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42)
신마의선-142화(142/500)
신마의선 (142)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이를테면…….”
적당한 게 떠오른 단악선이 빙긋 웃었다.
“혈도처럼요.”
여전히 영문을 몰라 하는 굉성자의 모습에 단악선이 설명을 이어 갔다.
“균형의 중심이 되는 가상의 지점을 실재하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구체화하는 거예요. 몸속의 혈도를 정확히 찾아 침을 놓는 것처럼요.”
굉성자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비무의 승패를 가를 결정적인 순간.
작고 앙증맞은 손 하나가 좁은 공간을 교묘하게 비집고 파고들던 광경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다.
즉흥적으로 떠올린 발상치곤 신묘한 무리가 담겨 있었다.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더니…….’
이것이 소위 천재라 불리는 재능의 영역인가 싶었다.
반면 멀리서 비무를 지켜보던 초악량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정작 이를 전수한 가두달은 알 리 없겠지만 그의 투도술이 뜻밖에도 이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차례 한숨을 내쉰 굉성자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리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무언가를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잠시.
“가르쳐다오.”
“네?”
깜짝 놀라는 단악선을 향해 굉성자가 말했다.
“초식을 다 알려 달라는 게 아니다. 그 공간을 훔친다는 게 영 감이 오질 않아서 말이야. 어떤 순간에 어떤 식으로 운용하는 건지 알고 싶다.”
단악선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더 약한데 어떻게 저보다 뛰어난 고수를 가르칠 수 있겠어요?”
“왜 안 돼?”
굉성자가 당당한 눈빛으로 단악선을 응시했다.
“비무의 목적이 뭐야? 서로 겨루는 과정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는 거잖아?”
“그렇죠?”
“그래서 나도 네게 배우고 싶다. 이번 비무를 통해 너만 배우는 건 치사하잖아.”
그 말을 들은 곤륜 장문인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저 망할 제자 놈이……. 곤륜의 자존심은 무슨…….”
굉성자는 등 뒤로 날아와 박히는 따가운 시선을 애써 모른 척 무시한 채 단악선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인 것도 그때였다.
“좋아요. 저도 치사한 건 싫어요.”
굉성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다! 그럼 다시 보여다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굉성자가 단악선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방금 전 승기를 잡았을 때와 같은 동작이었다.
단악선 역시 같은 방법으로 응수했다.
쿵.
사납게 연무장 위로 나동그라진 굉성자가 탄성을 터트렸다.
처음보다 훨씬 능숙하고 매끄러운 단악선의 반격에 진심으로 감탄한 것이다.
“이야! 이거 절묘한데? 그런데 방금 일부러 공격을 유도한 거지?”
“네. 일부러 공격을 집중시킨 다음 슬쩍 손을 밀어 넣었어요. 공격의 중심이 되는 오금. 그 뒤쪽의 공간을 훔친다는 느낌으로요.”
“이렇게?”
굉성자의 흉내에 단악선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단지 형태일 뿐이에요. 정확한 중심의 위치는 그때마다 달라지니 일단은 그것을 정확히 머릿속에서 구현하는 게 우선이죠.”
굉성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단악선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감이 안 잡히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악선이 언급한 내용들은 지금까지 그에게 익숙했던 무학의 이치와 궤를 달리하는 심상(心像)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해 보자.”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굉성자였다.
내공이나 초식, 그리고 경험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건에 우위를 점하고 있는 굉성자였다.
그래서 단악선은 한순간에 수세에 몰렸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거짓말처럼 요란하게 나가떨어진 사람은 굉성자였다.
“다시!”
굉성자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단악선에게 달려들었다.
쿠웅.
“다시!”
털썩!
“다시!”
그렇게 몇 번이고 달려들고 넘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굉성자의 모습에 단악선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괜찮으세요?”
굉성자가 씨익 웃었다.
“무공을 익히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
“하나는 순간의 깨달음을 통해 얻은 심득(心得).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체득(體得)이다.”
“체득이요?”
고개를 끄덕인 굉성자가 당당하게 말했다.
“말 그대로 깨달을 때까지 몸에 새겨 넣는 거지.”
