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177)
신마의선-177화(177/500)
신마의선 (177)
초악량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내게 패배했던 그날. 당시의 네 표정을 분명히 기억한다.”
움찔하는 곡운경을 향해 초악량이 말을 이어 갔다.
“그때 너는 웃고 있었다.”
끝없는 갈증에 허덕이던 아귀가 한 모금의 감로수로 목을 축인 것처럼 원 없이 웃던 모습.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후련한 얼굴이었다.
“…….”
자못 복잡해진 눈빛을 흘리는 곡운경을 향해 초악량이 쐐기를 박았다.
“폐관 수련을 한 이유도 짐작한다. 목숨을 던진 비무를 통해 느꼈던 희열, 이를 다시 한 번 느껴 보고 싶었던 것 아니냐? 다른 사람과의 비무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했을 감정들이니까.”
곡운경이 멈칫하며 그대로 굳어졌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초악량과의 비무 이후 다른 사람과도 몇 번인가 비무를 치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기준은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태.
하나같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만의 강박.
병증에 가까운 기이한 집착은 오직 생사의 간극에 스스로를 올려놓았을 때, 비로소 해방될 수 있었다.
이후 몇 번이고 당시의 비무를 되새겼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자신을 괴롭히는 기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다시 초악량에게 도전할 수도 없었다.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무위의 격차가 심했다.
폐관 수련을 결심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십 년간의 고행을 통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무위를 지닐 수 있었다.
그래서 비록 승리는 장담하지 못하더라도 전보다는 확실히 나은 승부를 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이건 웬걸.
막상 초악량과 다시 마주하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어마어마한 벽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이제 와 눈높이를 낮춰 고만고만한 놈들을 상대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다 작금의 상황에 이른 것이다.
“천하에 무서울 게 없는 놈이 안전을 위해 이곳에 왔다? 그 말을 믿으란 말이더냐?”
초악량의 얼굴에 맺혀 있던 웃음이 짙어졌다.
“미련이 남은 것이라면 몰라도.”
정곡을 찔린 곡운경이 복잡한 눈빛으로 초악량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런 그를 향해 초악량이 기세를 개방했다.
초악량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기파가 유혹하듯 곡운경을 끌어당겼다.
주저하는 곡운경을 향해 초악량이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모처럼의 기회를 이대로 날려 버릴 생각이냐?”
그래도 머뭇거리는 곡운경을 향해 초악량이 짧게 혀를 찼다.
“쯧!”
그 순간 곡운경은 형언할 수 없는 강대한 경력이 난데없이 눈앞으로 짓쳐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쩌엉!
“컥!”
곡운경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온몸의 뼈마디가 욱신거리는 충격과 함께 눈앞이 아득해졌다.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막지 않았다면 그대로 치명상으로 이어졌을 것이 분명한 단호한 손속.
소름이 쭉 끼쳤다.
그때 초악량이 입을 열었다.
“나는 삼합명백(三合明白)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세 번 손을 섞으면 모든 것이 명백해진다는 의미.
무인에게 있어 이만한 소통 방법도 없었다.
모든 언어와 문화를 뛰어넘는 위대한 설득력을 지닌 유일한 수단.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결국 그 녹이 점점 쇠를 먹는다.”
초악량이 좋아하는 법구경에 담겨 있는 말이었다.
망설임, 혹은 의심.
잠식되는 순간 이보다 더 위험한 독도 없었다.
“그리고 그 녹은 두드려야 털어 낼 수 있는 법.”
그 말과 함께 초악량이 다시 한 번 손을 휘둘렀다.
콰앙!
이번에도 간신히 눈앞으로 날아든 경력을 막아 낸 곡운경이 그대로 오 장가량을 주르륵 밀려났다.
발밑에 새겨진 깊은 고랑.
그 족적을 따라 올라온 저릿한 충격이 온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마지막 기회다. 싫다면 나도 더 이상은 강요하지 않으마.”
초악량이 다시 한 번 손을 움직였다.
산책하듯 가볍게 팔을 내젓는 동작.
거기에 허공의 한 점을 찍는 가벼운 손짓이었다.
하나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곡운경은 돌연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무형장!’
흔적 없이 가슴팍을 향해 날아드는 위협적인 기운을 직감한 곡운경이 황급히 상체를 젖히며 뒤로 물러섰다.
꽈앙!
그와 동시에 곡운경은 조금 전 자신이 딛고 서 있던 대지가 그대로 움푹 파여 짓이겨지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위력이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이 순간 그는 심장이 뛰었다.
게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이미 초악량을 향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쇄도해 일 권을 내지른 것이다.
“바로 그거다!”
초악량은 피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오히려 곡운경을 향해 마주 손을 뻗었다.
콰앙!
폭음과 함께 사나운 경기가 일대를 휩쓸었다.
곡운경의 손이 변화를 일으킨 것도 그때였다.
전면을 가득 메운 무수한 권영(拳影)!
초악량은 기다렸다는 듯 그 사이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쩌저저정!
손과 손이 부딪쳤음에도 연거푸 섬뜩한 소성(搔聲)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순식간에 어지럽게 뒤얽히는 치열한 공방이 잠시 이어지나 싶더니.
와직!
“큽!”
이를 악물어 터져 나오는 신음을 가까스로 삼킨 곡운경이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위기를 직감하고 방비하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초악량의 어깨가 그의 가슴을 들이받은 뒤였다.
그런데 채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얼굴을 향해 쇄도하는 압력이 느껴졌다.
“헉!”
곡운경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언제 거리를 좁혔는지 초악량이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마주한 순간 온몸의 신경이 일제히 곤두섰다.
