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58)
신마의선-158화(158/500)
신마의선 (158)
며칠이 지난 늦은 오후.
공동산을 내려오던 단악선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들고 있던 연판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설화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이로써 구대문파의 모든 수결을 받아 냈구나.”
“네.”
이제 연판장은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개방 방주인 이립의 수결만 채워 넣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단악선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한설화의 물음에 단악선이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에요. 그저…….”
잠시 말끝을 흐리던 단악선이 쓰게 웃었다.
“사실 공동파의 사과를 받고 싶었거든요.”
“사과?”
한설화의 반문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와 공동파의 악연이요. 결국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 때문에 엄마가 마의로 불리게 되었고, 정파의 배척을 받게 된 셈이잖아요.”
하지만 공동파의 장문인인 형진도장은 끝내 이에 대해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사과를 받는다면 그 일에 연관된 사람에게 사과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함구하는 이상 단악선이 알아낼 방법이 전무했다.
이미 당사자인 어머니 역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사과를 받아 낼 수 있다.”
한설화의 말에 단악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단악선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마지못해 하는 사과에 무슨 진심이 담겨 있겠어요.”
한설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악선이 원하는 진정한 사과는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어차피 그들에게 사과를 받는 건 제가 해야 할 일이에요.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그럴 거고요.”
개인적인 일에 한설화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지금보다 성장해서 명성을 얻게 된다면 그들도 더 이상 자신을 무시할 수 없게 될 터.
한설화는 그런 단악선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너무 빨리 어른이 되지 마라.”
“네?”
“넌 네 또래의 아이들이 누려야 했던 것들을 많이 놓쳐 왔다. 지금이라도 천천히 그 모든 걸 경험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안쓰러움이 담긴 한설화의 눈빛에 단악선이 멋쩍게 웃었다.
“전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걸요.”
그렇게 산을 내려오던 도중.
앞서 기다리던 초악량과 범계위를 발견한 단악선이 활짝 웃으며 연판장을 높게 들어 올렸다.
“해냈어요!”
초악량과 범계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축하해, 단 의원! 난 우리 단 의원이 해낼 줄 알았어.”
쪼르르 달려온 단악선이 환한 미소와 함께 다음 목적지를 언급했다.
“이제 우리 남창으로 가요.”
“남창?”
고개를 갸웃하던 범계위가 이내 탄성을 터트렸다.
“아! 염화단철!”
해남도에서 구했던 염화단철을 묵가철장에 맡기고 왔던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그럼. 당연히 찾으러 가야지. 내가 그걸 얻으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고생이요?”
“그래. 벽화령 걔를 떼어 놓기 위해……, 컥!”
말을 하던 범계위가 옆구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팔꿈치를 휘둘러 범계위의 말을 자른 초악량이 재빨리 전음을 날렸다.
―왜? 한 누이랑 사귄다고 사기 친 것까지 밝히지 그래?
“헉!”
뒤늦게 범계위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리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어색하게 웃었다.
“……별로 고생스럽진 않았지.”
문득 따가운 시선을 느낀 범계위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지그시 자신을 응시하는 한설화와 시선이 마주쳤다.
“뭘 숨기고 있는 거지?”
한설화의 물음에 범계위가 정색을 했다.
“내가? 숨겨? 뭘?”
“…….”
“그거 알아? 그거 병이야, 의심병. 내가 무슨 맨날 사고만 치고 다니는 줄 알아?”
범계위가 이처럼 극구 부정하자 한설화는 오히려 더 수상하게 여겼다.
이때 초악량이 나서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단 의원, 기대되지 않느냐?”
“네?”
“머지않아 단 의원에게도 성명병기라 할 수 있는 무기가 생기게 될 테니까 말이야.”
“기대돼요!”
최근 들어 무공이 급상승하기 시작한 단악선이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더욱 무공에 대한 욕심이 생겨났다.
“그럼 길을 서둘러야겠군.”
그 말과 함께 범계위가 단악선을 번쩍 들어 어깨 위에 얹었다. 그리곤 한설화가 뭐라 할 틈도 주지 않고 바람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초 오라버니…….”
한설화가 초악량을 향해 뭔가 말하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초악량의 신형도 한참이나 멀어진 뒤였다.
한설화가 살짝 아미를 찡그렸다.
꼬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부자연스러운 두 사람의 행동이 수상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문제는 그걸 알아낼 방법이 당장은 없다는 점이다.
결국 한설화도 마지못해 앞서 달려간 두 사람을 쫓아 신형을 날렸다.
* * *
단악선 일행은 불과 며칠 만에 강서성 성도인 남창에 도착했다.
“가 아저씨와 함께 오지 못한 게 아쉬워요.”
문득 눈에 들어온 등왕각(滕王阁)을 보자 단악선은 불현듯 가두달이 생각났다.
당시 이곳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설명하던 가두달의 모습이 눈에 선했던 것이다.
단악선이 품속에 합죽선을 꺼내 펼쳐 들었다.
몇 번을 반복해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 익숙한 산수화가 눈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부채 속의 그림을 들여다보는 단악선의 모습에 초악량이 슬쩍 운을 뗐다.
“이제 수결이 제법 많아졌구나.”
“네. 화영문에서도 흔쾌히 연판장에 동의해 주셨어요.”
연판장에는 기존의 구대문파를 제외하고도 수결이 꽤나 늘어 있었다.
이곳으로 향하는 도중 크고 작은 문파를 들러 나름 명숙이라 불리는 이들에게도 수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대화를 이어 가던 이들이 묵가철장 앞에 이르렀다.
“어?”
단악선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장원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기 때문이다.
귀청을 두드려 대던 쇳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온통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게다가 대문 역시 굳게 닫혀 있었다.
