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14)
신마의선-214화(214/500)
신마의선 (214)
더없이 잔인한 명령이었지만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그의 목숨은 더 이상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살해당한 해남검파의 무인들.
아비와 자식을 잃은 유족들의 몫인 것이다.
말없이 모용진을 응시하던 벽화령의 눈 위로 한순간 안타까운 감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신색을 회복한 벽화령이 단악선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상황이 이리된 만큼 길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겠네요.”
“환자가 치료를 거부한 이상 어쩔 수 없죠.”
단악선은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당사자의 의지가 그만큼 확고했기 때문이다.
그 길로 벽화령과 해남검파 무인들은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뒤늦게 이를 전해 들은 범계위가 당황한 얼굴로 달려왔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간다고? 나한테 시간을 준다며?”
벽화령이 씁쓸하게 웃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그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 것 같지 않으니까요. 언제든 가가의 마음이 결정되면 해남검파로 오세요.”
그 말을 남긴 채 벽화령이 일행과 함께 신마의가를 떠났다.
멀어지는 벽화령을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범계위는 괜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그래서일까.
―전 범 가가 그 자체를 좋아하거든요.
어젯밤 그녀가 했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 * *
신마의가를 떠난 벽화령 일행은 여정을 재촉했다.
주화입마의 진행을 멈췄다뿐이지, 모용진은 언제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어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단악선이 신마단을 챙겨 줬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몇 번이고 찾아온 위기를 신마단으로 겨우 넘기며 감숙을 벗어난 벽화령은 이름 없는 야산에 이르렀다.
생각 같아서는 밤을 새워서라도 길을 재촉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달리 비를 그을 곳이 없었기에 기름 먹인 천을 수레 위에 펼쳐 임시로 천막을 쳤다.
겨우 한 사람이 몸을 눕힐 공간에 모용진을 남겨 둔 뒤 다른 세 사람은 천막 밖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아쉬우시겠습니다.”
무료함에 지쳤던지 벽화령을 수행하던 해남검파의 무인 한 명이 슬쩍 말을 건넸다.
해남검파 사람이라면 범계위를 향한 벽화령의 일편단심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벽화령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말해 무엇 할까.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무위로 돌아가 범계위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만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행여 그녀가 기대하던 대답이 아니라면?
복잡한 심사를 떨쳐 내기 위해 쏟아지는 비를 하염없이 응시하던 그때.
벽화령이 멈칫했다.
삼십여 장 떨어진 곳.
바닥을 두드리며 부서지는 빗방울이 만들어 낸 뿌연 습막 너머로 아른거리는 인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무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마주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섬뜩해지는 한 쌍의 눈빛이 그 증거였다.
뒤늦게 벽화령은 상대가 흑의를 입고 새카만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 길이 엇갈리진 않았군.”
상대의 음성을 듣는 순간 벽화령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지척에서 말한 것처럼 목소리가 뚜렷했다.
그만큼 상당한 고수라는 의미였다.
적어도 악호군과 동급.
‘아니…….’
느껴지는 기도로 짐작하건대 그 이상의 고수였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줄기차게 퍼부어 대는 빗줄기 속에서도 상대의 옷깃에는 물기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떨어진 빗방울이 흑의인의 지척에 이르자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그대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것이 자연스레 발현된 호신강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벽화령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모용진을 데리고 너희 먼저 가.”
벽화령의 말에 해남검파의 무인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시간을 오래 끌지는 못할 거야. 그러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최대한 멀리 벗어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저희가…….”
“명령이다.”
“대랑(大娘)!”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해.”
“……!”
“나를 수하들의 목숨도 챙기지 못한 못난 상관으로 만들지 마.”
해남검파 무인들이 결연한 눈빛을 흘리며 벽화령의 앞으로 나섰다.
“무슨 짓이지? 내 명령이 우스워?”
벽화령의 질책에 두 사람이 씨익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벽화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 멍청이들이…….”
“그래도 어디 대랑만 하겠소?”
“우리 부문주님 처녀 귀신 만들 수야 없지.”
어느새 두 사람은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상대가 은연중에 흘리는 기파.
그 안에 섞여 있는 살기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강호 경험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놈은 혼자.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이 아닌 이상 분명 지치는 때가 있을 겁니다.”
벽화령이 안타까운 눈으로 수하들을 응시했다.
하나의 손이 여러 손을 감당할 수 없다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논리는 어디까지나 엇비슷한 수준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눈앞의 흑의인처럼 아득히 벗어난 경지의 고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 정도 되는 무인들이 이를 모를 리 없을 터.
하나 자신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각오한 수하들의 눈빛에 벽화령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래. 까짓것 한번 해보지, 뭐.”
흑의인이 불쑥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애석하지만 나와 손을 섞어 볼 기회는 없을 거야.”
벽화령의 눈빛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빗속에서 속속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들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숫자만 해도 무려 열 명.
처음 입을 열었던 흑의인과는 견줄 수 없었지만 그 한 명 한 명이 상당한 고수였다.
그중의 몇몇은 자신과 엇비슷하거나 이상의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같이 흑의와 복면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지만 저들의 목적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작하지.”
처음 입을 열었던 사내의 지시에 흑의인들이 벽화령 일행을 향해 쇄도해 왔다.
“삼재진을!”
벽화령의 외침에 다른 두 사람이 품자 형태를 이뤄 흑의인들에게 맞섰다.
