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17)
신마의선-217화(217/500)
신마의선 (217)
“……모른다.”
짧은 그 대답에 단악선이 아쉬워했다.
그와 동시에 입술을 달싹이던 흑의인이 길게 숨을 내쉬더니, 그 날숨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숨을 들이마시지 않았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끝난 것이다.
그렇게 흑의인이 숨을 거두자, 장내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답답한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한설화였다.
“부모님의 죽음에 의문이 있는 것이냐?”
“의문보다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요.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거예요.”
단악선은 애써 분위기를 바꾸며 말했다.
“그래도 흑막의 배후는 알아냈네요.”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흑의인을 응시하던 단악선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악한 사람에게 편한 죽음을 허락해도 되는 걸까요? 뭔가 불공평해요.”
평소라면 느끼지 못했을 복잡한 감정이 단악선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안온하게 눈을 감은 흑의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났다.
동시에 의원으로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싫어졌다.
한설화가 손을 뻗어 단악선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단악선이 서글프게 웃었다.
“앞으로 이보다 더한 일도 해야 하겠죠?”
범계위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걱정 마, 단 의원. 험한 일들은 우리한테 맡기면 돼.”
“그럴 수는 없어요.”
의아해하는 범계위와 한설화의 시선을 마주한 채 단악선이 입을 열었다.
“저들은 저를 노리고 움직이고 있어요.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제가 뒤에 숨는 건 비겁하잖아요.”
단악선의 눈에 굳은 의지가 묻어났다.
“더 이상 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를 흘려서는 안 돼요. 흘리더라도 같이 흘릴 거고, 진창을 구르더라도 함께 구를 거예요.”
단악선이 스스로 약속하듯 재차 다짐했다.
“그게 제 사람들을 지키고 무위를 지키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치 않을 거예요.”
그 말에 범계위와 한설화를 비롯한 모두가 그간 단악선이 얼마나 고심을 해 왔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울러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님을 깨달았다.
혈풍의 중심으로 나아갈 마음의 각오를 다진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시선을 마주한 한설화와 범계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악선에게 그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그 앞에는 반드시 자신들이 있을 터.
단악선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 * *
끝없이 펼쳐진 초원.
하늘과 대지가 끝없이 맞닿아 있는 지평선을 응시하던 초악량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드디어 찾았나?”
저 멀리, 대형을 이뤄 밀집해 있는 움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이 게르라 부르는 이동식 천막, 궁려(窮廬)였다.
한 장소에 정착하지 않고 늘 이동하는 혈운사의 특징으로 인해 오랜 시간 초원을 헤맸던 초악량이었다.
이 지역은 초원의 지배자인 달단(韃靼)이 활동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둥근 지붕 꼭대기에 휘날리는 붉은 깃발.
그 안에 선명한 악귀 문양을 확인한 초악량은 눈앞의 천막이 혈운사의 것임을 확신했다.
초악량은 최대한 기척을 감추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초악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천막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역한 악취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초악량이 신형을 날려 가장 가까운 천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으음…….”
천막 안을 둘러본 초악량이 짧게 침음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곳곳에 널브러진 시신들이었다.
한데 그 시신이 하나같이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찢기고 짓이겨진 시신.
그중에는 여자와 어린아이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이미 며칠이 지났는지 시신 대부분이 부패한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초악량의 눈이 어느 한곳에 고정되었다.
시신의 절단면과 가지런히 이어진 기둥의 균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간 강기의 흔적 안에서 사납고 패도적인 무공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혈라강기로군.”
마교의 절학 중에서도 수위로 꼽히는 마공이었다.
문제는 혈라강기가 사용된 초식이 눈에 익다는 점이었다.
“노단양?”
칠절마군 노단양.
몇 번을 확인했지만 놈의 소행이 분명했다.
쉬익.
한 줄기 예리한 파공음이 지척에서 느껴진 것도 그때였다.
초악량이 손을 뻗어 자신의 등을 향해 쏘아진 화살을 낚아챘다.
그리고 화살이 쏘아진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무렇게나 쌓인 가죽 더미 구석.
그 사이로 비죽이 나와 있는 활과 그것을 잡고 있는 앙상한 팔이 눈에 들어왔다.
초악량이 내저은 손을 따라 일어난 강맹한 경풍이 가죽 더미를 날려 버렸다.
그러자 그 안에 숨어 있는 암습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열 살 정도나 되었을까.
이민족 특유의 변발을 한 사내아이였다.
초악량이 이 천막에 들어선 이유이기도 했다.
죽음의 냄새만이 떠도는 일대에 유일하게 이곳에서 희미한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악다구니를 쓰며 초악량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이의 손에 들린 시퍼런 비수를 확인한 초악량이 금나수를 펼쳐 단번에 소년을 제압했다.
툭.
비수가 바닥에 떨어졌다.
초악량에게 손목이 붙들린 소년은 원독에 찬 눈빛을 흘리며 악을 써 댔다.
거칠게 몸부림치며 발길질을 해 대는 소년을 향해 초악량이 입을 열었다.
