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67)
신마의선-167화(167/500)
신마의선 (167)
과거 송나라의 수도였던 개봉은 한때 불야성(不夜城)이라 불릴 만큼 성세를 구가하던 때도 있었다.
하나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부침을 겪어야만 했다.
이민족에 의해 수차례 유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족들에게 있어 정신적 고향과도 다름없었다.
그곳에서 개방은 유구한 역사를 이어 오고 있었다.
중원 곳곳 뻗어 있지 않은 곳이 없는 개방이었지만 중심이 되는 총단은 늘 개봉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단악선 일행에게 있어서도 새로운 의미를 지닌 곳이기도 했다.
오랜 여행을 마무리 짓는 종착지가 바로 개봉이었기 때문이다.
원단을 하루 앞둔 그믐날.
수많은 거지들이 개봉을 향해 몰려들었다.
중원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대회합인 개방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인원으로만 따지면 단일 문파 중 최대 인원을 자랑하는 개방인 만큼 회합에 참가하는 숫자도 어마어마했다.
거리마다 넘쳐 나는 거지들로 상인들과 주민들이 몸살을 앓아야 했다.
그래도 일 년에 단 하루고, 딱히 폐해도 없는지라 사람들은 하루만 견디면 된다는 심정으로 속히 날이 저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반면 유독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 한 명이 바로 한설화였다.
“아주머니, 괜찮으세요?”
염려 가득한 단악선의 음성에 한설화가 아미를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구나.”
한설화의 안색은 몹시 창백했다.
가뜩이나 하얗던 피부가 지금은 아예 백지장처럼 질려 있었다.
“하다못해 후각만이라도 마비시켜 줄 수 없겠느냐?”
한설화의 말에 단악선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후유증이 클 거예요. 이제 막 신체의 감각이 돌아오고 있는데, 이를 강제로 차단하면 회복이 훨씬 더뎌질 테니까요.”
한설화가 다시 한 번 한숨을 흘렸다.
할 수만 있다면 코를 떼어 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참기 힘든 악취가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심지어 종일 객잔 안에 머물고 있는데도 그랬다.
거리가 온통 거지 천지니 아무리 창문을 닫아걸어도 소용없었다.
덜컹.
객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선 것도 그때였다.
“시간이 됐습니다.”
웃으며 들어서던 홍적문이 화들짝 놀랐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한설화의 눈빛이 비수처럼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단악선이 한설화의 손을 잡아 진정시켰다.
그리곤 홍적문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곧 갈게요.”
홍적문이 황급히 사라지자 단악선이 한설화를 이끌어 객잔 밖으로 나섰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한설화가 마지못해 단악선을 따라나섰다.
객잔 밖에서 기다리던 초악량과 범계위가 합류하자 일행은 개방 대회가 열리는 장소로 향했다.
마을 외곽에 위치한 거대한 공터.
과거 개봉에서 가장 큰 사찰인 천청사(天清寺)가 위치해 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사리탑만 남아 폐허를 방불케 했다.
이미 그곳에는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많은 거지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런 만큼 굉장히 소란스럽고 시끄러웠다.
그들은 저마다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곤 했는데,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 보니 바로 옆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도 눈짓과 표정, 손짓을 섞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만큼은 하나같이 밝고 정겨웠다.
이때 중앙 공터의 바위 위로 한 사람이 올라섰다.
개방의 방주인 이립이었다.
이립이 모습을 드러내자 수많은 거지들이 바위를 빼곡하게 에워싸기 시작했다.
“신수가 훤해지셨소이다, 방주!”
“우리 몰래 주안과라도 훔쳐 자신 거요?”
“예끼. 우리 광명정대하신 방주님께서 주안과 따위에 흔들리실 리 없지 않은가? 술이라면 또 몰라도.”
사방에서 왁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방주! 좋은 술 있으면 나눠 드십시다. 혼자만 몰래 드시지 말고!”
그 모습만으로도 평소 이립이 다른 개방도와 얼마나 격의 없이 지내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어 대는 통에 장내의 소란은 극에 달했다.
