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13)
신마의선-213화(213/500)
신마의선 (213)
“뭐?”
한설화는 일순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벽화령에게 의혹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돌아온 건 차가운 눈빛과 날 선 음성이 전부였다.
“보자 보자 하니 정말 너무하시네요! 누구 마음대로 우리 범 가가를 찢어 죽여요?”
“……!”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혀 한설화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한설화와 벽화령을 번갈아 바라보던 범계위가 벽화령 뒤쪽으로 슬쩍 자리를 옮긴 것도 그때였다.
기다렸다는 듯 벽화령이 범계위의 팔을 끌어안았다.
“가요. 범 가가.”
“어? 어? 그, 그래.”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범계위가 벽화령을 따라 장내를 벗어났다.
황당함에 사로잡혀 우두커니 서 있던 한설화가 제정신을 차린 것도 그때였다.
“어딜!”
범계위를 쫓아 신형을 날리려던 한설화가 멈칫했다.
자신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흔드는 단악선 때문이었다.
“정말 범 아저씨를…… 죽이실 건 아니죠?”
“…….”
“아닐 거예요. 그렇죠?”
우려가 가득 담긴 단악선의 눈빛에 한설화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당연하지. 그러니 안심해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란다.”
한설화의 시선이 범계위가 사라진 곳을 향했다.
‘당장에는 말이지.’
그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그저 속으로 삼키고 마는 한설화였다.
한편 단둘이 있게 되자 범계위는 새삼 눈앞의 벽화령이 불편해졌다.
그래도 지은 죄가 있어 감히 팔짱 낀 그녀의 손을 풀지 못한 채 그저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던 벽화령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벽화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한 언니와 혼약을 했다고 거짓말을 할 정도로?”
“그, 그게…….”
당황한 범계위가 말을 잇지 못하자 벽화령이 재차 물었다.
“이번에는 솔직히 말해 주세요. 제가 그렇게 싫다면 깨끗이 포기해 드릴 테니까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범계위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너와 했던 내기 말이야.”
“……?”
“사실 내가 이겼어.”
“내기요?”
“그래. 오 년 안에 정인을 만들겠다던 내기.”
당혹감과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하는 벽화령을 향해 범계위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민소린 알지? 운남 조형방주의 딸.”
“……설마?”
범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걔랑 사귀었어. 뭐, 결국에는 혼인 직전에 헤어졌지만 말이야.”
사실을 털어놓은 범계위가 벽화령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그녀 성격상 절대 그냥 넘어갈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러니까……. 민소린 그 불여우가 범 가가를 꼬드겼다는 건가요?”
“어? 아니, 걔가 일방적으로 날 꼬신 게 아니라…….”
“어쨌거나 그 계집애랑 혼인까지 생각했었다는 거잖아요, 지금.”
분을 참지 못해 부들부들 떠는 벽화령의 모습에 범계위의 얼굴이 또다시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러기를 잠시.
한 차례 길게 한숨을 내쉰 벽화령이 복잡한 눈빛으로 범계위를 응시했다.
“그것 때문에 절 불편해했던 건가요? 소린이가 내 친구라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범계위를 향해 벽화령이 다시 물었다.
“그럼 단 한 번도 저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는 않으셨나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범계위가 망설이는 사이 벽화령이 말했다.
“만약 제가 그 일을 묻어 둔다면요?”
“정말? 그럴 수 있겠어?”
반신반의하는 범계위의 모습에 벽화령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복잡한 감정이 그대로 담긴, 그런 미소였다.
“그 일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도 묻어 둘게요. 그러니 범 가가는 오직 저에 대해서만 생각해 주세요. 그래야 범 가가의 진심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
“단 한 번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 주세요. 적어도 제게 그 정도 자격은 있다고 생각해요.”
범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그녀가 자신에게 쏟은 세월과 노력만큼은 아무리 그라 해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럼 제가 해남도로 돌아가기 전까지 답을 주세요.”
그렇게 말한 벽화령이 범계위의 팔을 놓으며 물러섰다.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벽화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범계위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런데…….”
“……?”
의아한 얼굴로 돌아서는 벽화령을 향해 범계위가 잠시 망설였다.
“널 싫어한 적은 없어.”
범계위가 건넨 그 말에 벽화령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알아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벽화령의 모습.
이를 마주한 범계위는 묘한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 모습이 예쁘게 보였기 때문이다.
홀로 처소로 향하던 벽화령은 멀리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한설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 나도 알아야 할 것 같은데.”
한설화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한 벽화령이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건넸다.
“절 떼어 내기 위해 거짓말을 했나 봐요.”
벽화령이 범계위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설명하자 한설화의 전신에서 다시 한 번 자욱한 살기가 흘러내렸다.
“고작 그따위 이유로 내 이름을 팔아?”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한설화의 눈빛이 딱 그러했다.
그런 한설화를 벽화령이 조용히 불렀다.
“언니.”
벽화령이 한설화를 향해 부탁했다.
“이번 일은 제 얼굴을 봐서 넘어가 주실 수 없나요? 범 가가에게 시간을 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한설화는 내심 기가 막혔다.
인물이면 인물, 배경이면 배경.
어느 것 하나 아쉬울 게 없는 그녀가 왜 범계위에게 목을 매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그 대머리 고자의 어디가 그렇게 좋다는 거야?”
