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35)
신마의선-135화(135/500)
신마의선 (135)
정연신니 역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두고두고 본 파의 자랑거리가 될 듯싶습니다. 구파일방 가운데 두 분을 손님으로 초빙한 문파는 저희가 유일할 테니까요.”
그 말에 범계위가 피식했다.
비록 비공식적이긴 하나 이미 두 사람은 소림사를 방문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컥!”
입을 열던 범계위가 옆구리를 감싸 쥐며 초악량을 노려봤다.
눈치 없는 범계위를 팔꿈치로 응징한 초악량이 태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장문인의 호의에 감사드리오.”
이왕 이렇게 된 것 단악선과 함께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악량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정연신니는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혈수존자와 망산초자의 악명은 그녀 역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 두 사람이 이대로 산을 내려가면 어쩌나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에 흐르던 살기.
이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만약 당가타주와 그를 보필하던 정예가 아미파의 영역에서 살해당한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래서 더욱 단악선이 대단해 보였다.
‘단 몇 마디 말로 저 거마(巨魔)들의 마음을 돌리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기 힘들었을 광경이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단악선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어요. 저는 단악선이라고 해요. 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깍듯한 단악선의 인사에 정연신니가 빙그레 웃더니 자세를 낮춰 눈높이를 맞췄다.
“어서 와라.”
정연신니의 눈빛에 단악선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오늘 처음 보는데도 어째선지 남 같지가 않았다.
그만큼 그녀의 눈빛에는 말로 다 담아내지 못할 따듯함과 반가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때였다.
단악선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등 뒤로 날아와 박히는 시선들이 느껴진 것이다.
고개를 돌린 단악선이 깜짝 놀랐다.
수십 쌍의 눈이 뚫어져라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선의 주인은 바로 아미파 여승들이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정감이 담뿍 담긴 눈빛이었다.
심지어 몇몇 사람은 마치 오랜만에 돌아온 지인을 마주한 것처럼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저 아이가 그분의……?”
“피는 못 속인다더니…….”
저마다 탄성을 흘리는 여승들 중 몇 명은 단악선을 향해 손을 흔들기도 했다.
단악선은 당황했다.
지금껏 많은 문파를 방문했지만 이처럼 스스럼없는 환대는 처음이었다.
초악량과 범계위 역시 마찬가지.
저들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따듯하고 살가운 분위기는 이곳이 구대문파 중 한 곳이 맞나 의심될 정도였다.
범계위가 성큼 걸음을 내디뎌 단악선 앞을 막아섰다.
“우리 단 의원 넘보지 마. 이제 겨우 열세 살이라고.”
철탑 같은 범계위의 덩치가 단악선의 모습을 가리자 여승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범계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초 형.”
“……?”
“쟤들 지금 욕하는 거 맞지?”
뭔 소린가 싶어 의아해하던 초악량이 이어진 범계위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실소하고 말았다.
“저게 말로만 듣던 혜광심어(慧光心語)인가?”
오래전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불문의 절학.
전음처럼 단순한 의사소통을 넘어 구체화된 심상을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는 일종의 정신 감응 무공이 바로 혜광심어였다.
“그럴 리가.”
“그런데 어떻게 눈빛으로 욕을 하지?”
그 말에 정연신니가 빙그레 웃으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빈니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명색이 구파일방의 장문인이 이렇게 선뜻 사과할 줄은 몰랐기에 범계위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 이내 기분이 나빠졌다.
‘잠깐? 사과를 한다는 건 욕한 게 맞다는 거잖아?’
반면 단악선은 가슴 한편이 따듯해졌다.
문득 오래전에 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미파는 너를 문전 박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웃던 환한 미소가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지금도 쏟아지는 저들의 시선이 조금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기쁨이 더욱 컸다. 저들의 호의를 통해 새삼 아버지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 참! 선물을 준비했어요.”
단악선이 시장에서 샀던 유등의 기름을 가리켰다.