“아!”
“심득이든 체득이든 순서는 뭐가 중요하겠어? 결국 얻는다는 게 중요하지. 그게 내가 스스로 한계를 뛰어넘는 방식이다.”
단악선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사실 그것 때문에 괜찮으시냐고 물어본 게 아니에요.”
“응?”
단악선이 주위를 둘러보자 굉성자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연무장 근처를 훑었다.
“다들 제가 이겼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연무장을 에워싼 곤륜 문하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당혹감이 가득했다.
그래도 명색이 장문인의 진전을 이은 이대 제자인데 어린아이의 손에 연거푸 나가떨어지다니.
그러나 굉성자는 아무렇지 않게 씨익 웃었다.
“뭐 어떠냐?”
사실 제대로 싸우고자 했다면 단악선은 굉성자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다만 굉성자가 단악선이 사용한 무리의 요체를 배우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몸을 던져 준 셈이었다.
“몇 번을 쓰러지고 몇 번을 져도 상관없다. 평생 단 한 번만 이기면 되니까.”
“단 한 번이요?”
궁금한 마음에 단악선이 다시 물었다.
“그게 언제인데요?”
굉성자가 자신만만한 눈빛을 흘렸다.
“천하제일인과의 싸움. 거기서만 이기면 돼. 나머지는 다 과정일 뿐이지.”
무언가를 깨달은 단악선이 내심 탄복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간다!”
굉성자가 현란한 신법으로 거리를 좁혀 왔다.
단악선 역시 지지 않고 마주 달려가며 금나수로 맞섰다.
어지럽게 뒤얽히는 손그림자 사이로 짤막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앗!”
이번에는 단악선이었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단악선이 눈앞에 멈춰 서 있는 굉성자의 주먹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되는 거냐?”
굉성자의 물음에 단악선이 탄성을 터트렸다.
“맞아요. 정말 대단해요.”
고작 몇 번의 대련만으로 상대의 균형을 훔치는 요체를 터득하다니.
굉성자가 밉지 않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단악선이 일어서자 굉성자가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오늘 고마웠다. 덕분에 하나 배웠어.”
“내일도 다시 부탁해요!”
“얼마든지.”
웃으며 연무장을 내려오던 굉성자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근엄한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사부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거기 서라.”
광진도장의 말에 굉성자가 움찔하더니 발이 더욱 빨라졌다.
“서라니까?”
굉성자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진 것도 동시였다.
운룡대팔식의 다섯 번째 초식.
운룡무궁(雲龍無窮)이었다.
이른 아침.
사위에 내려앉은 침묵은 무거웠다.
향을 사르는 광진도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은 제자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진혼제를 주관하는 내내 그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제단 위에 올려진 위패에 적힌 도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세 대의 향을 연이어 살랐다.
화르륵.
뒤이어 한 움큼의 지전이 허공에 나부끼며 재가 되어 흩어졌다.
이를 지켜보는 곤륜 문하들의 눈에 진한 아픔이 떠올랐다.
아무리 정성 들여 제를 지내고, 억만금의 지전을 사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죽은 제자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위령문을 낭독하는 광진도장의 음성이 곤륜 문하들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팠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단악선도 덩달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날 오후.
단악선은 산책이나 할 겸 방을 나섰다.
진혼제의 여파 때문인지 곤륜 전체에 무거운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간혹 오가다 마주치는 곤륜 도사들은 가벼운 눈인사만 건넬 뿐, 지극히 말을 아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단악선은 독특한 지형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뜻 보기엔 하나의 절벽으로 보였지만 사실 절벽 두 개가 절묘하게 겹쳐진 곳이었다.
천신이 도끼로 내려친 것처럼 길게 쪼개진 절벽과 절벽 사이에는 의외로 넓은 공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한적한 절벽 틈새.
거기서 뜻밖의 인물과 조우했다.
굉성자였다.
그는 절벽과 절벽 사이를 오가며 쉬지 않고 뛰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공이 아닌 근력만을 사용하는 듯했다.
절벽 사이에서는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온몸이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단악선을 발견한 굉성자가 능숙하게 절벽을 타고 내려왔다.
