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76)
신마의선-176화(176/500)
신마의선 (176)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범계위는 내심 불만이 가득했다.
식사 때를 놓쳐 배가 고픈 건 둘째 치고, 단악선과 함께할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아 이 순간이 몹시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의 그답지 않게 끝까지 인내하며 치료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무림인.
그것도 비빌 언덕 없는 사파인으로 살아가는 고단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초악량과 한설화 역시 마찬가지.
그래서 말없이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한편, 치료를 마친 사파인들도 어느 누구 하나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단악선에게 감사의 말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 와중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주제가 하나같이 비슷했다.
“여기서는 뭘 해 먹고 살아야 하나?”
이곳 무위는 이전처럼 약육강식의 논리가 허용되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입에 풀칠할 수단이 마땅치가 않았다. 재산을 모두 가지고 와서 넉넉한 사람도 있었지만, 무림맹에 쫓겼던 자들은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 말을 들었던지 단악선이 웃으며 말했다.
“신마상단에 말씀하시면 그쪽에서 방법을 찾아 줄 거예요. 일자리가 필요하신 분은 신마상단에 부탁해 보세요.”
“오! 그런 방법이!”
새삼 단악선의 꼼꼼하고 세심한 배려에 탄복하는 사파인들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어 간 치료는 결국 노을이 내려앉은 무렵에야 막바지에 이르렀다.
마지막 환자는 곡운경이었다.
“누적된 부상들이 적지 않네요. 응급 처치만 하고 넘어간 탓에 그대로 근육이 협착된 곳도 있고요.”
곡운경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판을 전전한 탓에 이제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고질병들이었다.
“다행히 회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런데…….”
말끝을 흐린 단악선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내상이 꽤 오래되셨네요?”
“…….”
“내공도 상당하신 분이 왜 이렇게 내상을 방치하신 건가요? 운기조식 몇 번만으로도 간단히 회복될 텐데요.”
곡운경이 언뜻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맥을 잡은 것만으로도 이렇게까지 상세히 자신에 대해 파악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빤히 자신을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리는 단악선의 모습에 곡운경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무림을 떠날 생각입니다.”
“금분세수(金盆洗手) 말씀이세요?”
금분세수는 말 그대로 금대야에 손을 씻는다의 의미로, 그간의 모든 은원을 끊고 강호에서 은퇴하기 위한 행위였다.
“그리 요란 떨 것 없이 그냥 조용히 사라질 것입니다.”
단악선은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스스로 말한다면 들어 주겠지만, 캐묻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원으로서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은퇴를 하시려면 더더욱 치료를 하세요. 무림인이 아닌 일반인으로 살려면 건강한 몸이 필수니까요.”
너무나 당연한 지적에 곡운경은 변명을 찾지 못했다.
“그럼 치료 시작할게요.”
곡운경은 침을 꽂아 넣는 단악선에게 묵묵히 자신의 몸을 맡겼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이곳에 오셨으니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아픈 몸은 행복에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을 하는 단악선은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곡운경은 왠지 자신이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의원 앞에서 나쁜 놈은 없다더니, 딱 자신이 그 꼴이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몸을 아끼세요.”
말없이 단악선을 응시하던 곡운경이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곡운경을 마지막으로 사파인들의 치료가 마무리되었다.
그러자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파인들이 일제히 단악선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단악선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 괘념치 마세요.”
사파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구유음소(九幽吟嘯)라는 명호를 지닌 장곡이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은원만큼은 확실히 계산하는 놈입니다.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는 큰 은혜를 입었으니 반드시 이를 갚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게 보은할 기회를 주십시오.”
사실 그는 몇 년 전부터 주화입마의 전조 증상을 겪고 있었다.
한때 사파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던 그가 최근 무공 사용을 기피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매번 적을 피해 달아나야만 하는 신세였다.
그런데 오늘 단악선에게 희망적인 말을 들었다.
아직 주화입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어서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무공 역시 부작용 없이 예전처럼 쓸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에 장곡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을 뻔했다.
물론 앞으로도 몇 번의 치료를 더 받아야 했지만 그 희망만으로도 무너졌던 자존감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단악선이 웃으며 좌중을 둘러봤다.
“아시다시피 이제 이곳 무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곳이에요. 그러니 모두 힘을 합쳐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봐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단 의원님 말씀이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겠습니다!”
초악량과 범계위, 한설화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실소했다.
추종자처럼 외치는 사람은 장곡 단 한 명이었지만, 다른 사파인들의 표정도 처음과는 달랐다.
고개를 끄덕이는 자부터 말은 하지 않지만 감동한 눈빛을 보내는 자도 보였다.
물론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거나 의심을 지우지 않는 자도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차차 알게 되겠지.’
그래도 며칠 전에 봤던 그 시시껄렁한 놈들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기에 단악선 일행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새삼 단악선의 능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단악선의 진짜 무서운 점은 하늘에 닿은 것 같은 의술도,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무공의 재능도 아니었다.
정말 대단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사람의 경계심을 허무는 친화력과 포용력이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소리장도(笑裏藏刀).