“뭘 이런 걸 다…….”
기특하다는 듯 웃던 정연신니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단악선이 품속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 내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이고요.”
종이를 받아 펼쳐 그 안의 내용을 확인한 정연신니가 깜짝 놀랐다.
“이건?”
단악선이 건넨 것은 단약을 제조하는 방법이 상세히 적힌 약방문이었다.
단악선이 웃으며 대답했다.
“가양환(加陽丸)의 제조법이에요.”
단악선이 소매 속에서 밀랍에 쌓인 작은 환단을 꺼내 정연신니에게 건넸다.
“그리고 이건 완성된 가양환이고요.”
“아! 이리 귀한 것을…….”
정연신니가 감동한 눈빛으로 탄성을 흘렸다.
그녀도 과거 몇 번인가 복용한 적이 있었기에 그 효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미는 여승들만의 문파였다.
그래서 다른 문파들보다 폐쇄적인 성향이 짙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로 인해 불가피한 상황을 맞이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양허음동(陽虛陰動)이었다.
딱히 병이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으나 치료법이 전무한 까닭에 매우 어렵고 까다로운 증상이었다.
음양의 조화가 깨져 나타나는 일종의 고질적인 우환.
유독 음기가 성하는 섣달그믐 무렵에 심해지며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미열을 동반한 우울증과 상실감, 심한 육체의 피로가 동반되곤 했다.
거기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오한과 지독한 무기력까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괴로움을 동반하기 때문에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 오래전에 아미파를 방문한 한 사람 덕에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성수신의였다.
그리고 그때 그가 사용했던 약이 가양환이었다.
“양기를 보충하는 효과가 있으니, 음양의 균형이 깨지면 바로 복용하세요. 만드는 방법도 그리 어렵지 않으니 재료만 갖춰지면 쉽게 조제할 수 있으실 거예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본 파가 네게 큰 빚을 지는구나.”
단악선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심부름을 했을 뿐인걸요.”
“……?”
“가양환과 조제법을 남기신 건 아버지세요. 원래부터 아미파에 전해 주려고 만드신 거였고요.”
나직이 불호를 외는 정연신니의 얼굴 위로 감출 수 없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신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예불을 올릴 때마다 그를 위해 기도해 온 그녀였다.
한데 오히려 그는 죽어서도 아미에 은혜를 베풀고 있었다.
그 마음의 빚은 자연스럽게 단악선에게 향했다.
“날씨가 차다. 이만 함께 오르자꾸나.”
정연신니가 단악선의 손을 살포시 잡고 계단으로 이끌었다.
그녀의 평소 모습을 알던 이들이 보면 깜짝 놀랄 만큼 온화하고 친절한 태도였다.
범계위가 불쑥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그런데 그걸 왜 이제야 전해 주는 거야?”
범계위의 질문에 단악선이 일순 당황했다. 그리곤 이내 곤혹스런 얼굴로 대답을 미뤘다.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곤란해하는 단악선의 모습에 범계위는 애써 호기심을 억눌렀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단악선은 이윽고 금정사 안에 들어섰다.
“우와!”
금정사 가장 높은 곳.
네 마리 코끼리 위에 앉아 있는 황금빛 좌불을 눈에 담은 단악선이 탄성을 터트렸다.
목상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현보살.
그 웅장한 자태에 압도된 것이다.
잠시 후 정연신니의 안내를 받아 단악선 일행은 현경전에 도착했다.
커다란 다탁에 둘러앉자 아미파의 여승들이 이내 한 잔의 차를 가져와 각자 앞에 내려놓았다.
다기 자체는 무늬도 없이 투박하고 검소해 보였지만 그 안에 담긴 차만큼은 무척이나 향긋하고 따듯했다.
“차 맛이 무척 독특하네요.”
단악선이 감탄하자 정연신니가 빙그레 웃었다.
“이곳의 특산물인 아미산 차다.”
