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36)
신마의선-136화(136/500)
신마의선 (136)
범계위의 눈빛 위로 설명하기 힘든 열기가 일렁였다.
그런데 이는 범계위만 그런 게 아니었다.
관심 없다는 듯 차만 홀짝이던 초악량의 의자도 어느새 소리 없이 단악선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이를 본 한설화가 아미를 찡그렸다.
“초 오라버니.”
한설화의 음성에 냉기가 감돌았다.
“얼간이랑 같이 다니더니 덩달아 바보가 된 거야?”
초악량이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진지한 눈빛으로 한설화의 시선을 마주했다.
“한 누이. 이건 비난할 일도, 비난받을 일도 아니야.”
한설화는 내심 기가 막혔다.
뜻밖에도 초악량의 태도가 너무 당당했기 때문이다.
범계위도 물러서지 않고 거들었다.
“그럼! 이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데. 여자는 몰라.”
그런데 더 황당한 건 단악선도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 의견에 동의한다는 점이었다.
“맞아요. 아빠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응? 신의께서?”
“무슨 말을 하셨느냐?”
범계위와 초악량.
두 사람은 점차 싸늘해지는 한설화의 눈빛은 안중에도 없었다.
“범 아저씨와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그리고 엄마에게 독계산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물어보셨죠.”
“그래서? 결과는?”
단악선이 대답을 하려 할 때였다.
드륵.
방문이 열리며 정연신니가 들어섰다.
막 말을 하려던 단악선은 입을 다물었고 덕분에 범계위와 초악량의 입에서 불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영문을 모르는 정연시니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 들고 있던 물건을 탁자 위에 올렸다.
“이건 뭔가요?”
단악선의 물음에 정연신니는 대답 대신 보자기에 쌓인 물건을 단악선 쪽으로 밀었다.
단악선이 의아한 얼굴로 보자기를 풀었다.
그러자 그 안에 들어 있던 한 권의 책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목도, 저자도 적혀 있지 않은 두꺼운 책이었다.
단악선이 고개를 갸웃하며 책자를 펼쳤다.
“……!”
단악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책자 안의 글씨가 너무나 눈에 익었다.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고, 또 읽었던 의서.
그 안의 글씨체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알아보겠느냐?”
정연신니의 물음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필체를 알아본 단악선이 당황한 눈으로 정연신니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왜……?”
정연신니가 빙그레 웃으며 단악선의 맞은편에 앉았다.
“본 파는 원래부터 금남의 구역이었다. 지금처럼 외부의 손님을 받는 경우가 몹시 드물었지. 특히 손님이 남자라면 말할 것도 없었고.”
하나 그 금기는 한 사람에 의해 깨졌다.
성수신의.
그가 최초로 이곳 금역에 발을 들인 이후 오랜 세월 이어 온 아미의 전통을 그녀들 스스로 내려 놓은 것이다.
그 어떤 전통도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그의 진심은 돌부처도 돌아앉게 만들 만큼 뜨거웠지.”
아미의 산문을 넘는 일에 목숨을 걸 만큼 성수신의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런 그의 의술에 힘입어 죽음만을 기다리던 아미의 제자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당시 작성했던 기록들이다. 그가 우리를 배려해 이 기록을 밖으로 가져가지 않은 것이지.”
“아!”
단악선은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미는 여승들의 문파.
아무리 의술을 위해 기록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민망하고 부끄럽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정연신니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제 돌려주마.”
“네? 그래도 되나요?”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보다 의원인 네게 훨씬 유용하게 쓰이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게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자 했던 그의 유지를 존중하는 방법 아니겠느냐?”
“…….”
“아미는 이미 그에게 큰 빚을 졌다. 이렇게라도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불제자로서 부끄러울 뿐이지.”
그 말에 단악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악선은 고개를 숙여 책자의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내용 자체는 단순한 임상 기록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책을 통해 아버지가 말을 건네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악선의 눈빛이 아련하게 물들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단악선의 모습에 장내는 일순 숙연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들 중 어느 누구 하나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복잡하고 묘한 분위기를 흘리는 단악선을 그저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뒤늦게 어색한 장내의 분위기를 깨달은 단악선이 책자를 덮었다. 그리고 다시 보자기에 싸서 조심스럽게 품에 챙겼다.
“정말 감사드려요.”
단악선의 인사에 정연신니는 따듯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앗! 잠깐만!”
“밀지 마세요.”
“순서를 지켜요!”
밖에서 들려오는 다수의 인기척에 단악선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자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던 정연신니의 얼굴이 굳어진 것도 동시였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더니 문손잡이를 잡고 벌컥 열어젖혔다.
그러자 입구에 모여 있던 여승들이 안쪽으로 우르르 넘어졌다.
“중이라는 것들이 체통머리 없이!”
정연신니의 일갈에 여승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하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또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잖습니까.”
“맞습니다. 적어도 감사의 말은 전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전각 밖에서 기웃거리던 여승들은 한눈에 봐도 제법 관록이 느껴지는 중년의 연배였다.
그런데 단악선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소녀처럼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저들의 눈빛에 담긴 호의와 관심.
자신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는 여승들의 모습을 통해 단악선은 다시 한 번 아버지와 아미파의 인연이 상당히 깊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전 괜찮아요.”
단악선이 웃으며 여승들에게 다가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단악선이라고 해요.”
단악선이 인사를 건네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귀여워! 그런데 늠름해!”
“그분도 어디 가서 빠지는 외모는 아니었지.”
“어쩜 이렇게 그분을 빼닮았지?”
