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09)
신마의선-209화(209/500)
신마의선 (209)
인적이 끊긴 야심한 밤.
근처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구릉에 야영지가 차려졌다.
신마상단 광동 지부의 상단원들과 벽화령 일행은 중앙의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둘러앉아 늦은 식사를 시작했다.
상단을 이끄는 행수, 관정의 표정은 몹시 무거웠다.
녹림과의 유혈 사태로 인해 걱정이 많아진 탓이다.
씹고 있던 건량이 유독 퍽퍽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 터.
다른 상단원들의 분위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가득 근심을 끌어안은 채 묵묵히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반면 벽화령은 며칠 전의 일은 기억에서 지워 버린 듯,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 갔다.
“부문주님.”
벽화령을 수행하던 해남검파의 무인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선 것도 그때였다.
벽화령과 시선이 마주치자 무뚝뚝한 표정의 사내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길을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벽화령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더니 짧게 혀를 찼다.
“버텨, 이 자식아.”
벽화령이 품속에서 작은 자기 병을 꺼내더니 뚜껑을 열어 손바닥 위에 기울였다.
“이것도 얼마 안 남았네.”
두 알밖에 남지 않은 치상단을 확인한 벽화령이 그중 하나를 관 속에 누워 있던 사내의 입으로 넣었다.
손가락으로 천돌혈 부근을 두드리자 관속의 사내가 알약을 삼켰다.
밀랍을 덧씌운 것처럼 창백하던 사내의 얼굴 위로 잠시나마 혈색이 돌아왔다.
이를 주시하던 벽화령의 눈 위로 잠시 섬뜩한 안광이 떠올랐다.
“속 편하지? 그래, 지금의 여유를 실컷 만끽해 둬.”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린 벽화령이 다시 모닥불 곁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관계이길래?’
관 속의 사내 때문에 단악선을 찾아가는 것이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데 그를 향한 벽화령의 눈빛은 노골적인 살기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그를 살리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궁금증을 자아냈다.
하나 이미 앞서 그녀가 언급하기를 거부했기에 함부로 캐물을 수도 없었다.
벽화령이 다시 자리를 잡자 관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귀하신 분을 이렇게 노숙을 하시게 만들어 그저 죄송할 뿐입니다.”
벽화령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늘 있는 일이라 익숙하니까.”
미쳐 날뛰는 파도를 따라 요동치는 배.
그 안에서도 잘만 자던 그녀였다.
이런 평지에서의 야영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안락하고 평온한 것이다.
소탈한 벽화령의 대답에 관정을 비롯한 신마상단의 상단원들이 슬쩍 웃으며 호감을 내비쳤다.
듣던 소문과 달리 벽화령은 권위적이지도 않았고, 격의 없는 태도 역시 상대의 호의를 끌어냈다.
“무서운 분이라고만 들었는데,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나 봅니다. 이리 아름답고 심성도 고운 분이신데…….”
관정이 멈칫하며 말끝을 흐렸다.
문득 며칠 전 거리낌 없이 녹림도를 주살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같은 편일 때나 좋지, 적으로 만난다면 그보다 끔찍한 악몽도 없었다.
그러나 이를 알 리 없는 벽화령은 모닥불을 응시하며 가만히 한숨을 흘렸다.
“하아. 그럼 뭐 해? 정작 봐 줬으면 하는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이 채 갔는걸.”
처연한 그녀의 눈빛에 관정은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연심을 품은 사내가 부럽기도 했다.
미인에, 무공도 강하고 해남검파의 부문주라는 배경까지.
대체 어떤 복을 타고났기에 어느 것 하나 모자람 없는 그녀가 이토록 목을 매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 관정의 눈빛을 뒤로한 채 벽화령이 타다 만 나뭇가지를 들어 괜히 애꿎은 모닥불을 뒤적였다.
그러기를 잠시.
무릎을 끌어안은 채 복잡한 눈빛을 흘리던 벽화령이 불쑥 입을 열었다.
“설화 언니와 범 오라버니는……. 여전히 잘 지내?”
관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들이야 항상 무탈하시죠. 저 역시 몇 번 뵙진 못했지만 그때마다 항상 같이 계시더군요. 단 의원님 곁에서 떨어지질 않으시죠.”
“항상……. 같이?”
“듣자니 따로 떨어져 행동하시는 경우가 드물다 하더군요.”
“그래……. 여전히 사이좋은가 보구나, 두 사람은.”
관정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과연 그게 사이좋다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적어도 그가 봤을 때는 늘 티격태격하고 있던 두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 관정이 자세한 설명을 하려 할 때였다.
“안 돼! 벽화령! 정신 차려!”
갑자기 벽화령이 벌떡 일어나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오라버니가 그저 행복하길 바라야 하거늘.”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벽화령이 한숨을 내쉬며 쓰게 웃었다.
“내일은 마을에 들러 두 분을 위한 선물이라도 사야겠어.”
잠시 나쁜 생각을 떠올린 자신을 스스로 꾸짖은 벽화령이 슬프게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위로하듯 뺨을 어루만지는 창백한 달빛이 오늘따라 유독 외롭게 느껴졌다.
* * *
“으으…….”
침상에 누워 뒤척대던 범계위가 신음을 흘렸다.
―내 말 명심해.
언제부터인가 끊임없이 귓속을 맴도는 목소리.
―죽는 거야, 전부 다.
“아, 쫌!”
범계위가 벌떡 일어나 침상에서 내려왔다.
아무리 머릿속에서 지워 내려 해도 떨쳐 낼 수 없는 벽화령의 음성.
그 때문에 며칠째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찻주전자를 들어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켠 범계위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초 형은 이럴 때 어딜 간 거야?”
문득 초악량의 빈자리가 절실해졌다.