따악!
그때 경쾌한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이립이 개방의 신물인 타구봉을 들어 바위를 내려친 것이다.
딱딱딱!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이립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타구봉으로 바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홉 번을 모두 채우자 어느새 장내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그야말로 터럭 하나 떨어지는 소리마저 천둥처럼 들릴 만큼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은 것이다.
그 모습에 단악선이 내심 탄성을 흘렸다.
평소에는 자유분방한 개방의 기풍.
하나 그 안에는 이처럼 엄한 규율과 기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무겁게 내려앉은 적막을 깨며 이립이 입을 열었다.
“금일의 회합을 위해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와 참석해 주신 거지 놈들아! 이 거지 두목이 진심으로 감사를 올리는 바다.”
그렇게 운을 뗀 이립이 올 한 해 개방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대소사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치하할 건 치하하고, 꾸짖을 건 꾸짖는 근엄한 모습은 일방을 이끄는 방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위엄과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와 같은 연유로 십만 개방 방도를 대신해 본 방주의 이름으로 장로 한 분을 새로이 임명하니, 이는 본 방의 홍복(洪福)이 아닐 수 없도다.”
이립이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장로는 연단에 올라 방도들에게 얼굴을 보이시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곰보 자국이 얽은 노개(老丐) 한 명이 바위 위로 올라섰다.
“백화분타의 분타주 추면개가 이 자리에 모인 동도들께 인사드리오.”
사방을 향해 돌아가며 포권을 취하는 그를 향해 우레와 같은 환호가 쏟아졌다.
“오오! 추면신개(醜面神丐)! 추면신개 신 대협이다!”
“저분이라면 당연히 장로직을 수행하기에 부족함이 없지!”
모든 거지가 그를 향해 아낌없는 박수와 축하를 건넸다.
추면개가 머쓱하게 웃더니 이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같은 놈이 감히 본 방의 장로가 되어도 괜찮을지 이 늙은이는 아직도 걱정이 앞섭니다.”
이립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놈들 성격을 모르시오? 만약 자격이 없었다면 당장 장로를 끌어내리려 했을 것이오. 사실 이제야 장로직을 맡긴 것도 늦은 감이 없지 않소이다.”
그 말대로 추면개는 개방 내에서 누구보다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무공이 크게 뛰어나지도, 언변이 훌륭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심하게 얽은 곰보 자국 때문에 앞으로 나서는 것도 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오랜 세월 묵묵히 뒤에서 개방을 위해 헌신한 방도였다.
개방을 위해서라면 제 한 몸 아끼지 않고 모든 일에 나섰으며, 협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언제나 솔선수범을 보여 많은 개방도들에게 귀감이 되어 왔다.
인품과 협의.
오직 그것만으로 장로직에 오르게 된, 흔치 않은 인물인 것이다.
추면개는 자신에게 환호와 축하를 보내는 거지들의 면면을 한 명씩 확인하며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감사의 눈빛을 던졌다.
그때 이립이 다시 한 번 타구봉을 들어 바위를 내리쳤다.
좌중의 소란이 가라앉자 이립이 외쳤다.
“금일 본 방에 특별한 손님을 초빙했다.”
이립의 말에 개방 방도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이곳은 개방이었다.
중원의 모든 소문과 정보가 집결하는 특성상 이미 이립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바로 짐작한 것이다.
“그 소문 자자한 신마의선?”
“신의님의 혈육이라니 우리에게는 이미 형제나 다름없지.”
“그러니 일부러 우리 개방에게 연판장의 내용을 공표하는 거 아닌가.”
“오! 저기 나오는군!”
바위 위로 오르는 단악선과 그 뒤를 따르는 세 사람의 모습에 개방도들이 크게 환호했다.
“난 여기서 기다리마.”
한설화는 도저히 거지들 한가운데 들어설 수 없었던지 멀찍이 물러섰다.
그녀에게 그게 얼마나 고역인지 아는 까닭에 단악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한설화를 대신해 초악량과 범계위가 단악선의 좌우를 맡아 호위하듯 이립 곁에 섰다.
