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45)
신마의선-145화(145/500)
신마의선 (145)
살을 엘 듯한 혹한이 잦아들 무렵.
해는 점차 길어졌고, 무릎까지 쌓였던 눈도 대부분 녹아 숨어 있던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에 돋아나기 시작한 새로운 이끼는 순백의 겨울과는 완연히 다른 색으로 곤륜산을 물들였다.
봄이 온 것이다.
삼성요의 입구에 선 단악선이 자신들을 배웅하기 위해 나선 곤륜파 사람들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곤륜파의 장문인인 광진도장을 비롯해 장로들과 단악선 또래의 어린 도사들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무사히 여행을 마치길 축원해 주었다.
그중 몇몇 어린아이들은 콧물을 훌쩍이며 단악선을 배웅했다.
함께 어울리는 동안 적지 않게 정이 든 것이다.
“또 올 거야. 그러니까 울지 마.”
눈물을 감추며 애써 고개를 끄덕이는 또래의 아이들을 뒤로한 채 단악선이 굉성자를 향해 미소를 건넸다.
“또 봐, 형.”
“당연히 봐야지. 네가 안 오면 내가 찾아간다.”
“무위가 금지로 선포되면 정파 사람들은 못 오는데?”
“아프면 갈 수 있다며?”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식으로 만나면 안 되지.”
단악선이 웃으며 굉성자의 손을 잡았다.
“미리 연락 주면 내가 밖으로 나올게. 그러니 행여라도 아프지 마.”
굉성자가 웃으며 마주 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그래. 어쨌든 꼭 다시 보자.”
단악선이 굉성자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사이 초악량도 광진도장과 얼굴을 마주했다.
“그간 신세 졌소.”
초악량의 말에 광진도장이 손을 내저었다.
“신세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사해는 동도라 하지 않았습니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 분 영웅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또 봅시다.”
고개를 끄덕인 광진도장이 범계위와 한설화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디 먼 길 살펴 가시길.”
이런 자리가 영 어색한 듯 범계위가 쭈뼛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 차가운 한설화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렇게 곤륜과 작별을 고한 단악선 일행은 다음 행선지를 향해 새로운 여정에 올랐다.
곤륜산을 내려오는 길.
“이제 구대문파는 하나가 남았구나.”
초악량의 말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파일방 중 유일하게 남은 곳.
바로 공동파였다.
“그런데 감숙성이면 신마곡이랑 가장 가까운데 제일 늦게 가는 이유가 있느냐?”
초악량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처음엔 달리 생각이 있겠거니 여겨 왔지만 이쯤 되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처음에 공동파를 방문했다면 연판장을 얻지 못했을 거예요.”
초악량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건 무슨 뜻이냐?”
“어머니와 악연이 있거든요.”
“악연? 공동파가 말이냐?”
초악량의 반문에 단악선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먼저 다른 여덟 문파의 연판장이 필요했어요. 그래야 그들도 허락할 것 같아서요.”
일종의 압박인 셈이었다.
구파일방 모두가 동의한 사안에 대해 그들만 반대하는 것도 모양이 이상해지기 때문이다.
나란히 걸음을 옮기며 단악선이 말했다.
“엄마가 마의로 불리게 된 것도, 그리고 사파인들만 치료하게 된 계기도 공동파 때문이에요.”
“마의께서는 본래 감숙성 출신이셨나?”
“네.”
그것도 감숙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하지만 의술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중원 곳곳을 바람처럼 떠돌았다.
의원을 필요로 하는 환자는 지역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은거를 위해 다시 고향을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사람들에 대한 염증과 환멸.
거기에 모종의 이유가 더해져 존재를 감춰야만 했다.
적당한 은거지를 물색하던 도중 앞마당처럼 드나들었던 신마곡이 모든 조건에 부합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다.
단악선이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날 엄마에게 환자들이 찾아왔어요.”
그것도 하나같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중상자들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그분들을 도와줄 수 없었어요. 이미 다른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거든요.”
단악선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엄마는 먼저 받은 환자가 있다고 그들에게 밝혔어요. 더구나 먼저 받은 환자 역시 상태가 매우 심각해 치료가 늦어지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였죠.”
먼저 받은 환자의 치료를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중에 온 환자를 받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먼저 온 환자에 비하면 시각을 다툴 만큼 위급한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다리겠다며 고집을 부렸어요. 꼭 엄마에게 치료를 받아야 하겠다면서요.”
문제는 시간이 지나며 부상자들의 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뒤늦게 환자들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그들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부랴부랴 다른 의원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결국 악화된 환자들 중 세 명이 치료 도중 사망하고 말았다.
그중에는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되어 있던 후기지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분노한 그들은 의가에 난입해 엄마가 치료한 환자를 죽여 버렸어요.”
힘들게 겨우 살려 낸 환자를, 그것도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목도한 그녀는 몹시 분노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가 앞서 치료하던 환자는 사파의 유명한 고수였다.
그리고 그의 부상은 나중에 왔던 환자들과의 생사결로 인한 것이었다.
초악량은 비로소 어찌 된 상황인지 연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설마 나중에 온 환자들이?”
단악선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동파 사람들이었어요.”
그 일로 인해 그녀는 두 번 다시 공동파 인물들을 치료하지 않겠다 맹세했다.
“훗날 공동파와 교분이 있었던 아빠가 중재를 하긴 했지만 앙금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요.”
