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10)
신마의선-210화(210/500)
신마의선 (210)
벽화령이 내심 침음했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아무리 그녀의 무위가 뛰어나다 한들 눈앞의 사내는 지금은 강호사사가 된 십대악인 중에서도 상위를 차지한 고수였다.
그들 중 초악량을 제외하면 그와 견줄 만한 수준의 고수는 그나마 범계위 정도.
하나 그런 범계위조차 단 한 번도 악호군을 상대로 승리한 적이 없다 들었다.
무림의 호사가들이 십대악인 중 초악량 다음으로 악호군을 꼽길 주저하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음험하고 교활한 성격은 둘째 치고 무공만큼은 강호 전체를 통틀어 손꼽히는 고수가 바로 악호군이었다.
그래도 벽화령은 물러설 수 없었다.
평생 수적을 때려잡아 온 그녀였다.
고작 산적 따위의 말에 휘둘린다면 지금껏 살아온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넌 항상 이길 수 있는 상대하고만 싸우는 모양이지?”
벽화령의 비아냥에 악호군이 타이르듯 말했다.
“이토록 간곡히 청하건만 꼭 험한 길을 택해야겠소?”
벽화령이 싸늘하게 응수했다.
“도적 따위와 타협하느니 혀를 깨물고 죽겠다.”
“해남검파의 부문주가 바다도 아닌, 이런 궁벽한 야산에서 죽는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텐데?”
“괜찮아. 누군가 나를 대신해 복수해 주겠지, 뭐.”
망설임 없이 살기를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에 악호군이 빙그레 웃었다.
“역시 매력적이군. 어떻소? 이것도 인연인데 다시금 서로 화합을 도모해 보는 것이?”
세월이 무색하게 변함없는 미모도 미모였지만 그런 그녀의 성격이 더욱 마음에 드는 악호군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차디찬 냉소뿐이었다.
“뭐래? 산 도적 따위가.”
그 말과 함께 벽화령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렸다.
눈앞으로 짓쳐들어오는 예리한 검기를 마주한 악호군은 단지 고개를 젖히는 것만으로 가볍게 피해 버렸다.
하나 그 순간.
더욱 거리를 좁힌 벽화령이 어지럽게 검을 휘둘렀다.
일대를 휩쓸며 일거에 몸집을 불린 희뿌연 검광이 순식간에 악호군을 에워쌌다.
검광의 운무 사이로 한 줄기 섬광이 번뜩인 것도 그때였다.
서늘한 살기를 머금은 검기의 파도가 그대로 악호군을 집어삼켰다.
해남검파의 절학.
남해삼식육검의 비장 절초인 창파노도(滄波怒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순식간에 피어오른 가공할 검기 다발.
거칠게 쇄도하는 검기의 파도를 마주한 악호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콰콰콰쾅!
악호군과 벽화령 사이에서 연거푸 폭음이 터져 나왔다.
벽화령의 화려한 공격과 달리 악호군은 연신 뒤로 물러서며 아무렇게나 발길질을 해 댈 뿐이었다.
그가 자랑하는 비각술(飛脚術)인 봉명퇴(鳳鳴腿)였다.
이렇다 할 현묘한 초식도, 무서운 위력이 담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 간단한 동작에 검기의 파도는 맥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순간 악호군의 신형이 와해된 검기의 틈을 비집고 파고들었다.
“치잇!”
벽화령이 이를 악물며 물러서는 순간.
악호군의 신형이 유령처럼 흔들리며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콰르르.
악호군이 걷어 올린 발끝을 따라 육중한 경력이 산처럼 일어난 것도 그때였다.
거대한 산맥이 해일을 막듯, 거대한 경력의 소용돌이가 검기의 파도를 잠식해 나갔다.
그러다 종국에는 전면을 아우른 창파노도를 압도하며 일대를 찍어 눌렀다.
꽈앙!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며 미쳐 날뛰던 검기의 파도가 환상처럼 스러졌다.
“……!”
그 광경에 벽화령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악호군의 무위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당황한 사이 악호군의 신형이 어느새 코앞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벽화령이 또다시 물러서며 검을 휘둘렀다.