이립의 눈짓에 단악선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준비했던 말을 큰 소리로 외쳤다.
“언젠가 아버지께 들었어요.”
단악선이 입을 열자 개방도들은 이어질 단악선의 말에 주목했다.
“개방이야말로 진정한 정파 무림의 뿌리라고요. 정의와 협의를 위한 개방의 헌신이 있어 정파 무림은 꽃을 피울 수 있었다고 하셨죠. 이를 위해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개방의 영웅들께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단악선의 말에 장내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나 그것도 잠시.
“신의가 역시 아들을 잘 키웠어.”
“예전부터 신의가 우리 개방을 참 잘 챙겨 줬지.”
“신마의선도 그동안 우리 개방 거지들에게 그리 예의를 차렸다고 하더군.”
어느 순간부터 개방 거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환영의 의미를 깨달은 단악선도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무조건 우리를 찾으시오!”
“우리 개방은 은혜를 절대 잊지 않소!”
“신의에게 갚지 못한 은혜! 갚을 곳이 생겨서 다행이야!”
그렇게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을 때였다.
갑자기 훈훈한 분위기를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왕칠아! 석두야!”
단악선이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다.
이립의 바로 뒤쪽.
방금 전 취임한 장로인 추면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성큼 다가서는 추면개의 모습에 단악선이 당황한 사이.
추면개는 그대로 단악선을 지나쳐 초악량과 범계위에게 향했다.
“살아 있었구나, 이놈들아!”
모두가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던 와중.
“헉!”
추면개를 쏘아보던 범계위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초악량 역시 마찬가지.
몹시 당황한 듯 눈빛이 제자리를 잃고 흔들렸다.
거지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왕칠? 석두? 그게 누구야?”
“저분들은 혈수존자와 망산초자 아니야? 빙옥선자와 함께 신마의선과 늘 함께한다는 삼존자(三尊子).”
“그러게? 저 양반이 이제야 치매가 오셨나?”
개방도들 중에 제법 연륜을 지닌 늙은 거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 왕칠과 석두? 걔들 삼십 년 전에 크게 사고 치고 잠적한 놈들 아냐?”
“아! 그때 그?”
단악선은 사색이 된 초악량과 범계위의 모습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어지간한 일로는 눈 하나 깜짝 않는 두 사람이 이처럼 동요하는 건 그만큼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짚이는 바가 있었다.
“혹시 아는 분이세요?”
“어? 어……. 그게…….”
단악선의 질문에 범계위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차마 단악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순간 추면개가 범계위와 초악량을 와락 끌어안았다.
추면개의 주름진 눈가는 어느새 눈물이 축축했다.
“이 매정한 놈들! 살아 있다면 살아 있다고 소식이라도 전할 것이지. 그것도 모르고 이 늙은이는 매년 네놈들을 위해 제를 올리지 않았느냐.”
엉겁결에 추면개에게 붙들린 두 사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이 영감님은 왜 갑자기 나타난 거요?
―그걸 내가 어찌 알아?
당황해 전음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이내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는 단악선의 시선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이립의 질문에 초악량과 범계위가 시선을 마주하더니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초악량이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고 기억 속에서 오래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삼십 년 전이었다.”
이제 막 무명(武名)을 알리기 시작하며 십대악인의 말석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할 무렵.
초악량과 범계위는 엄청난 위기에 내몰려 있었다.
누군가가 두 사람의 정보를 캐내어 정파 쪽에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들의 정보를 캐낸 사람이 하오문주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행방이 워낙 묘연해 실체를 잡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다 단서 하나를 겨우 얻어 냈다.”
하북 석가장 인근에서 하오문주가 출몰한다는 정보를 확보한 두 사람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워낙 쥐새끼처럼 겁이 많은 놈이라 철저하게 신원을 감출 필요가 있었지.”
그래서 두 사람은 거지로 변장해 잠복을 시작했다.
눈앞의 추면개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