고집으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그나마 유일하게 한 사람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는 편이었다.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자신과 경쟁할 수 있는 아버지의 실력은 내심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도 결국 엄마를 설득하지 못했어요.”
그렇게 공동파와 척을 지게 되자 그녀에 대한 온갖 나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공동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구파일방 역시 그를 배척했다.
“화가 난 엄마는 처음에는 공동파로 한정했지만 결국 정파 전체를 상대로 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어요.”
그러자 그때부터 그 소문을 들은 사파인들이 그녀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엄마가 마의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죠.”
때문에 공동파는 때아닌 홍역을 치러야 했다.
자신의 영역에서 활개 치는 사파인을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
그런데 다 죽어 가던 사파인이 어느 날 멀쩡해진 상태로 복수를 감행하는 일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그런 비슷한 사례가 반복되며 피해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공동파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팠겠군.”
“네. 그것 때문에 한동안 감숙 일대에서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엄마에 대한 공동파의 원한이 아주 깊을 거예요.”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초악량과 달리 단악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는 틀리지 않았어요.”
범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의께서는 틀리지 않았다. 모두 공동파 그놈들이 자초한 것이지.”
사달의 시작도, 그렇게까지 문제를 키운 것도 결국 놈들이었다.
범계위가 서슬 퍼런 눈빛을 흘렸다.
“예나 지금이나 뻔뻔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야.”
눈앞에 공동파의 도사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처죽일 것만 같은 살기를 뿜어내는 그였다.
반면 초악량은 단악선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너 역시 공동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것 같구나.”
단악선은 부정하지 않았다.
“네. 전 그들이 싫어요. 의원이 막 치료한 사람을 죽이다니……. 그것도 그 사람을 살린 의원 앞에서.”
어느새 눈빛도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어요?”
단악선답지 않은 적의였다.
하나 그 심정을 충분히 공감하기에 세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예 그들의 연판장은 받지 않는 게 어떠냐?”
초악량의 말에 단악선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래도 받을래요. 그래야 적어도 금지 안에서 저들과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요.”
자신들의 체면이 있기에 함부로 그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게 혹시 또 모르는 것이다.
자신들은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들이 무위를 들락거릴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았다.
그들에게 유일하게 금지를 드나들 권리 따윈 주고 싶지 않았다.
“싫어도 해야죠. 모두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잖아요.”
어린 나이에 그와 같은 고민을 하는 단악선에게 세 사람은 안타까운 눈빛을 던졌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단악선 일행은 감숙성에 들어섰다.
예정보다 일정이 훨씬 앞당겨진 것이다.
곤륜에서의 수련이 꽤나 도움이 되었던지 이제는 단악선도 제법 오랜 시간 경공을 펼치는 게 가능해졌다.
불과 일 년 전에 비해 놀라우리만치 비약적으로 발전한 단악선이 세 사람은 그저 대견스럽기만 했다.
공동파가 있는 공동산은 성도인 난주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들은 우선 공동파에 방문하기 전에 난주에 들르기로 결정했다.
오랜 여행으로 인해 몰골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온 까닭에 풍찬노숙은 일상이었다.
그래서 의복도 남루해지고 외관 역시 꾀죄죄했다.
그 와중에도 한설화만큼은 여전히 깔끔했다.
단악선도 의복은 더러웠지만 얼굴만큼은 깨끗했다.
한설화의 무공 덕분에 물이 없는 곳에서도 세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설화는 주변의 공기를 얼려 응결된 물방울로 세안을 했고, 단악선의 얼굴도 때때로 씻겨 주었다.
그러나 초악량과 범계위는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없었다.
그 두 사람이 거지같은 몰골로 난주에 들어서자 행인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양쪽으로 물러섰다.
썰물처럼 갈라진 인파 사이로 생겨난 길을 보며 범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개방 애들이 씻고 다니지 않는지 알겠군. 바로 이 맛에 하는 거였어.”
한심하다는 눈빛을 던지던 초악량이 이내 자신의 모습도 별단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난주에 들어선 것만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신마곡과 지척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뜻밖에도 반가운 인물과 조우할 수 있었다.
“곡주님!”
환하게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내.
풍진성이었다.
강호 곳곳에 퍼져 있는 개방의 눈과 귀를 통해 단악선 일행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며칠 전부터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
단악선도 풍진선을 향해 마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서로의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지자 단악선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가운 사람은 풍진성뿐만이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풍진성 뒤에 서 있던 사무심이 단악선과 다른 사람들을 향해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보고 싶었어요, 총관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단악선이 건넨 인사에 사무심이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잘 지냈습니다. 이 모두가 곡주님의 염려 덕분인가 싶습니다.”
“능 아저씨는요? 함께 오지 않으셨나요?”
단악선이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늘 실과 바늘처럼 함께 움직이던 능소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능 아우는 신마곡과 무위를 관리하느라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 곧 만날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풍진성이 일행을 잡아끌었다.
“자, 자. 여기 길 한가운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일단 자리부터 옮기지요.”
풍진성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객잔.
이번에도 통째로 빌렸는지 상당한 규모임에도 객잔 안에 손님들이 없었다.
“어?”
무심코 객잔 입구에 걸린 편액을 확인하던 단악선이 깜짝 놀랐다.
“신마객잔?”
사무심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마 전부터 우리가 인수해 운영하는 곳입니다.”
“우리요?”
“신마상단.”
사무심의 얼굴에 맺혀 있던 웃음이 짙어졌다.
“곡주님께서 그 상단의 주인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