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04)
신마의선-204화(204/500)
신마의선 (204)
반면 초악량은 초악량대로 생각이 많아졌다.
범계위와 한설화, 그리고 자신까지.
흑점주의 뻔한 의도가 짐작이 갔다.
신마상단과 거래를 튼 곳은 산서 지부였지만 결국 그 관계를 본단이 가져가려는 심산인 것이다.
그만큼 당금 강호의 가장 뜨거운 감자인 단악선과 신마의가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자네도 서운하겠어?”
초악량의 말에 엽단영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위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엽단영은 내심 그나마 자신의 뒷배로 있어 준 범계위와의 관계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본단의 사람을 만나 보시겠습니까? 그라면 존자께서 원하시는 대답이 가능할 것입니다.”
물끄러미 엽단영을 응시하던 초악량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하나 오래 기다리지는 않을 걸세.”
“걱정 마십시오. 혹시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싶어 미리 연락을 취해 뒀습니다.”
그 말에 초악량이 피식 웃었다.
“곰 속에 여우가 들어가 있군.”
이와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는 건 자신의 방문 목적 역시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의미.
그런데도 의뭉스럽게 시치미를 뗐던 것이다.
“그럼 차나 마저 마시며 기다리도록 하지.”
한 시진 후.
계단 아래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 것은 다섯 번의 차를 우려내 이제는 찻물이 말갛게 우러날 정도가 돼서였다.
사 층에 도착한 사내가 초악량을 향해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흑점의 무명 소졸이 혈수존자를 뵙습니다.”
초악량이 희미한 웃음을 말아 올렸다.
비록 무공은 자신과 견줄 바가 못 되었으나 눈빛이나 분위기는 결코 무명 소졸의 느낌이 아니었다.
“자네는 누군가?”
의외로 사내는 선선히 대답했다.
“저는 이서라 하옵고, 제 위로는 오직 점주님만이 계실 뿐입니다.”
“이제 보니 흑점의 부점주셨군?”
“본 점은 그와 같은 직책이 없지만 비슷하다 보시면 됩니다.”
이서라 자신을 소개한 그가 엽단영을 향해 미소를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지부장.”
그것이 완곡한 축객령임을 모를 만큼 눈치 없는 엽단영이 아니었다.
“별말씀을요. 그럼 대화 나누십시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려는 찰나.
그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자네 어디 가나?”
“예?”
반문하는 엽단영을 향해 초악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가 가면 내 차는 누가 우려 준단 말인가?”
이서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미흡하나마 저 또한 다도에 일가견이 있습니다. 부족한 대로 제가 존자께 차를 올리도록 하지요.”
초악량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흡하시다니 되었네. 난 그가 타 주는 차를 계속 마시도록 하지.”
상황이 이리되자 엽단영의 입장이 매우 곤란해졌다.
그러나 결국 이서가 양보를 했다.
“지부장의 다도 실력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뛰어나신 모양이군요. 천하의 혈수존자께서도 인정한 그 실력, 언젠가 저도 가르침을 받아야겠습니다.”
엽단영의 눈에 언뜻 피곤한 기색이 스쳤다 사라졌다.
구밀복검(口蜜腹劍), 소리장도(笑裏藏刀).
부드러운 혀와 온화한 미소 너머로 도사리고 있는 검과 칼은 세상의 그 어떤 무기보다 예리하고 무섭다는 것을 그간의 삶을 통해 일찍 깨달은 그였다.
그래서 못내 이 상황이 불편했다.
그런데 초악량은 거기에 한술 더 떠 자신을 더욱 위태로운 절벽으로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흑점의 뜻은 내 알겠네.”
의아해하던 이서가 이어진 초악량의 말에 복잡한 미소를 내보였다.
“아니, 점주의 의중을 이해했다 치지.”
“그러하시다니 이야기를 꺼내기가 좀 더 수월하겠군요.”
이서가 웃으며 품속에서 서류를 꺼냈다.
“원하시던 노단양의 정보들입니다.”
