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74)
신마의선-174화(174/500)
신마의선 (174)
다음 날 정오 무렵.
사무심이 단악선의 전각을 찾았다.
그간 확인한 마을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오셨어요? 마을은 좀 어떤가요?”
어김없이 밤을 새운 듯 단악선이 퀭한 눈으로 사무심을 맞이했다.
내공이 깊어지면서 육체의 회복력도 비약적으로 상승했지만 정신적인 소모는 애초부터 별개의 문제.
그런 단악선의 모습을 오랜만에 마주한 사무심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어제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릅니다. 사파인들 중 절반 이상이 무위를 떠났고, 현재 머물고 있는 인원은 총 서른다섯 명입니다.”
사무심의 말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네요.”
“그래도 말썽을 부리던 자들 대다수가 떠난 탓에 꽤나 한적해졌습니다.”
“남기로 결정한 분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몇몇 요주의 인물들이 있습니다만, 마을 사람들에게 크게 피해를 끼친 자는 없었습니다. 있다 해도 어제 모두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했다더군요.”
“그 과정에서 문제는 없었나요?”
“네. 신마상단의 사람들이 마을을 전부 돌며 확인했습니다. 적절한 보상까지 확실히 마쳤다고 합니다.”
“좋아요. 약속했으니 그분들은 받아들여야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단악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선, 그동안 마을 사람 중에 피해를 입은 분을 모시고 와 주세요. 특히 몸이 다친 분들 우선으로요.”
“그리하겠습니다.”
돌아서는 사무심을 향해 단악선이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두 분 아저씨들이 보이지 않으시네요?”
오랜만에 느긋하게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한설화와 달리 초악량과 범계위는 종일 어디 갔는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사무심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머물기로 결정한 사파인들을 따로 불러 교육을 시킨다 하시더군요.”
“교육이요?”
“네. 의가가 들어설 장원에서요.”
단악선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그 부분이라면 두 사람에게 충분히 믿고 맡겨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새롭게 의가가 들어설 장원에는 서른다섯 명의 사파인들이 집결해 있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는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초조함이 가득했다.
“설마 이래 놓고 우릴 죽이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에이, 그래도 명색이 그들 정도나 되는 고수들이 한 입으로 두말할까.”
“맞아. 신마의선께서도 약속하지 않으셨나?”
“별일 없을 거야. 아암, 그렇고말고.”
스스로 다짐하듯 애써 불안을 떨쳐 내는 그들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자신들과 달리 태연한 신색으로 담벼락에 기대고 서 있는 중년 사내.
느긋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 눈빛이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마치 자신만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은 독특한 분위기에 몇몇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저자……. 비무귀신 아니야?”
“추비무랑(追比武郞)?”
자세히 그를 뜯어보던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군. 추비무랑 곡운경. 저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비무에 미쳐 중원을 여덟 번이나 돌았다는 바로 그?”
사람들의 눈에 의외란 감정이 떠올랐다.
다른 건 몰라도 무공 실력만으로 따지자면 어제 사라진 거령노군에 필적하는 고수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 년 전에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최근에 좀처럼 소식을 듣지 못했군.”
명호만으로도 살아온 길을 알 수 있듯, 곡운경은 비무에 집착해 평생 동안 중원을 떠돌던 자였다.
세력도 명성도, 모든 걸 도외시한 채 오직 고수와 겨루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은 투귀(鬪鬼).
고수라 알려진 사람들에게는 정사를 불문하고 비무를 요청한 탓에 그와 손속을 겨루어 보지 않은 사람은 진짜 고수가 아니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쯤 되니 강호에서는 곡운경 그 자체가 고수와 하수를 나누는 일종의 척도쯤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하나 비무라는 게 늘 그렇듯, 종종 불행한 결과를 야기하기 마련이다.
애초에 그가 실전 대련을 추구하는 탓에 비무에 패배해 목숨을 잃은 무인이 적지 않았다.