단악선이 눈을 들어 대문 위의 현판을 바라봤다.
전에 왔던 묵가철장이 틀림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누군가 대답하기도 전에 성질 급한 범계위는 힘껏 대문을 밀어젖혔다.
우지끈.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활짝 열렸다.
그 소리에 놀란 대장장이 몇 명이 황급히 달려왔다.
“아니 이게 무슨…….”
처음엔 화를 내려 했으나 범계위를 발견한 그들이 이내 쓴웃음을 머금었다.
“장주님께 기별하겠습니다.”
이미 사전에 그들이 찾아올 거란 이야기를 들었던지 한 명이 내당 쪽으로 사라졌다.
나머지 대장장이들은 부서진 빗장과 반쯤 떨어져 나간 경첩을 보며 한숨을 흘릴 뿐이었다.
잠시 후.
한 사람이 월동문을 넘어 단악선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곤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누군지 몰라 의아해하던 단악선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왜 이렇게 살이 빠지셨어요?”
그 말에 초악량과 범계위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뭐야? 그 뚱땡이가 왜 강시가 됐어?”
놀랍게도 그는 육중한 몸집을 자랑하던 이곳의 장주, 묵비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고작 반년 만에 과거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훌쭉해져 있었다.
게다가 헐렁한 소매 사이로 드러난 손도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다.
혈색 좋던 안색은 파리했고, 갑자기 살이 빠져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더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묵비의 뒤쪽에 있던 대장장이 한 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만년한철과 염화단철, 그리고 운철은 모두 성질이 너무 달라 함께 녹여 섞는 방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결국 동시에 두드려 섞어야 했습죠.”
다른 대장장이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쉬워 그렇지 실제로는 그 어떤 대장장이도 엄두를 낼 수 없는 무식한 방법입니다. 장주님께서는 그야말로 수명을 갈아 넣어 그것을 완성한 셈입니다.”
그 말에 단악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묵비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역작을 위해서라면 어디 그게 대수일까. 덕분에 세상의 그 무엇보다 질기고 단단한 괴물을 내 손으로 벼려 낼 수 있었다.”
“잠깐만요. 우선 진맥 좀 할게요.”
단악선이 다짜고짜 묵비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렇게 맥을 짚길 잠시.
단악선이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몸이 완전 엉망이에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분명 반년 전에는 뚱뚱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특별한 이상을 찾아볼 수 없던 그였다.
단악선조차 처음 경험할 만큼 완벽할 정도로 건강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를 만큼 건강이 망가져 있었다.
막힘없이 흐르던 진기는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맥박도 불규칙했다.
등에 귀를 대고 청진하니 진폐 증상도 느껴졌다.
금속을 두드려 연성하는 과정에서 미세하게 발생하는 금속 가루로 인해 심폐 기능이 떨어진 것으로 짐작되었다.
“안다.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우려를 감추지 못하는 단악선과 눈이 마주친 묵비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단다.”
단악선이 한숨을 흘렸다.
“하아……. 일단 들어가서 누우셔야 할 것 같아요. 더 상태가 악화되기 전에 치료를 시작해야겠어요.”
“고맙구나.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봐야 할 게 있다.”
묵비가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식솔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들이 길쭉한 나무 상자를 가져와 단악선 앞에 내려놓았다.
“확인해 보거라.”
단악선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순색에 검정을 섞은 듯 은은한 광택을 지닌 암청색(暗淸色)의 봉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
단악선이 탄성을 터트렸다.
자세히 보니 마치 파도를 연상시키는 무늬가 매끄럽게 표면을 타고 흐르며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없이 유려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자아냈다.
이는 비단 단악선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훌륭하군.”
“멋진데?”
초악량과 범계위가 감탄성을 흘렸다.
한설화 역시 마찬가지.
비록 말은 하지 않았으나 더없이 흡족한 눈빛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 안에 손을 넣어 봉을 집어 든 단악선이 무게를 가늠했다.
묵직한 느낌을 주는 봉은 친숙하게 손에 착 달라붙었다.
“완벽해요!”
가볍게 몇 번 봉을 휘둘러 본 단악선이 더없이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때 묵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위화신공을 운용해 보아라.”
“위화신공을요?”
고개를 갸웃한 단악선이 묵비의 말대로 봉을 쥔 채 위화신공을 운용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
표면을 타고 흐르던 불규칙한 파형의 무늬가 눈에 띄게 선명해진 것이다.
마치 존재감을 뽐내듯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봉에 스며든 위화신공의 진기가 어느 순간 폭발하듯 늘어난 것이다.
스스로 의지를 지닌 것처럼 진기를 받아들여 증폭시키는 신기한 효과에 단악선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심상치 않은 표정에 초악량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단악선은 방금 자신이 겪은 신기한 현상을 세 사람에게 설명했다.
초악량의 눈 위로 은은한 놀라움이 떠올랐다.
내공을 증폭시키는 무구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처럼 직접 보는 건 그 역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니 실전에서 매우 유용하겠군.”
초악량의 말을 범계위가 받았다.
“수련은 말할 것도 없지. 큰 도움이 되겠수.”
단악선이 고개를 돌려 묵비를 바라봤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소중하게 다룰게요.”
묵비는 그런 단악선이 진심으로 기꺼웠다.
“오히려 내가 고맙지.”
“네?”
“그 녀석은 너를 통해 신병으로 거듭날 것이다. 신마의선의 성명병기로서 말이다.”
“신마의선이요?”
“몰랐느냐? 강호에 너에 대한 이야기가 파다하다.”
“제가요?”
어리둥절한 단악선의 모습에 묵비가 껄껄 웃었다.
“단언컨대 당금 강호의 가장 큰 화제를 꼽으라면 단연 네가 으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