신의와의 추억이 있는 사람들인 만큼 단악선을 유달리 예뻐하는 그녀들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초악량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속세에서 간혹 모습을 보일 때의 아미파 비구니는 늘 근엄하고 진지한 모습만을 보여 왔었다.
그런 그녀들을 단번에 무장 해제 시키다니…….
그 어떤 신공절학으로도 불가능한 일을 너무나 수월하게 해낸 단악선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두 시진 후.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이 되어서야 단악선은 현경전을 나설 수 있었다.
“휴.”
단악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미파 여승들의 환대는 무척 고마웠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왠지 모르게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며칠 머물다 가지.”
아쉬워하는 여승들을 향해 단악선이 고개를 숙였다.
“훗날 다시 찾아뵐게요.”
당장은 초악량과 범계위가 있어 머물기가 곤란했다.
게다가 연판장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방문해야 할 곳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런 단악선을 향해 아미파의 여승들이 이것저것 챙겨 주기 시작했다.
주전부리를 비롯해 여비로 쓸 용돈까지.
순식간에 온갖 선물이 산처럼 쌓였다.
졸지에 짐꾼이 된 초악량과 범계위가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부탁할 게 있다면 언제든지 우리를 찾아오려무나. 아미의 문은 네게 늘 활짝 열려 있을 것이다.”
정연신니의 말에 단악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짧은 방문이었지만 이곳에 머물며 오랜만에 부모님과의 추억에 잠길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아미파를 나서는 도중.
단악선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저 멀리 절벽 끝자락에 위치한 전각.
그 안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이립을 발견한 것이다.
이립과 마주한 사람은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파르라니 깎은 머리와 회색 승복을 걸친 것으로 보아 아미파의 여승인 듯싶었다.
“저분이 정인사태신가 보군요.”
단악선은 잠시 그 자리에서 서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그러느냐?”
한설화의 물음에 단악선이 씁쓸하게 웃었다.
“엄마 아빠도 저렇게 힘들었을까 싶어서요.”
초악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두 사람도 인연을 맺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게야. 알려지지 않아서 그랬지, 두 사람의 혼인이 알려졌다면 저들 못지않게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겠지.”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련한 눈빛으로 이립과 정인사태를 바라봤다.
“참 안타깝네요.”
“뭐가 말이냐?”
초악량의 반문에 단악선이 가만히 한숨을 흘렸다.
“서로 끔찍이 사랑하신 건 두 분도 마찬가지였거든요. 비록 매일같이 싸우긴 하셨지만요.”
초악량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래도 결실을 맺어 단악선을 남겼다.
반면 이립과 정인사태 사이에는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세월이 존재했다.
아무리 서로를 그리워했다 한들 지금은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 버린 것이다.
“저들만의 사정을 누가 알겠느냐?”
한설화의 말에 단악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남들이 섣불리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이립과 정인사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단악선은 최대한 조용히 아미파를 나섰다.
그런데 산문을 나서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단악선은 말이 없었다.
심유한 눈빛을 흘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단악선은 가만히 손을 들어 품속에 들어 있는 의서에 가져다 대었다.
혹시라도 그 안에 남아 있을 아버지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였다.
물론 그게 가능할 리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초악량과 범계위가 한순간 시선을 마주했다.
―부모님이 많이 그리운가 보군.
―왜 아니겠소? 지금껏 참은 게 대단한 거지.
점잖고 의젓해서 가끔 잊어버리긴 하지만 단악선은 아직 어린애였다.
부모의 품에서 한창 어리광 부려도 모자랄 시기.
그런데도 자신들을 위해 강호를 떠돌고 있었다.
그런 단악선이 누구보다 안타까운 그들이었다.
그렇게 아미산을 내려오던 도중 산자락 밑에서 어슬렁거리던 홍적문이 자연스럽게 일행에 합류했다.
눈빛으로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멀리서 달려오는 이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립이 도착하자 홍적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얼굴이 왜 그렇게 엉망이오? 혹시 울었소?”
평소라면 발끈했을 이립이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눈물이라도 쏟았다면 나았을 것을…….”
이립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이나 나나, 너무 담담해서 서로에게 미안해질 지경이더군.”
말을 그렇게 했지만 정작 이립의 눈빛엔 감출 수 없는 아픔이 진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문득 단악선과 시선이 마주친 이립이 불쑥 입을 열었다.
“네가 옳다.”
“네?”
“너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져 세상과 맞서고 있지 않느냐?”
이립이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싸울 용기가 없었다. 한데 너는 그 용기를 가졌구나.”
이립이 단악선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용기를 내가 응원하마.”
“고마워요.”
단악선은 더 이상 정인사태와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 어떤 말도 그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들은 객잔에 돌아오는 내내 말이 없었다.
그런데 객잔에 도착하자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객실의 탁자 위에 한 장의 서신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급한 일이 있어 한동안 함께하지 못할 것 같구나. 나머지 비무는 돌아와서 마치자꾸나.
서신을 남긴 사람은 가두달이었다.
그리고 서신 옆에는 합죽선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부채를 펼쳐 본 초악량이 낮게 탄성을 흘렸다.
그 위에 그려진 그림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엔 산수화 같았지만 구름을 타고 노니는 신선의 모습도 담겨 있어, 길운을 축원하는 길상화(吉祥畵)처럼 보이기도 하는 묘한 그림이었다.
“아!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단악선이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반면 범계위는 뚫어져라 단악선을 응시했다.
‘어떻게 물어봐야 하지?’
어쩌다 보니 대답을 듣지 못하고 넘어갔지만 아미산을 내려오는 내내 범계위를 사로잡은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독계산의 제조 가능 여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