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34)
신마의선-134화(134/500)
신마의선 (134)
“절명전을 돌려 달라고?”
초악량이 이를 갈았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사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 욱여넣은 나한당주의 사자모니인.
그로 인해 한순간 호신강기가 무너졌고, 천수암제의 손을 떠난 그 망할 강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어깨를 파고들던 끔찍한 고통이 아직까지 뇌리에 선명했다.
초악량이 서늘한 살기를 뿜어냈다.
“거절한다.”
“……!”
당령 뒤에 시립해 있던 사내들의 표정이 흔들렸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기파에 순간 기가 질린 것이다.
그런데 더 당혹스러운 건, 시간이 지날수록 살기가 더욱 거대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살기가 비등점을 넘었다.
당령을 위시한 사천당가의 무인들이 일제히 손을 움직였다.
어떤 이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고, 어떤 이는 소매 속에 손을 넣었다.
언제라도 암기와 독을 발출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것이다.
이때 어디선가 날아든 한 줄기 카랑카랑한 음성이 허공을 흔들었다.
“누가 감히 아미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가!”
웅혼한 내공이 실린 창노한 목소리에 중인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오십여 명의 여승을 이끈 채 장내로 들어서는 한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월이 무색하게 주름 한 점 없는 홍안.
체구는 왜소했으나 오랜 수양을 통해 얻은 눈빛만큼은 더없이 시리고 단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범접하기 어려운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과거에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어 초악량도 안면이 있는 여승이었다.
당대 아미파의 장문인인 정연신니(正然神尼)가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그녀의 등장에 초악량이 살기를 흩으며 물러섰다.
반면 미처 살기를 거두지 못한 당가의 인물들은 당황한 눈으로 당령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런 그들을 향해 추상같은 음성이 쏟아졌다.
“끝내 그대들은 빈니 앞에서 본 파의 손님들께 무례를 저지를 생각인가? 정녕 그것이 당가의 의지란 말인가?”
당령이 마른 웃음을 풀썩였다.
“그럴 리가요.”
당령이 소매 속에 넣었던 손을 빼며 짐짓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후배 당 모가 본 가의 이천 식솔을 대신해 장문인께 인사드립니다.”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정연신니의 모습에 당령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녀의 눈빛과 표정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 자체가 이미 무언의 축객령과 다름없었다.
“중생 구도를 위해 대자대비를 몸소 실천하시는 분들 앞에서 어찌 감히 살계를 열겠습니까. 저는 그렇게까지 뻔뻔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와 슬쩍 한 발 빼는 당령의 모습에 초악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련이 가득한 놈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참초제근(斬草除根).
차라리 이곳을 피로 씻더라도 나중의 화근이 될 독초를 최대한 솎아 내고 싶었다.
눈앞의 칼은 두렵지 않으나 숨어 있는 칼은 두렵기 때문이다.
그만큼 놈들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악명 높았다.
괜히 독본암종(毒本暗宗)이라 하는 게 아니었다.
정연신니의 등장이 달갑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 초악량의 눈빛을 읽은 것일까.
정연신니가 가까이 있던 여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손님들께서 가신다니 길을 잃지 않도록 정중히 배웅하거라.”
“네, 장문 사저.”
몇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자신들에게 다가서는 노비구니의 모습에 당령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말이 좋아 안내지 사실상 감시를 붙인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반면 단악선 일행을 맞이하는 여승들의 태도는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
“이거 섭섭합니다. 아무리 구파일방이 무림맹과 갈라섰다 하나 그래도 정파의 일원인 것을.”
당령의 말에도 정연신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당령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묘서동처(猫鼠同處)인가…….”
말 그대로 고양이와 쥐가 함께 산다는 뜻.
적대 관계에 있는 쌍방이 오히려 사이좋게 잘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견제와 반목을 해 왔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같은 정파.
그런데도 자신들은 홀대하고 사파인 저들에겐 손님 대접을 하니 적잖게 속이 뒤틀린 것이다.
대놓고 비꼬는 그 말에도 정연신니는 그저 침묵으로 응수할 뿐이었다.
이윽고 당령이 휘하 무인들을 대동한 채 돌아섰다.
당령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자 정연신니가 차갑게 코웃음 쳤다.
“개방의 늙은 거지가 아미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홍적문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자 그제야 정연신니의 굳어 있던 표정이 누그러졌다.
“오랜만입니다, 홍 장로. 그간 잘 지내셨지요?”
“덕분인가 싶습니다.”
두 문파가 구파일방에 함께 적을 두고 있던지라 오랜 세월 교분을 나누어 온 두 사람이다.
“그런데…….”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본 정연신니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어찌하여 방주께서는 오지 않으신 겁니까? 점창까지는 동행하셨다 들었는데?”
“아시다시피 늘 바쁜 사람 아닙니까.”
홍적문이 곤란한 표정을 감추며 애써 웃었다.
그 모습에 정연신니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라 해서 어찌 모를까.
“개방의 방주가 공사다망한 자리라는 것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래도 조만간 시간을 내어 본 파를 한번 방문해 주십사 전해 주시겠습니까?”
“네? 갑자기요?”
정연신니가 씁쓸한 미소를 내비쳤다.
“우리 사매를 위해서라도 꼭 부탁드립니다.”
홍적문은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연신니의 사매는 오직 한 사람뿐.
“혹 정인사태께 무슨 일이라도?”
그녀는 출가한 이후 단 한 번도 이립과 만난 적이 없었다.