단악선이 가만히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절반은 가라앉고 절반은 떠 있는 찻잎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발효차가 아닌, 수분을 날리기 위해 덖은 차였기에 차 색깔이 투명한 색에 가까웠다.
단악선이 다시 차 맛을 음미했다.
향기는 길게 지속되고 감미로운 여운이 남았다.
전아(全芽), 즉 완전히 잎으로 자라지 않은 어린싹으로만 만들어 깔끔하고 상쾌한 녹차 본연의 맛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건 좀 주의가 필요하겠어요.”
단악선이 눈을 들어 정연신니를 바라봤다.
“차 자체는 매우 훌륭하지만 발효차가 아닌 탓에 유독 음의 기운이 두드러져요.”
의아해하는 정연신니를 향해 단악선이 설명을 이어 갔다.
“고기와 술을 즐기거나 열이 많은 이들에게는 더할 것 없이 훌륭한 약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채식과 검소한 생활을 하는 여인들에게는 자칫 독이 될 수도 있어요.”
“저런!”
정연신니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단악선이 미소를 건넸다.
“하지만 방금 전에 건넸던 가양환이 있다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예요.”
비로소 정연신니가 안도한 듯 굳은 얼굴을 풀었다.
그러다 뒤늦게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짧게 경호성을 터트렸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 주겠느냐? 네게 보여 줄 것이 있다.”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연신니가 곧바로 자리를 떴다.
그녀가 사라지고 일행만 남게 되자 범계위가 내내 눌러 왔던 궁금증을 드러냈다.
“단 의원, 아까 그거 왜 그런 거야? 그 가양환인가 뭔가 하는 약 말이야. 이제야 주는 이유가 있어?”
단악선이 쓰게 웃었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약 때문에 부모님께서 부부 싸움을 하셨거든요.”
“부부 싸움?”
단악선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인간이! 다른 여자 주려고 약을 만들어?
―스님이잖아!
―비구니는 여자 아니야?
―치료 약이라고!
―어디 주기만 해! 난 소림사에 정력제를 뿌려 버릴 테니까!
초악량이 실소했다.
“결국 마의께서 이겼나 보군.”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한참 전에 만들어진 가양환이 이제야 아미파에 전달될 리 없지 않느냐?”
초악량의 추리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결국 어머니의 승리였어요.”
“하긴. 다른 건 몰라도 한번 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으니까.”
그 말에 단악선이 슬프게 웃었다.
아버지와 함께 신마곡을 떠나시던 그날.
―돌아오면 이렇게 꼬옥 다시 안아 주마.
숨 막힐 정도로 세게 끌어안았던 어머니의 품.
그 마지막 온기를 단악선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다.
단악선의 얼굴이 갑자기 흐려지자 초악량은 당황했다.
아무리 이유를 생각해도 무엇 때문인지 짚이는 바가 없었다.
거기에 지그시 노려보는 한설화의 눈치가 더해지니 초악량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초악량이 범계위를 향해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한데 범계위는 진지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범계위가 단악선을 향해 물었다.
“단 의원, 그 약 효과는 확인해 봤어?”
“가양환이요? 물론이죠.”
범계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그거 말고.”
“……?”
“마의께서 만들었다는 그 정력제 말이야.”
“아! 독계산(禿鷄散)이요?”
순간 범계위가 화들짝 놀랐다.
“왜 약 이름에 불길하게 대머리라는 글자가 들어가? 먹으면 머리털 빠지고 막 그래?”
“하하. 그럴 리가요.”
단악선이 웃음을 터트렸다.
기겁하는 범계위의 모습에 우울했던 기분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다.
“우연히 그 약을 먹은 수탉이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암탉을 쫓아다녔다고 해요.”
약 기운 때문에 흥분을 이기지 못한 수탉이 교미할 때마다 암탉의 벼슬을 물어뜯었고, 그로 인해 결국 암탉의 머리털은 남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독계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범계위의 눈빛이 반짝였다.
“혹시 그 약도 만들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