“오늘도 수련하세요?”
단악선의 말에 굉성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을 안 하면 미안해서.”
“누구에게요?”
“마교 놈들에게 죽은 우리 가족.”
“……!”
“유일하게 살아남은 내가 게으름을 부리면 면목이 없거든.”
복수는 그의 업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한시도 수련을 게을리할 수 없는 이유였다.
“죄송해요. 그런 것도 모르고…….”
단악선의 사과에 굉성자가 피식 웃었다.
“그런 표정 할 것 없다. 여기 있는 아이들 절반은 비슷한 사연을 지니고 있으니까.”
곤륜은 그런 곳이다.
중원은 모르겠지만 지금도 그들은 마교와 끝없는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기련산 너머에 웅크리고 있다곤 하나 간혹 중원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산을 내려오는 마귀들이 있었다.
그러고 이를 철저히 차단하는 게 그들의 소명이었다.
“내일부터 나랑 같이 수련하자.”
그렇게 대뜸 제안한 굉성자가 단악선을 향해 웃었다.
“넌 근력이 부족해.”
“근력이요?”
“그래. 제아무리 훌륭한 내공을 지니고 있다 해도 결국 그것을 온전히 담아내는 그릇은 육체야. 체력이 받쳐 주지 않는 내공은 이가 나간 검과 다를 바 없어.”
굉성자가 말을 이어 갔다.
“강해져야지. 아무래도 마교 놈들이 널 노리는 것 같으니까.”
단악선이 깜짝 놀랐다.
초악량이나 한설화조차 아직 저들의 정체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흉수들이 마교 쪽에 투신한 사람들인 걸까요?”
“그거야 모르지. 하나 이것만큼은 확실해.”
“……?”
“이 근처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죽음에는 놈들이 얽혀 있다는 거야.”
단악선이 쓰게 웃었다.
마교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깊은지 새삼 느껴지는 말이었다.
“남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니까.”
나름 진심이 느껴지는 굉성자의 충고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강해지고 싶어요.”
굉성자가 씨익 웃었다.
“그럼 내일부터 함께 수련하는 걸로?”
“네. 열심히 할게요.”
며칠 후, 이른 새벽.
“악선아! 수련 시간이다!”
고요한 적막을 깨는 굉성자의 목소리에 단악선이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섰다.
“형, 너무 이른 거 아니야?”
단악선 일행이 곤륜파에 온 지도 어느덧 보름이 흘렀다.
매일같이 함께 수련하는 동안 단악선과 굉성자는 어느새 의형제처럼 가까워졌다.
“근력을 키우려면 부지런해야 해. 마른 수건에서 물방울을 쥐어짜 내듯이 근육을 한계까지 혹사해야 한다고. 그때부터 진정한 수련이 시작되는 거야. 적어도 곤륜에 머무는 동안 몸은 제대로 만들어 놔야지.”
한숨을 내쉬는 단악선을 굉성자가 채근했다.
“자, 준비됐지? 뛰자!”
단악선이 쓰게 웃으며 굉성자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멀어지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바로 초악량을 위시한 범계위와 한설화였다.
“어제 장문인이 그러더군. 겨울이 지나고 가는 건 어떻겠냐고.”
“그럼 석 달이 넘게 있는 셈인데. 너무 길지 않수?”
“사실 안 될 것도 없지 않느냐? 저길 봐라.”
초악량이 눈짓으로 연무장 쪽을 가리켰다.
굉성자와 단악선 쪽으로 합류하는 어린 곤륜 문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나 싶더니, 어느새 선두에 선 굉성자를 따라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즐거워 보이네.”
한설화의 말에 초악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 의원에게 저건 수련이자 좋은 놀이니까.”
범계위도 이내 수긍했다.
“단 의원만 좋다면야, 뭐.”
멀어지는 단악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범계위가 불쑥 입을 열었다.
“우리가 만들려 하는 그곳에서도 단 의원이 저렇게 행복했으면 좋겠수.”
“그러기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지.”
초악량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래들과 달리며 환하게 웃는 단악선.
그 미소를 계속 지켜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