물론 초악량이라 해서 특단의 대책을 내놓을 수 없으리란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혼자만 고민하며 전전긍긍하는 상황이 억울할 뿐이었다.
그나마 초악량이라도 있었다면 고민하는 그의 모습에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을지도 모르는 일.
지금도 속 편하게 강호 어딘가를 빨빨거리며 누비고 다닐 초악량을 생각하니 더 열불이 치밀었다.
“어우…….”
오늘도 잠자기는 글렀다 생각한 범계위가 처소를 나섰다.
그리고 그대로 처마 위에 거꾸로 매달려 팔짱을 꼈다.
그렇게라도 시끄러운 속을 달래고 싶었던 것이다.
“미치겠네.”
범계위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어쩌지?”
그렇게 한참을 고심하고 있던 때였다.
“어? 아저씨, 왜 그러고 계세요?”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범계위가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인지 곁에 서 있는 단악선과 한설화를 발견한 범계위가 깜짝 놀랐다.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는지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서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응? 아,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이러면 머리가 잘 돌아가거든.”
그 말에 한설화가 피식했다.
“돌아갈 머리는 있고?”
“뭐?”
발끈하던 범계위가 솟구치는 화를 애써 억눌렀다.
걱정 가득한 단악선의 눈빛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혹시 제가 놓친 것이 있나요?”
“어?”
의아해하는 범계위를 향해 단악선이 걱정 가득한 눈빛을 건넸다.
“며칠 전부터 이상했어요. 잠도 통 못 주무시는 것 같고……. 혹시 증상이 악화되신 건가요?”
처마에서 내려온 범계위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냐, 단 의원. 그런 거 아냐. 그저…….”
“그저?”
“초 형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
변명거리를 찾던 범계위가 떠오르는 대로 황급히 변명했다.
단악선이 빙그레 웃었다.
“역시 그렇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진맥만 한번 해 볼게요.”
잠시 범계위의 맥을 짚던 단악선이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몸에 이상은 없네요.”
심장이 살짝 빠르게 뛰고 진기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감도 없진 않았지만 일반적인 범주 내였다.
“너무 걱정 마세요. 초 아저씨는 무사하실 테니까요.”
“그래야지. 나만 죽을 수는 없으니까.”
“예?”
범계위가 황급히 웃으며 얼버무렸다.
“하하, 아무것도 아냐, 밤이 깊었으니 단 의원도 그만 들어가 쉬어.”
“아저씨도 너무 심려치 마세요. 초 아저씨도 곧 무사히 돌아오실 테니까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범계위를 한설화가 지그시 응시했다.
분명 뭔가 감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느니 괜히 더 기분이 언짢았다.
멀어지는 단악선을 향해 손을 흔들던 범계위는 몇 번이고 자신을 돌아보는 한설화의 눈빛에 괜히 찔끔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초악량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 누이가 이 일을 알면 어찌 될 것 같으냐?
범계위가 한 차례 몸을 떨었다.
“제길.”
단악선과 한설화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범계위의 눈 위로 결연한 각오가 떠올랐다.
지금 이렇게 고민하는 순간에도 벽화령은 이곳을 향해 오고 있었다.
“무위에 들어오기 전에 어떻게든 막아야 해.”
그렇게 결론을 내린 범계위가 그대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 범계위의 신형이 한 곳을 향해 쏘아졌다.
* * *
“부문주님,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무위가 얼마 남지 않은 산속.
자신을 수행하던 수하의 다급한 보고에 벽화령이 황급히 관으로 다가섰다.
관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내.
푸른 핏줄이 두드러진 얼굴은 말할 것도 없었고 온몸은 불덩이처럼 끓어 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용태가 급변하더니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길어야 몇 시진입니다.”
이어진 수하의 말에 벽화령의 얼굴에도 초조함이 떠올랐다.
“남은 치상단은?”
“오늘 아침에 사용한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지. 업어라.”
주화입마의 상태인지라 흔들리는 건 가급적 피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를 수행하던 해남검파의 무인이 주화입마에 빠진 환자를 둘러업었다.
그렇게 막 그들이 신형을 날리려던 찰나.
벽화령이 멈칫하며 수하들을 제지했다.
스릉.
벽화령이 끌어안고 있던 검이 나신을 드러낸 것도 그때였다.
지그시 한 곳을 노려보던 벽화령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만 나오지?”
“하하, 역시 벽 소저요.”
저 멀리 이어진 소로 너머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벽화령이 아미를 찡그렸다. 누가 봐도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무슨 염치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서로 간에 오해가 있는 듯하여 왔소.”
웃으며 벽화령에게 다가선 사내.
그는 바로 녹림의 총표파자인 악호군이었다.
벽화령이 피식 실소하며 악호군을 노려봤다.
“오해는 개뿔.”
벽화령이 검을 들어 악호군을 가리켰다.
“꺼져.”
살기등등한 그녀의 모습에 악호군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
“그런데 왜 수하들을 사방에 숨겨 둔 것이지?”
“숨겨 두다니? 그 또한 오해요.”
“오해?”
“저들은 소저를 상대하기 위해 데려온 것이 아니오. 오히려 소저를 보호하기 위해서지.”
“누가 누굴 보호해? 당신이 나를?”
벽화령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피식거렸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악호군이 다가섰다.
서로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벽화령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 갔다.
“꺼지라고 했을 텐데?”
악호군이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우리 사이의 오해를 먼저 풀었으면 좋겠소만. 싸우자는 게 아니라 대화를 하자는 것이오.”
“이건 누가 봐도 싸우자는 거잖아?”
“싸운다라…….”
악호군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말아 올렸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동등한 상대끼리 부딪쳤을 때 해당하는 말 아니겠소?”
악호군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이 날 이길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