이때 악호군의 신형이 환영처럼 흔들리며 섬뜩한 궤적이 옆구리를 향해 파고들었다.
벽화령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설픈 대응으로 인해 오히려 상황만 나빠진 것이다.
벽화령이 이를 악물어 충격에 대비했다.
팍.
그런데 마지막 순간 사납던 기세가 줄어들며 가볍게 떠밀 듯 벽화령을 밀어냈다.
다시금 거리를 둔 악호군이 슬쩍 웃었다.
“이 정도면 나름 많이 양보해 드린 것 같소만?”
“…….”
“이제 그만합시다. 난 소저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소.”
“그렇게 부르지 마! 소름 돋으니까!”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벽화령의 가슴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설마 그와의 무위 격차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더 화가 나는 건 악호군은 아직까지 여유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의 성명병기인 박도는 아직도 허리춤에 매달린 채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로소 벽화령은 악호군을 다시 평가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악호군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유일한 무승부는 오직 형산파 장문인과의 일전뿐.
물론 그가 싸운 상대 중에 천하오절급의 고수는 전무했지만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는 종사 반열의 고수로 인정받기에 충분했다.
‘어쩌지?’
벽화령의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주화입마에 빠진 환자를 무위로 데려가야 했다.
한데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악호군을 떨쳐 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편 악호군도 그 나름대로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까지 벽화령이 강경하게 나올 줄은 예상치 못한 것이다.
압도적인 무위 차를 겪게 하면 어느 정도 기가 꺾이리라 예상했건만, 이건 웬걸.
불구대천의 원수를 마주한 것 같은 그녀의 눈빛은 그조차도 기가 질릴 정도였다.
‘별수 없나.’
한시가 급한 벽화령과 달리 악호군은 여유가 있었다.
‘일단은 확실하게 제압부터.’
설득과 회유는 그다음이었다.
악호군의 눈빛과 분위기가 한순간에 돌변했다.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는 악호군의 기도에 벽화령이 침음했다.
악호군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도 그때였다.
“……!”
긴장과 당혹감이 만들어 낸 순간의 실수.
그 찰나의 방심이 호흡의 경계를 고스란히 내어 주고 말았다.
벽화령은 자신의 명치 부근을 향해 날아드는 경력을 느꼈다.
하지만 물러설 수도 없었다.
자신이 피해 버리면 그 뒤로 자신을 수행하는 수하들이 그 경력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역시 그리 호락호락 당할 인물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중 한 명이 업고 있는 환자였다.
가뜩이나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 정도 경력에 휩쓸린다면 그대로 숨이 끊어질 것이 자명했다.
벽화령이 이를 악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쿠웅.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거대한 벽이 눈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전면을 아우른 가공할 경력이 일대 전체를 그 지배력 아래 두며 쇄도해 오고 있었다.
그 순간.
콰르르.
말로 설명하기 힘든 지독한 열기가 일대를 집어삼키나 싶더니.
한순간 공간이 뒤틀리며 악호군의 경력이 크게 출렁였다.
그리고 마치 거대한 무저갱 속으로 빨려 들 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누가 감히 우리 화령이를 건드려?”
난데없이 들려온 한 사람의 음성에 벽화령의 심장이 덜컹했다.
“범 가가?”
범계위가 뒤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잘 지냈어?”
그 웃음을 마주하는 순간.
“……!”
떨어졌던 벽화령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 위로는 어느새 타오르는 듯한 붉은 노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우리…… 화령이?’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머릿속에서 연신 폭죽이 터지는 벽화령이었다.
“오라버니, 여긴 어떻게?”
꿈을 꾸는 듯한 벽화령의 눈빛에 범계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든 그녀를 달래서 돌려보내야 하는 입장.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눈빛과 표정으로 그녀를 대했다.
“우리 화령이 마중 나왔지.”
“아아!”
“그 전에 저 귀찮은 놈부터 치우고 이야기할까?”
범계위가 고개를 돌려 악호군을 노려봤다.
“안 그래도 만나려고 했는데 잘됐군.”
범계위가 히죽 웃었다,
“우리 사이의 악연을 정리할 때가 되었지?”
“감히 너 따위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악호군이 으르렁댔다.