서류를 건네던 이서의 눈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정작 이를 요구했던 초악량이 서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모호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초악량이 느긋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난 이곳 지부장이 무척 마음에 든다네.”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이서가 곤혹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 지부보다는 본단에 더 많은 눈과 귀가 있습니다.”
“영민한 사람이 왜 갑자기 아둔한 척하는 겐가?”
“……!”
“내가 택한 건 저 사람이라는 말일세.”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이서와 달리 엽단영은 순간 가슴이 벅차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자리를 통해 줄 끊어진 연 신세가 되리라 생각했건만, 반대로 범계위만큼 튼튼한 동아줄이 눈앞에 드리워진 것이다.
“그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무위와 이미 깊은 인연을 맺고 있네. 지금까지 무척 잘해 주기도 했고. 그래서 굳이 다른 사람을 통해 거래를 이어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네. 저자가 없다? 그러면 흑점과 우리의 관계도 끝나는 걸세.”
그 말을 끝으로 초악량은 말없이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일 뿐이었다.
선택을 강요하는 초악량의 태도에 이서가 한숨을 흘렸다.
“거절하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초악량이 희미하게 웃었다.
“쓸데없는 고집으로 저 이를 곤란하게 할 수는 없지.”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던 이서의 표정이 이어진 초악량의 말에 쓰디쓴 소태를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별수 있나? 우리의 인연도 여기까지인 게지.”
대놓고 늘어놓는 협박에도 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그 말을 한 사람이 천하오절 중 한 명인 권절(拳絶), 혈수존자 초악량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겠습니다. 본 점과의 관계를 위해 많은 부분을 양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초악량이 웃으며 엽단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는군.”
엽단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쓴웃음만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대놓고 기뻐하자니 상급자인 이서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수하 앞에서 망신을 당했음에도 이서는 태연한 신색을 회복한 뒤였다.
그런 그에게 초악량이 미소를 건넸다.
“그래도 예까지 온 사람을 빈손으로 보내는 것도 뭐하니 선물 하나를 주지.”
“선물 말입니까?”
그 순간 이서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걸 어떻게!”
초악량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정도 위치에 오래 있다 보면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들려오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는 법이거든.”
그제야 엽단영은 초악량이 이서에게 전음을 날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호기심이 꾸역꾸역 솟구쳤지만 혼신의 인내심을 발휘해 애써 억눌렀다.
자고로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
오래 살기 위해서는 명의도 보약도 필요 없었다.
호기심과 과욕만 삼가면 되는 것이다.
“어떤가? 참고로 나는 그것을 혼자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일세. 이 정도면 그대들의 주인에게 충분한 선물이 되겠는가?”
신음을 흘리던 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주님께서도 존자의 호의에 감사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럼 전 이만…….”
정중하게 예의를 갖춘 이서가 떠나기 직전 엽단영을 향해 복잡한 눈빛을 던졌다.
이윽고 이서가 계단을 내려가 완전히 사라지자 엽단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신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흑점을 믿지 않으니까.”
방금 전까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초악량이었건만 지금은 차디찬 눈빛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거래를 해야지. 본단은 자네보다 훨씬 욕심을 부릴 테고, 자네는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해 줄 거라 생각하네.”
급변한 초악량의 분위기에 엽단영은 가슴이 싸해졌다.
“이로써 나는 자네에게 나름 성의를 보인 것 같네만.”
엽단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내게는 잘된 일이다.’
이제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때였다.
“북방 혈운사가 출몰하는 지역에서 칠절마군을 보았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혈운사?”
“최근 변황오세 세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엽단영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초악량의 표정도 심각하게 변해 갔다.
“서로를 경원시하며 물과 기름 같던 자들인데, 그들이 서로 연합이라도 했다는 건가?”
“어디까지나 정황상일 뿐이지만……. 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 배경이나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 중이지만 이전까지의 반목과 경쟁 구도를 벗어나 교류가 빈번해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으음…….”
초악량이 침음성을 흘렸다.