그때 초악량의 팔꿈치가 날아들었다.
반격은커녕 방비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공격이었다.
쩍!
초악량의 팔꿈치가 그대로 곡운경의 관자놀이에 작렬했다.
곡운경이 크게 휘청하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채 두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옆구리가 부서질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재차 거리를 좁힌 초악량이 무릎으로 옆구리를 걷어 올린 것이다.
그런데도 곡운경은 쓰러지지 않았다.
“으아아!”
오히려 짐승처럼 포효하며 초악량에게 달려들었다.
그 맹렬한 기세에 초악량이 씨익 웃었다.
“이제 겨우 녹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군.”
독기 가득한 곡운경의 눈빛.
초악량이 알던, 과거의 투지 넘치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곡운경은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슬쩍 옆으로 비켜서는 것만으로 가볍게 공격을 흘린 초악량이 곡운경의 기세를 역이용해 금나수로 멀리 던져 버린 것이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눈과 귀가 아닌, 손끝으로 보고 들어라.”
흘리듯 건넨 초악량의 음성.
무척이나 평온한 그 목소리가 곡운경의 귀에 천둥처럼 날아와 박혔다.
“크윽!”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삐걱댔지만 곡운경은 다시 초악량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달려드는 족족 얼마 버티지 못하고 거칠게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반복하고 나서야 곡운경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일어설 수 없었다.
“하아……. 하아…….”
곡운경이 바닥에 길게 누운 채 거친 숨을 헐떡였다.
결국 이번에도 초악량의 승리였다.
일어설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곡운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길 잠시.
초악량이 불쑥 입을 열었다.
삼십 년이나 칼을 찾은 나그네여(三十年來尋劍客).
몇 번이나 잎이 지고 싹이 돋았던가(幾回落葉又抽枝).
하나 매화꽃 한 송이 피워 낸 이후(自從一見梅花後).
지금에 이르도록 다시는 의혹이 일어나지 않나니(直至如今更不疑).
“……!”
곡운경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흔하디흔한 칠언 절구의 노랫가락.
하지만 진지한 초악량의 눈빛과 삼엄한 기세가 더해지니 그것은 더 이상 평범한 노래가 아니게 되었다.
자신만의 깨달음을 읊는 오도송(悟道頌), 즉 가르침을 함축하여 표현한 가결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내용이 혼백을 들었다 놓고 있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지극히 높은 오의(奧義)가 거대한 충격이 되어 뇌리를 흔들었다.
잠시 멍하니 누워 몇 번이고 그 말을 되뇌던 곡운경이 이윽고 힘겹게 신형을 일으켰다.
곡운경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초악량을 응시하다 이내 정중히 포권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초악량이 빙그레 웃었다.
“앞서 길을 걷는 자로서 의당 해야 할 일. 나는 전해 줬으니 그 안에서 무언가를 얻는 건 네 몫이다.”
곡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사승 관계로 묶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에게 있어 초악량은 선각자(先覺者)고, 스승이었다.
잠시 우두커니 서서 무언가를 생각하던 곡운경이 초악량을 향해 물었다.
“혹 제게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초악량은 대답 대신 되레 질문을 던졌다.
“포목점을 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수중의 돈을 떠올린 곡운경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이어진 초악량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포목점을 차리는 건 내가 도와주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일 사 총관이 찾아갈 것이다. 받아들일지는 네 뜻에 달렸다.”
영문 모를 말만을 남겨 둔 채 초악량이 돌아섰다.
얼떨떨한 곡운경은 멀어지는 초악량을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 당혹감에는 알 수 없는 지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 강해지셨구나.’
더 이상 위가 없을 것 같던 초악량이었다.
그래서 닿지는 못해도 예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따라잡았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초악량과 자신의 차이는 더욱 벌어져 있었다.
‘어떻게 저 경지에서 더 발전할 수 있는 거지?’
곡운경에겐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하루였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기 무섭게 곡운경은 한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사무심이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사무심은 자신을 따라오라 했다.
곡운경 역시 어제 초악량에게 들었던 바가 있는지라 말없이 사무심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곳입니다.”
사무심이 가리킨 곳에 멈춰 선 곡운경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건물 따위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는 바위를 빼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당황한 곡운경을 향해 사무심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저희가 아무 조건 없이 포목점을 세워 드리겠습니다.”
“이곳에 건물을 짓겠다는 뜻입니까?”
비록 강호에서는 마주한 적이 없었지만 사무심의 명호, 수전귀야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왔던 곡운경이었다.
비록 무공은 자신이 약간 앞설지 모르나 명성만큼은 부족함이 없는 자.
더구나 지금은 신마곡의 총관으로서 확고한 입지를 굳힌 탓에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곡운경의 반문에 사무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초 선배님의 지시였으니까요.”
곡운경이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초악량의 의도가 무엇인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를 잠시.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곡운경이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이곳의 지형이 조금 독특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마을 입구가 훤히 시야에 들어오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나더러 문지기가 되라는 것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곡운경을 향해 사무심이 조용히 웃었다.
“싫으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그에 따른 불이익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사무심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을 이어 갔다.
“그분께서 이를 의도하신 데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유라면?”
“그분의 깊은 심계를 제가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다만 이유 없는 지시를 할 분이 아니기에 넘겨짚은 것뿐입니다.”
곡운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사파인들이 혈수존자를 존경하고 추앙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만 보아도 사파의 종사로서 부족함이 없는 그였다.
인세의 일의 크게 관여치 않는 한설화나 생각 자체가 없는 것 같은 범계위와는 아예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초악량에게는 빚이 있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사무심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