미봉책에 불과했지만 당장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카카카카캉!
차가운 금속성과 새파란 불꽃이 연달아 어둠을 찢었다.
“큽!”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연이은 충격에 벽화령이 신음을 삼켰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휘청이는 검은 둘째 치고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벽화령의 눈에 기이한 광경이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저 멀리.
허공에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던 섬뜩한 기운이 점차 뚜렷한 형태를 이뤄 모습을 갖춰 가고 있었다.
“안 돼!”
벽화령이 다급하게 외치며 대열을 이탈하려 했다.
허공을 찢으며 날아가는 흑색의 강기 창.
그 궤적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그보다 빠르게 강기 창이 먼저 목표에 도달했다.
푸욱.
벼락처럼 내리꽂힌 강기 창이 수레를 부수며 그대로 모용진의 가슴을 꿰뚫었다.
“……!”
벽화령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더 볼 것도 없었다.
즉사였다.
“대랑!”
오른쪽을 지키고 있던 수하의 외침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서컥.
화끈한 통증이 어깨 부근을 훑고 지나갔다.
“으아악!”
분노를 담아 벽화령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검을 통해 쏟아진 검기 다발이 거친 파도처럼 일대를 집어삼켰다.
그녀를 에워싸고 있던 흑의인들조차 이것만큼은 경시할 수 없었던지 분분히 멀찍이 물러났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벽화령은 다시 위기에 몰렸다.
막대한 내력을 소진한 탓에 일순 진기가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덩달아 삼재진도 주춤했다.
이를 확인한 흑의인들이 재차 벌 떼처럼 벽화령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기까진가…….’
밀려드는 암담함에 벽화령이 쓰게 웃었다.
“미안하다.”
그 말에 해남검파의 무인들이 히죽 웃었다.
“서운하게 끝까지 이러시네.”
“뭐?”
난데없는 반말에 벽화령이 당황한 사이, 다른 해남검파 무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의 상관이기 앞서 대랑 또한 우리들의 누이고, 가족이오. 저딴 놈들에게 치욕스럽게 죽게 할 수는 없지.”
“적어도 저놈들은 함께 데려갑시다.”
그들이 품속에서 꺼내 든 물건을 본 벽화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얼간이들이?”
“혹시 몰라 좀 꿍쳐 뒀소.”
의미심장하게 웃는 두 사람의 손에 들려 있는 건 다름 아닌 폭뢰였다.
화포에 쓰이는 화약을 개량해 충격을 가하면 폭발하도록 설계된 마물(魔物).
피식.
마른 웃음을 흘린 벽화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에도 거리를 좁혀 오는 흑의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해, 범 가가.’
이 순간 누구보다 그리운 얼굴.
범계위를 떠올리자 벽화령은 죽음을 앞둔 지금의 상황이 더욱 서글퍼졌다.
이제는 더 이상 그를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무리해서라도 대답을 듣는 거였는데.’
그랬다면 이렇게 미련이 남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 이제 와 그 모든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벽화령이 수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쓸어버려!”
그런데 돌아온 것은 멍한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수하들의 모습이었다.
“뭐 하는 거야?”
수하들을 다그치던 벽화령이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유성처럼 내리꽂히는 거대한 인영이 눈에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꽈앙!
“크아악!”
폭음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떨어지는 기세 그대로 발밑의 흑의인을 그대로 짓이겨 버린 범계위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사위를 쓸어 보았다.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예상치 못한 범계위의 등장에 벽화령은 일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만큼 눈앞에 서 있는 범계위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 범계위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콰앙!
폭음이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벽화령의 눈에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흑의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리 떼 한가운데를 휘젓는 한 마리 흉포한 호랑이처럼 범계위는 닥치는 대로 흑의인들을 때려죽이기 시작했다.
그 어느 누구도 범계위의 주먹을 막아 내는 자가 없었다.
걸리는 족족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죽음을 피해 가지 못했다.
그 압도적인 신위에 벽화령을 위시한 해남검파의 무인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허공에서 일렁이며 모습을 갖춰 가는 강기 창이 벽화령의 눈에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범 가가! 조심해요!”
쾌애액.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흑색의 강기 창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범계위를 향해 내리꽂혔다.
범계위의 눈 위로 기광이 번뜩였다.
턱.
단지 손을 뻗어 움켜쥐는 것으로 떨어지는 강기 창을 붙든 범계위가 고개를 돌려 멀찍이 떨어져 있는 흑의인을 응시했다.
“너구나? 초 형을 골탕 먹였다는 놈이.”
공동파의 제자들을 인질로 삼아 초악량의 손을 벗어났던 흑의인.
당시 놈이 썼다는 무공에 대해 초악량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곤륜산에서부터 자신들을 방해해 온 놈이 분명했다.
화악.
범계위의 손에서 솟구친 시뻘건 화염이 강기 창을 집어삼켰다.
퍼석.
범계위의 손 아래 형체를 잃고 와해되는 강기 창을 목도한 흑의인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이미 장내에 살아 숨 쉬는 복면인은 그만이 유일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웃어?”
범계위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런 그를 향해 흑의인이 입을 열었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군.”
한순간 복면인의 신형이 벽화령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를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범계위의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수십 장이 넘는 거리를 단번에 지워 버린 것이다.
그 가공할 신법에 해남파의 무인들이 경악하고 있을 때.
자신만만한 음성이 범계위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망산초자의 목이라. 그래도 체면치레는 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