무언가 일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었다.
“더 자세한 보고를 원하신다면 정보를 가져온 조사원들을 대기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초악량이 신형을 일으켰다.
“내가 직접 알아보지.”
* * *
무위와 한참 떨어진 무량산의 계곡.
길도 나 있지 않은 험한 비탈을 아슬하게 내달리는 인영이 있었다.
영화당의 주인인 감곡이었다.
캄캄한 사위를 뚫고 오직 달빛에 의지해 달리기를 한참.
‘이쯤이면 숨 좀 돌릴 수 있겠군.’
거친 숨을 몰아쉬던 감곡이 안도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길. 어쩌다 이리 꼬인 것인지.”
놀랍게도 누군가 그 말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은 선택이 중요하지.”
“……!”
화들짝 놀란 감곡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눈앞의 바위에서 천천히 신형을 일으키는 그림자가 있었다.
“수전귀야!”
사무심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나눠야 할 대화가 무척 많은 것 같네만.”
“…….”
“다행히 밤은 기니 걱정 말게. 예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테지만 슬슬 돌아가세. 순순히 협조한다면 내 최대한 친절을 베풀도록 하지.”
“망할!”
짧은 욕설과 함께 감곡이 사무심을 향해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그의 양손에는 어느새 핏빛 감도는 짧은 비수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비수 위로 어른거리는 아지랑이를 목도한 사무심의 눈 위로 이채가 떠올랐다.
비록 초입이었지만 무형의 진기를 유형화할 수 있는 이기생형(理氣生形)의 경지라니.
무공을 숨기고 있다고는 짐작했지만 그 실력이 상당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상대가 되기엔 부족했다.
카앙!
차가운 금속성이 계곡에 울려 퍼졌다.
“당신?”
감곡의 입에서 당혹성이 새어 나온 것도 동시였다.
너무나 수월하게 비수를 막아 낸 한 자루 철척(鐵尺)!
거기서 시작된 육중한 충격에 손목이 저릿할 정도였다.
“무위에는 괴물들만 사는 것인가…….”
그가 알던 사무심의 무위와 눈앞의 사무심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사무심이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자네에게는 굳이 친절을 베풀 이유가 없을 것 같군.”
사무심의 철척이 어지럽게 움직인 것도 그때였다.
감곡이 급히 비수를 휘둘러 공격에 대비했지만 이미 기세를 내어 준 상황.
더구나 내력에서 한참 밀려 오래 버티지 못했다.
우드득.
“크아악!”
섬뜩한 골절음과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챙그랑.
비수를 떨어트린 감곡이 어깨를 움켜쥐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몇 걸음 채 옮기기도 전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콰득.
“끄아!”
어둠을 틈타 소리 없이 날아든 철척이 발목뼈를 으스러트렸기 때문이다.
“자, 잠깐!”
다가서는 사무심을 향해 감곡이 황망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사무심은 인자하게 웃으며 감곡의 다른 팔과 다리도 차례대로 부러트렸다.
“기대해도 좋네.”
감곡의 뒷덜미를 움켜쥔 사무심이 그를 질질 끌고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곡주님을 노린 죗값, 달게 받으시게.”
“……!”
마혈과 아혈이 짚어져 한마디도 벙긋하지 못한 채 감곡은 그렇게 무력하게 끌려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지금은 발길이 끊겨 낡고 오래된 폐사당이었다.
부서진 악비의 신상.
그 아래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곡주님께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능소밀의 물음에 사무심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결과만 알려 드리는 걸로 하지. 그분께 번뇌를 안겨 드릴 필요는 없으니.”
고개를 끄덕인 능소밀이 품속에서 커다란 나무못과 망치를 꺼냈다.
“하긴, 이런 걸 보실 필요는 없지요.”
따앙! 따앙!
사지를 뚫고 들어와 벽에 결박하는 목전(木栓).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감곡은 목구멍 안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쏟아 낼 수조차 없었다.
이미 사람들에게 잊힌 악왕묘(岳王廟).
악당들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