물론 곡운경 자신도 목숨을 내놓고 임하는 비무였지만 그로 인해 난마처럼 얽힌 은원 또한 적지 않았다.
수군대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곡운경이 눈을 들어 장내에 모인 자들을 향해 못마땅한 눈빛을 흘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서늘한 으름장도, 불쾌한 내색도 없이 이내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그런 그의 얼굴에도 이내 감출 수 없는 긴장감이 자리 잡았다.
장원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초악량과 범계위였다.
마침 기대고 있던 곳이 정문 근처인지라 곡운경은 곧바로 초악량의 눈에 띄었다.
“어디 이름 없는 들판에 백골로 누워 있을 줄 알았는데 용케도 아직까지 목숨이 붙어 있구나.”
초악량이 건넨 말에 곡운경이 쓰게 웃었다.
“비무는 오래 전에 그만뒀습니다.”
“그만두다니? 네가 비무를?”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는 초악량을 대신해 범계위가 코웃음을 쳤다.
“흥! 차라리 개가 똥을 끊지.”
범계위 역시 그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강호가 아무리 넓다 하나 그 정도로 미친놈은 흔하지 않았다.
대놓고 초악량에게 비무를 청할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
그런데 곡운경이 나직이 한숨을 흘리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존자와 비무 이후 십 년간 폐관 수련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도전할 생각이냐?”
“길이 보이지 않아서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뼈를 깎는 수련을 통해 무공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을 절감할 뿐이었다.
“남은 생은 이곳에서 조용히 지내며 가업이나 이을 생각입니다.”
“싸우는 것 말고 네가 할 줄 아는 게 있다는 말인가?”
초악량의 반문에 곡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 대대로 포목점을 운영해서 바느질에는 제법 일가견이 있습니다.”
초악량이 피식 웃었다.
온몸이 걸레처럼 찢기고 짓이겨진 상태에서도 악귀처럼 달려들던 과거의 그를 떠올리니 도저히 옷감을 깁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품은 뜻은 다른 법.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응원을 대신했다.
곡운경을 지나쳐 중인들 앞에 선 초악량과 범계위가 삼엄한 눈빛으로 좌중을 쓸어 보았다.
“자, 주목!”
범계위의 쩌렁한 목소리가 장원을 흔들었다.
“너희들에게 이곳의 절대 규칙을 알려 주겠다!”
꿀꺽.
중인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어떤 말을 하려고 자신들을 이곳에 한데 모았나 싶었던 것이다.
장내에 내려앉은 적막.
그 팽팽한 긴장감이 절정에 달한 순간, 범계위가 입을 열었다.
“만약 네놈들로 인해 단 의원이 한숨을 흘리면 그놈은 죽는다! 한심한 꼬라지로 단 의원을 실망시켜도 죽는다! 단 의원을 고민시킨 놈? 그놈도 죽는다. 단 의원 기분을 나쁘게 하는 놈은 말할 것도 없겠지? 그놈도 죽는…….”
“그만.”
범계위의 말을 자른 초악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지금 규칙이라고 말하는 거냐? 그냥 다 죽이지 왜?”
“사실 그것도 생각 안 해 본 건 아니유.”
범계위의 서슬 퍼런 눈빛이 장내를 훑었다.
“사실 이놈들 있어 봐야 사고만 칠 게 분명하지 않수? 나중에 귀찮아지기 전에 미리 죽여 버리는 게 낫지 않겠소?”
전혀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진지한 범계위의 눈빛에 사파인들이 흠칫했다.
걸어 다니는 재앙이라 불리는 망산초자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그 말에 초악량이 피식 웃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럴 거면 술은 왜 주문했어?”
“그야 피 냄새 지우려고……”
“그럼 술잔은 왜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머쓱해진 범계위가 괜히 중인들을 향해 역정을 냈다.