저들은 웃음 속에 칼을 감춘 자들을 누구보다 많이 겪어 온 사람들이다.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긴 자들인 셈이다.
그만큼 경계심이 강하고 타인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런데 단악선 앞에서는 금성철벽 같은 단단한 마음의 벽이 흔들리는 것이다.
‘하긴…….’
사교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한설화도.
지랄 맞은 성격 때문에 친구라고는 대초자곤뿐인 범계위도.
어디 내놔도 하나같이 부끄러운 두 사람조차 지금은 단악선의 이야기가 나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그나마 유일하게 사람다운 자신 역시 마찬가지.
그만큼 단악선은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지 오래였다.
그렇게 초악량이 나름의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그때까지도 포기하지 않았는지 장곡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곤 대답을 듣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그 자리에 뻣뻣하게 서서 단악선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고집스러운 면모에 단악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러시면 나중에 몸이 회복된 후에 저와 비무 한번 해 주세요.”
“비무…… 말입니까?”
“네.”
단악선이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분들도 괜히 제게 미안해하지 마시고, 몸이 회복되면 비무 한 번씩만 해 주시면 돼요. 제겐 그게 가장 큰 선물이거든요.”
“비록 부족하지만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하겠습니다!”
“지금 말고요. 몸이 다 회복되신 다음에요. 오래 이곳에 계실 것이니 서두르지 마세요.”
단악선의 따뜻한 말에 사파인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그런데 유독 한 명은 다른 이처럼 웃지 못했다.
그 모습이 공교롭게도 범계위의 눈에 들어왔다.
“초 형, 저놈 아직 미련을 못 버린 것 같은데?”
초악량이 고개를 돌려 곡운경을 바라봤다.
모두 타 버려 재만 남은 것 같던 무기질적인 눈빛.
그런데 지금은 짙은 갈등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채 꺼지지 않았던 불씨가 아직도 그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일까.
“녀석이 괜히 비무귀신이겠느냐?”
그의 눈빛을 확인한 초악량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만 하면 저 녀석을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초악량이 사무심을 향해 손짓했다.
사무심이 다가오자 초악량이 눈짓으로 곡운경을 가리켰다.
“듣자니 저 녀석이 포목점을 운영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군.”
“그렇지 않아도 최근 적당한 자리를 찾으러 다니는 모양이더군요.”
“성과는 좀 있는 것 같던가?”
사무심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땅한 곳이 없는 모양입니다. 적당한 곳은 치를 돈이 부족하고, 돈에 맞추어 가게를 열자니 위치가 나빠 고민이 많아 보였습니다.”
“그래? 잘됐군.”
초악량이 눈빛을 빛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날 밤.
곡운경은 침상에 누워 낮의 일을 떠올렸다.
단악선이 했던 말이 새삼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픈 몸을 굳이 내버려둔 건, 다시 생각해봐도 스스로에 대한 미련한 반항이었다.
거울을 보며 화를 낸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투정을 부리고 있었던 것일까?’
단악선의 따뜻한 웃음이 떠오르자 자신이 더욱 작게 느껴졌다.
‘그 나이의 아이도 아는 걸, 내가 모르다니.’
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켜 침상에서 내려온 곡운경이 봇짐 안에서 전낭 하나를 꺼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전낭은 가볍기만 했다.
‘젠장.’
그렇게 아끼고 아꼈건만 가진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 머물고 있는 객잔만 해도 이곳 무위에서 가장 저렴한 곳이었다.
침대 하나로 방이 꽉 찰 정도로 좁아 객방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
어디 그뿐인가.
돈을 아끼기 위해 며칠째 삼시 세끼를 소면으로 때우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돈은 야금야금 줄어들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돈 걱정을 하다니.’
아마 무위의 여러 무림인이 곡운경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복잡한 심사를 달래고 있을 때였다.
곡운경의 눈에 차가운 섬광이 번뜩였다.
‘고수!’
그것도 평범한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가공할 존재감이 바로 지척에서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곳에서 지내고 있었던 겐가?”
방에 들어서려다 좁은 실내에 질색하며 멈춰 선 사람.
바로 초악량이었다.
곽운경이 예를 갖춘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늦은 시각에 어쩐 일이십니까?”
“따라와라.”
초악량은 그 말만을 남긴 채 그대로 돌아섰다.
곡운경은 의아했지만 그래도 초악량의 말을 무시할 수 없어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을 걸어 초악량이 멈춰 선 곳은 마을 외곽, 경계석이 위치해 있는 너른 공터였다.
곡운경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불러 놓고 초악량은 이곳으로 자신을 데려온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저 모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곡운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저를 부르신 것입니까?”
“비무나 한번 해 볼까 해서.”
“네?”
당황한 곡운경이 황망한 눈빛을 던졌다.
“이미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제 더 이상…….”
초악량이 그 말을 잘랐다.
“언제까지 거짓말을 할 셈이냐?”
“제가 왜 존자께 거짓을 고한단 말입니까?”
“나 말고.”
“예?”
“너 스스로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