들들에게 주어지는 작위이며, 여자일 경우에는 군주(郡主)의 작위를 받는다.
홍적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녀는 당시의 황제를 조부로 둔, 황실 일가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주은예는 소문난 말괄량이에 호기심도 대단했다.
날이 따뜻한 어느 날인가 그녀가 호위들을 따돌리고 가출을 감행했는데, 그 이유인즉슨 계림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흑도 무림 문파와 시비가 걸렸고, 마침 그곳을 지나던 개방의 협사가 위기에 빠진 그녀를 구했다.
“그 협사가 방주님이셨군요.”
“뻔한 이야기지.”
이를 계기로 주은예는 이립을 흠모하게 되었다.
고리타분한 격식과 예의에 얽매인 황실 인사들과 달리 자유분방하고 호쾌한 면모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피 끓는 젊은 남녀가 함께 강호를 주유하며 사랑에 빠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그런데 그녀가 황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이립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황실은 당연하게도 두 사람의 관계를 격렬히 반대했고, 그 의미를 담아 개방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방주는 선택을 해야 했지.”
개방을 버리고 주은예와 함께 은거를 할 것인가. 아니면 주은예와의 관계를 포기하고 개방을 지킬 것인가.
“방주님은 개방을 선택하셨군요.”
홍적문이 씁쓸하게 웃었다.
“방주의 결정에 큰 충격을 받은 그녀는 속세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구니가 되었지.”
그 안타까운 이야기에 단악선이 탄식을 흘렸다.
“슬픈 이야기네요.”
“방주는 그리 말하더구나. 어느 쪽을 선택했건 어찌 후회가 남지 않겠느냐고.”
“개방을 버릴 수는 없었나요?”
“나 역시 내심 그러길 바랐지만…….”
말끝을 흐린 홍적문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얼마나 고집이 센 인간인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개방으로부터 받은 은혜.
이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겠다는 맹세로 이립은 사랑을 포기한 것이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렸을 게야.”
“그래서 아미파를 불편해하셨군요.”
“아니.”
“……?”
“용기가 없는 게지. 다시 그녀를 마주할.”
그렇게 이야기를 마칠 때쯤 단악선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말없이 뒤따르던 한설화가 어느새 앞을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악량과 범계위 역시 마찬가지.
각각 좌우로 나뉘어 단악선 옆에 바짝 붙었다.
세 사람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일정한 진세를 구축한 채 서 있는 십여 명의 사내들이 보였다.
홍적문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항아리를 실은 지게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저쪽에서 사내들이 다가왔다.
그들의 소매에는 선명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당가의 독종들이군.”
소매에 새겨진 꽃은 당가.
그것도 직계 혈족을 상징하는 국화였다.
천천히 걸어온 당가의 무리들이 이 장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그중 선두의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서른 후반쯤 되었을까.
유달리 창백한 안색과 눈매에 감도는 붉은 기운이 묘한 대비를 이루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내였다.
그의 시선은 초악량에게 고정된 채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역시 혈수존자. 배짱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시는군요.”
초악량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우리가 본 적이 있던가?”
“오늘 처음 뵙습니다. 하나 다른 사람도 아닌 제가 귀하를 어찌 몰라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운을 뗀 그가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당신 손에 돌아가신 천수암제, 그분이 바로 제 백부님이십니다.”
“……!”
초악량의 검미가 꿈틀했다.
아버지의 원수는 아니라고 하나, 백부라면 한마디로 직계 혈족인 셈. 그런데 사내는 초악량을 마주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당령이라 합니다. 부족하나마 본 가의 당가타주(唐家陀主)를 맡고 있지요.”
당가는 가주와 직계를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뤄 오랜 세월 사천의 패주로 군림해 오고 있었다. 특히나 비탈을 따라 늘어선 가옥들은 하나의 거대한 요새와도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 마을 자체를 당가타라 불렀다.
당가타주는 가주 다음으로 높은 중책이었다.
“복수를 위해 온 것인가?”
초악량의 물음에 당령이라 자신을 소개한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유감스럽게도 아닙니다.”
“그럼?”
묘하게 웃던 당령의 눈 위로 섬뜩한 살기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감히 사천에 다시 발을 들이셨다기에 인사나 드리러 왔습니다.”
초악량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방금 감히라고 했나?”
당령의 시선이 초악량 옆에 서 있는 단악선을 향했다.
“저 아이의 연판장이 완성되면 앞으로 정파인은 무위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들었습니다.”
“……?”
“우리가 가지 못한다면 여러분도 그런 곳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공평하지요.”
그제야 초악량은 당령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앞으로 사천 쪽은 얼씬도 하지 말라는 뜻이군?”
당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의미 모를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재밌군.”
초악량이 입매를 말아 올렸다.
“이렇게 대놓고 내게 시비를 걸어온 자는 정말 오랜만이야.”
당령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본 가를 적으로 돌리고 사천 땅을 밟은 사람도 오랜만이긴 합니다.”
독심(毒心)의 당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당가는 혈족의 원한을 결코 잊는 법이 없었고 혈족의 죽음과 관련해 그들은 단 한 번도 복수를 이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집요한 복수가 지금의 당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인 악명.
그것이 당가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었고, 당금 강호에서 누구도 섣불리 그들을 적으로 삼지 않으려는 이유가 되었다.
하나 세상에는 늘 예외라는 게 존재하는 법.
특히 초악량이 그랬다.
“담이 매우 크군.”
초악량의 입가에 맺혀 있던 웃음이 짙어졌다.
“하나 똑똑하진 않아.”
초악량에게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상대가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 것이다.
“그 뻔뻔한 면상과 혓바닥만큼 실력도 좋아야 할 거야. 그렇지 않다면 명년의 오늘이 제삿날이 될 테니까.”
초악량이 살기를 드러내자 범계위도 히죽 웃으며 그 옆에 나란히 섰다.
그 모습에 당령이 미간을 찡그렸다.
“귀하와는 은원이 없습니다만?”
“퇫!”
범계위가 간식으로 질겅이던 육포를 뱉어 냈다.
“방금 생겼어. 너 때문에 입맛이 떨어졌거든.”
두 고수가 뿜어내는 가공할 살기를 마주하고도 당령은 태연했다.
“만약 여기서 싸운다면 누군가는 필시 죽을 텐데요?”
당연한 소리를 지껄이는 당령의 말에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이어진 그의 말에 초악량이 분노했다.
“절명전만 돌려주신다면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