속세와의 연을 완전히 끊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녀의 뜻을 알기에 정연신니 역시 굳이 이립과 그녀의 만남을 주선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철저하게 차단했다.
그랬던 그녀가 이립의 방문을 청한다는 것은 그만큼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의미였다.
“서로를 얽어맨 오랜 업.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마지막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홍적문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그리 전하겠습니다.”
이립을 떠올린 홍적문은 벌써부터 마음이 심란해졌다.
홍적문이 단악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나는 잠시 산을 내려갔다 오마.”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홍적문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나중에 다시 합류하겠습니다.”
그 말에 초악량과 범계위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서로의 눈빛 속에서 꿈틀대는 살기를 확인한 두 사람이 조용히 웃었다.
“함께 가지.”
초악량의 말에 범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우리는 배웅만 하려고 한 거니까.”
애초에 두 사람은 단악선과 함께 아미산에 오를 생각도 없었다.
그보다 지금은 다른 것이 우선이었다.
바로 당령과 그 수하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당가와는 완전히 척을 진 상황.
―먼저 시비를 걸어온 놈들을 순순히 보내 줄 수 없지.
범계위의 전음에 초악량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이대로 포기하고 물러설 놈들이 아니었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흐려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이 바로 당가의 원한이기 때문이다.
―당가가 완전히 지워진다면 그 원한도 갈 곳을 잃겠지.
초악량의 전음에 범계위가 씨익 웃었다.
―흐흐. 역시, 이래야 초 형답지.
당령이 알았다면 소스라치게 놀랄 대화를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았다.
그러다 문득 초악량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물끄러미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단악선의 모습이 보였다.
“저, 잠시 저분들과 이야기 좀 나눠도 될까요?”
정연신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단악선이 초악량과 범계위 쪽으로 향했다.
단악선이 다가서자 두 사람이 짐짓 딴청을 부렸다.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떼는 그들을 향해 단악선이 말했다.
“당가와의 원한은 저도 같이 풀어야 해요.”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범계위의 말에 초악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들의 계획을 인정해 버린 셈이었기 때문이다.
단악선은 이미 짐작했던 일이라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혹시 당가 사람들이 절명전을 원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셨나요?”
그제야 범계위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게. 그놈들이 왜 절명전을 원하는 걸까?”
“만드는 방법이 밝혀질까 봐 그러겠지.”
초악량이 담담히 대답했다.
암기와 독으로 절대적인 아성을 구축한 당가였다.
자신들의 비전 암기가 외부로 유출된다면 그만큼 명예가 실추될 터.
그래서 기를 쓰고 회수하려는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단악선의 생각은 달랐다.
“절명전에 묻어 있던 독 때문일 거예요.”
“독?”
초악량의 반문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지독하고 특이한 독이었거든요. 분명 당가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을 거예요.”
초악량의 눈빛이 흔들렸다.
비로소 뭔가 감이 잡혔기 때문이다.
단악선이 그 독을 해독했고, 덕분에 자신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놈들은 그 사실이 달갑지 않겠군.”
비전 독은 오직 자신들만 해독할 수 있을 때 비전 독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그렇다는 건…….”
초악량이 말끝을 흐렸다.
이로써 놈들이 단악선을 찾아올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단악선이 독을 분석해 해독제를 만들어 뿌리면 자신들의 밑천 하나가 털리는 셈이다.
초악량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이번 일은 우리 두 사람이 해결하마.”
단악선에게 위협이 될 것이 분명한 당가를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러나 단악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제 일이기도 해요.”
의외의 말에 초악량이 당황한 사이 단악선이 말을 이어 갔다.
“당가는 부모님과도 악연이 깊었거든요.”
그리고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는 사천당가가 새로운 독을 만들 때마다 해독제를 만드셨어요. 엄마는 그들의 독이 어설픈 애들 장난 같다고 비난했고요.”
“으음…….”
“저들의 진짜 목적은 저예요. 그러니 아저씨들이 책임지실 필요 없어요.”
초악량이 씁쓸하게 웃었다.
단악선 또한 이미 선대부터 당가와 악연을 이어 온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단악선이 진지한 표정으로 초악량을 응시했다.
“완쾌될 때까지만이라도 참아 주세요. 이건 의원이 아니라 제 개인적인 부탁이에요.”
초악량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단악선이 쐐기를 박았다.
“완쾌되신 이후라면 말리지 않을게요. 그리고 그때는 저도 함께 싸울게요. 그게 어떤 방식이든지요.”
잠시 곤혹스런 눈빛을 흘리던 초악량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거겠지.’
긴 대화가 오갔지만 결국 단악선은 초악량을 걱정하는 마음이 먼저였다.
함께 싸우겠다는 말까지 하는 단악선을 보자 심장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마.”
범계위도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악선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차마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의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듯하자 그때까지 말없이 서 있던 정연신니가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연신니가 건넨 인사에 한설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연신니가 이번에는 초악량과 범계위를 향해 말을 건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왕 예까지 오셨으니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지요.”
초악량과 범계위가 난감한 듯 시선을 마주했다.
딱히 서로가 이렇다 할 은원은 없었지만 그래도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정파와 사파 사이에 존재하는 골은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는 일파의 장문인.
이렇게 정중히 요청하는데 껄끄럽다는 이유만으로 거절하기도 곤란했다.
그렇게 적당한 이유를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 때.
“같이 가요.”
단악선이 기대에 찬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한 번쯤은 다 함께 당당하게 산문을 넘어 보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