반면 범계위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악호군을 도발했다.
“맨날 도망만 다니던 놈이 입만 살아서는.”
악호군의 검미가 꿈틀했다.
자칫 오해 사기 좋은 말이었다.
“왜곡이 심하군. 광증이 도지다 못해 아예 미쳐 버린 거냐?”
그 말에 범계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지? 광증이 도지면 기억이 흐릿해지는데, 네가 꽁무니 빼던 광경만큼은 선명하거든.”
“닥쳐! 이 대머리 새끼야!”
“그래. 곧 뒈질 놈이니 그 정도 욕은 받아 준다. 대신 저승길 노잣돈은 없어.”
“날 적대하면 앞으로 신마상단은 중원에서 발을 붙일 곳이 없을 텐데?”
“어쩌라고.”
“뭐?”
“다 쓸어버리면 그만이야. 그 전에 너부터 죽이고.”
“우리 녹림 전체를 적으로 돌리겠다고?”
범계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말귀를 좀 알아듣네.”
범계위가 성큼 걸음을 내디뎌 악호군에게 다가섰다.
“이제 시작하지?”
“…….”
악호군이 침음했다.
꼬리에 불붙은 멧돼지처럼 천지 구분 못 하는 얼간이를 상대하는 것만큼 곤욕스러운 일도 없었다.
‘여기서 저놈을 이겨도 문제다.’
놈의 뒤에 버티고 있는 초악량과 한설화의 존재를 경시할 수 없었다.
아군으로 삼는 것도 모자른데 적으로 돌리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놈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녹림 전체를 위해 한 번은 자존심을 꺾어야 하는 상황.
“지금의 상황을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나?”
“뭐래? 갑자기.”
의아해하는 범계위를 향해 악호군이 말을 이어 갔다.
“너희가 데리고 있는 진영산이 마공을 익히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겠지?”
“그런데?”
“너무 공교롭지 않나? 어째서 하나같이 마공을 익힌 자들이 무위로 흘러 들어가는 걸까?”
악호군이 손을 들어 벽화령 쪽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해남검파의 무인이 둘러업은 환자를 가리킨 것이다.
그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린 범계위의 눈에도 의아함이 떠올랐다.
“어? 왜 저놈에게서 마기가 느껴지지? 게다가…….”
범계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놈도 주화입마네?”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한 범계위를 향해 악호군이 입을 열었다.
“내게는 너희에게 없는 것이 있다.”
범계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뭔데?
“정보다.”
“정보?”
“그래. 그리고 내게는 없는 것이 너희에게는 있지. 그게 우리가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다.”
범계위가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싫은데?”
“뭐?”
“너처럼 허약하고 뒤통수치기 좋아하는 놈을 뭘 믿고. 그냥 여기서 귀찮은 짐 하나 치우고 말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범계위의 태도에 악호군이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당금의 강호를 둘러싸고 있는 암중의 세력에 대해…….”
“뭐라는 거야?”
귀찮은 표정으로 귀를 후비적거리는 범계위의 모습에 악호군은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눈앞의 멍청이를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악호군이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혈수존자는 어디 있지? 그와 이야기를 해 보겠다.”
적어도 초악량이라면 대화가 통할 터.
한데 눈앞의 얼간이는 가소롭다는 듯이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아서라. 예전의 그 초 형이 아니거든?”
“뭐?”
“약해진 초 형이라면 어떻게 싸워 볼 만하겠다 싶었나 봐? 근데 어쩌나. 초 형 다 나았어. 아니, 오히려 더 세졌을걸? 너 같은 건 상대도 안 돼.”
“그게 아니라…….”
악호군도 더 이상은 속이 뒤집어져 범계위와 대화를 이어 갈 수 없었다.
“그래. 오늘 날 잡자.”
스릉.
허리춤으로 가져간 악호군의 손을 따라 투박한 형태의 박도(朴刀)가 모습을 드러냈다.
벽화령과는 달리 범계위는 그조차 무시할 수 없는 고수.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였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범계위가 히죽 웃으며 신형을 뽑아 올리더니 그대로 악호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악호군 역시 칼을 휘두르며 범계위를 향해 마주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