“에잇! 몰라! 어쨌든 사고 쳐서 단 의원 힘들게 하는 놈은 정말 죽는다. 이건 진심이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활짝 열린 장원의 대문으로 들어서는 수레 하나가 있었다.
수레 위에는 신마상단을 통해 미리 준비한 술 항아리와 음식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초악량이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운 뒤 중인들에게도 술을 권했다.
“자, 다들 한 잔씩 들어라. 그래도 이사를 왔으니 환영 인사는 해야지.”
각자 넘치도록 잔에 술을 따르자 범계위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진짜 규칙을 알려 주겠다.”
범계위가 중인들을 향해 말을 이어 갔다.
“절대 주민들을 건드리지 마라. 노려보지도 말고, 눈이 마주치면 웃어라. 만약 손을 대거나 협박하는 자가 있다면,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사고를 치고 무위를 떠나면 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 이름을 걸고, 반드시 쫓아가 응징할 거니까.”
경청하던 중인들이 범계위의 살벌한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초악량은 충분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판단했다.
이일경백(以一警百), 살일경백(殺一儆百).
거령노군을 눈앞에서 징벌하는 것으로 본보기를 보였으니, 이제는 저들을 다독여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차례였다.
“단, 문제없이 조용히 살아간다면.”
초악량이 술잔을 비운 뒤 말을 이어 갔다.
“우리가 지켜 주겠다. 적어도 이 무위 안에서만큼은.”
그 말에 비로소 중인들의 얼굴에 안도한 기색이 떠올랐다.
“산 그림자는 밀어도 움직이지 않고(山影推不出) 달빛은 쓸어도 다시 생겨난다지만(月光掃還生),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일화처럼 각고정려(刻苦精勵) 한다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를 내어 주는 것이 하늘의 섭리다.”
그렇게 운을 뗀 초악량이 좌중을 둘러봤다.
“너희들은 도망자다.”
그 말에 몇몇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초악량은 관심 없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모든 일은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쉬운 법.”
“…….”
“한번 달아나기 시작하면 결국 그 사람의 인생 자체가 도망자의 삶으로 귀결되고 말지. 모든 일에는 관성이라는 것이 따라붙는 법이거든.”
정곡을 찔린 몇 명이 자신의 손에 들린 술잔을 침울한 표정으로 들여다보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자신의 삶에서 달아날 건가? 죽을 때 후회로 점철된 기억만 끌어안은 채 눈을 감을 것인가?”
초악량이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곳은 너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의 땅이다. 만약 이곳마저 등진다면 평생을 도망자로 강호를 떠돌아야 할 게야.”
중인들의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너희들의 결정이고, 당사자들의 인생이니만큼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어진 초악량의 말에 좌중의 눈빛 위로 격동의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결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마라.”
범계위와는 사뭇 다른 초악량의 언변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눈빛을 나눈 중인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저마다의 사연과 이유를 품고 이곳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건 한가지였다.
바로 마음 놓고 지낼 수 있는 땅이었다.
그런 그들의 눈빛을 확인한 초악량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손에 든 그 술을 마시는 순간 너희들도 이곳 무위의 일원이 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중인들이 자신의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모두가 술잔을 비우자 초악량이 조용히 웃었다.
“무위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겠습니다!”
“혈수존자 만세! 망산초자 만세!”
“부디 저희를 잘 영도해 주십시오!”
말로 설명하기 힘든 뜨거운 열기가 장내를 휩쓸었다.
하지만 의미심장한 웃음을 말아 올린 범계위의 한마디에 뜨겁던 공기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이걸로 너희들의 생사여탈권은 내 손에 떨어졌다. 흐흐흐.”
화들짝 놀란 중인들 중에서 그나마 담이 큰 몇 명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선배님 농담도 참…….”
하지만 이어진 범계위의 반문에 흠칫하며 굳어 버렸다.
“어? 내가 방금 소리 내서 말했나?”
그나마 질 나쁜 농담이라 기대했던 몇몇 사람들마저도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