“네? 대머리…… 뭐요?”
해연히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벽화령의 모습에 한설화는 뒤늦게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벽화령의 눈빛이 이내 싸늘해졌다.
“언니, 아무리 화가 나셔도 그렇지, 그 말은 너무하셨어요.”
한설화가 당황한 사이 벽화령이 말을 이어 갔다.
“누구보다 사내다운 범 가가가 그럴 리 없잖아요.”
한설화가 사실을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벽화령이 빙긋 웃었다.
“그걸로 묵은 빚은 청산하는 걸로 해요.”
“뭐?”
“언니도 실수하셨으니 범 가가의 잘못은 넘어가 주세요.”
이미 마음은 꽃밭에 가 있는 벽화령의 눈빛에 한설화는 아무리 사실을 이야기한들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순간에도 너는 그 자식, 아니 범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냐?”
“그게 제가 범 가가를 사랑하는 방식이니까요.”
이어진 벽화령의 말에 한설화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떻게 사람이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겠어요? 그 어떤 말도 범 가가를 향한 제 마음을 흔들 수는 없어요.”
“정말……. 그 어떤 악조건도 상관없다고?”
여전히 의구심을 지워 내지 못하는 한설화를 향해 벽화령이 자신감을 드러냈다.
“네. 전 범 가가 그 자체를 좋아하거든요. 대머리든 고자든, 그게 범 가가의 것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한설화도 더 이상은 만류할 수가 없었다.
벽화령이 한설화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대체 뭐가 고맙다는 것이지?”
벽화령이 사과하는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자신에게 감사할 이유가 없었다.
하나 이어진 벽화령의 말에 한설화가 쓰디쓴 소태를 씹은 것처럼 아미를 찡그렸다.
“제게서 범 가가를 빼앗아 가지 않으신 거요.”
“……!”
한설화가 경악에 찬 눈으로 벽화령을 응시했다.
기가 차고 황당해 할 말을 잃은 그녀를 남겨 둔 채 벽화령이 돌아섰다.
침묵을 이어 가던 한설화가 눈을 들어 우측의 전각 지붕을 바라본 것도 그때였다.
복잡한 얼굴로 지붕 위에 서 있는 범계위.
그는 멀어지는 벽화령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범계위의 모습을 확인한 한설화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젓가락도 짝이 있다더니…….”
못마땅한 눈빛을 흘리던 한설화가 애써 화를 삭이며 돌아섰다.
* * *
다음 날 아침.
모용진이 의식을 회복했다.
그가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본 것은 자신의 곁에서 자욱한 살기를 흘리고 있는 벽화령의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몸을 떨던 모용진이 이내 오열하며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끄윽……. 죄송합니다.”
누워 있던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뜨거운 눈물이 베갯잇을 적셨다.
“기억하는 것이냐?”
차가운 벽화령의 음성에 모용진은 차마 대답은 못 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광기에 휩싸인 와중에도 오랜 세월 함께 몸담아 온 해남검파의 식구들을 무참히 살해했던 기억이 뇌리에 선명했다.
“……죽여 주십시오.”
그렇게 애원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할 것이다.”
싸늘한 눈빛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 벽화령이 차디찬 음성으로 추궁을 이어 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고해라.”
암담한 심정에 질끈 눈을 감은 모용진이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왜구의 간자 토벌을 위해 광동에 있는 항구 마을에 머물 때였습니다.”
모용진의 이야기를 듣던 벽화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 날 객잔에서 자고 일어나니 머리맡에 한 권의 비급이 놓여 있었다는 대목에 의아함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해남검파의 무인으로서 늘 열등감에 시달리던 그였다.
비록 뱃사람으로서는 뛰어나나 다른 이들에 비해 무공의 진전이 더뎠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급의 유혹을 떨쳐 내지 못했다.
“그렇게 욕심 때문에 익히기 시작했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걷잡을 수 없이 마공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부터는 뭐에 홀린 것처럼 비급 안의 무공을 탐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마공에 손을 대다니!”
“믿어 주십시오! 맹세컨대 처음에는 마공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알았다면 절대 익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네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죽은 동료와 네 수하들은? 그들의 가족은? 마지막으로 본 파의 피해와 추락한 위신은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크흐흑.”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용진의 모습에 벽화령이 무거운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더 할 말은 없느냐?”
이때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모용진이 불쑥 입을 열었다.
“강명.”
혹시 몰라 환자 곁을 지키고 있던 단악선이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방금 강명이라고 하셨나요?”
지난번에 주화입마를 치료했던 진영산 역시 강명이라는 지명을 언급했었다.
모용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급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적혀 있었습니다.”
“할 말은 그것뿐이더냐?”
이어진 벽화령의 추궁에 모용진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전부입니다.”
“너는 본문으로 돌아가 처벌을 받을 것이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 말과 함께 모용진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단악선이 깜짝 놀라 그런 그를 제지했다.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모용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면 족합니다. 이보다 더 명을 늘려 봐야 먼저 간 동료들에게 죄스러울 뿐입니다.”
완강하게 치료를 거부하는 모용진의 태도에 단악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를 향해 벽화령이 지시했다.
“해남도에 돌아갈 때까지 죽지 말고 버텨라. 그게 마지막 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