“중원 말을 할 줄 아느냐?”
소년의 입에서 대번에 한어가 튀어 나왔다.
“역겨운 중원 놈! 네 눈을 뽑아 독수리에게 던져 주고 사지는 찢어 개 먹이로 쓸 것이다!”
걸걸한 욕설에 초악량이 실소하며 아이의 손을 놓고 물러섰다.
그러자 아이는 황급히 비수를 집어 들려 했다.
따앙.
초악량이 지풍을 날려 비수를 멀찍이 쳐 내 버렸다.
그리곤 씩씩대며 노려보는 소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혹시 흉수를 보았느냐?”
“너도 같은 놈이다! 이 비열한 중원 놈들!”
소년의 말을 통해 초악량은 흉수가 노단양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그자를 잡으러 온 사람이다.”
“뭐?”
“나는 너를 해칠 생각이 없다. 그러니 나를 돕는 것이 어떠냐?”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들의 원수를 갚고 싶을 텐데.”
“……!”
흔들리는 소년의 눈빛을 읽은 초악량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설득을 이어 갔다.
“너로서는 그자를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가능하다. 놈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려 주면 내가 복수를 대신 해 주마.”
입술을 잘근거리던 소년이 고개를 돌려 주변의 시신들을 바라봤다.
그러기를 잠시.
“자세히는 보지 못했어. 멀리서 떠나는 걸 본 것뿐이야.”
소년은 자신이 아는 바를 털어놓았다.
혈사가 벌어졌던 날.
인근을 정찰하기 위해 주변을 살피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차례 피바람이 부족을 쓸고 지나간 뒤였다.
운 좋게 죽음을 피한 그의 눈에 북동쪽을 향해 달려가는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피 칠갑을 하고 마구잡이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달려가던 악귀.
소년이 묘사한 외양을 통해 초악량은 다시 한 번 노단양이 흉수임을 확신했다.
“그가 북동쪽으로 향했다 했느냐?”
방향을 가늠하던 초악량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놈이 어째서 이곳을 습격한 것이냐?”
“몰라.”
퉁명스러운 소년의 대꾸에 초악량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은신하고 있어야 할 노단양이 이처럼 눈에 띄게 행동한 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초악량이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유독 규모가 큰 천막에 이르렀다.
“여긴 누가 쓰던 곳이지?”
“툴루이 아저씨. 우리 부족에서 가장 강한 전사야.”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창을 움켜쥔 채 절명한 사십 대 장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슴 부근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사방에는 흩뿌려진 피가 검게 굳어 있었고, 온갖 물건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이상한 점이 있었다.
툴루이라는 사내는 발가벗겨진 상태였다.
게다가 천막 바닥에 깔려 있던 두툼한 털가죽도 한쪽에 몰려 있었고, 흙바닥 곳곳이 깊게 파헤쳐져 있었다.
‘뭔가를 찾고 있었군.’
곳곳에 느껴지는 노단양의 무공 흔적을 확인한 초악량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이유야 알 수 없지만 노단양이 혈운사와 한편이 아니라는 건 이로써 명백해졌다.
다만 곤란한 것은 혈운사를 통해 노단양을 추적하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유일하게 의지했던 단서가 사라져 버린 셈.
답답한 상황에 초악량이 고심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
초악량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혹시 몰라 그물처럼 사방에 깔아 둔 기감에 낯선 기척이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걸음걸이와 보폭.
무공, 그것도 중원의 무공을 익힌 자가 분명했다.
초악량이 내력을 깊숙이 갈무리해 존재감을 지웠다.
갑자기 눈앞에서 초악량이 사라지자 홀로 남은 아이는 당황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뒤늦게 무언가를 발견한 듯 허겁지겁 천막 구석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천막 안으로 들어서는 인영 하나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살피는 사내.
흑의를 걸치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특별한 무언가를 찾기 어려웠다.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수색하던 흑의인이 돌연 한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의 손에 붙들려 끌려 나온 소년이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무공을 익힌 무인의 손을 벗어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흑의인의 입에서 유창한 달단족의 언어가 튀어나왔다.
초악량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소년을 추궁하는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소년은 입을 앙다문 채 흑의인을 노려볼 뿐이었다.
차가운 웃음을 흘린 흑의인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에 번뜩이는 살기를 확인한 초악량이 유령처럼 움직여 흑의인의 뒤를 선점했다.
“중원인이군.”
“……!”
난데없는 음성에 화들짝 놀란 흑의인이 황급히 돌아서며 초악량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쾌액.
갈퀴와 같은 손가락이 허공을 찢으며 초악량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초악량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상대의 무공이 정종심법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특히나 당장 사용하는 초식은 금룡조(金龍爪)에 뿌리를 둔 조법이었다.
한눈에 봐도 상대가 지닌 무공의 성취는 결코 낮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운이 너무 나빴다.
금나수로 천하를 호령한 초악량이 바로 그의 상대였기 때문이다.
우두둑.
“크악!”
벌레를 내쫓듯 가볍게 휘두른 초악량의 손짓 한 번에 흑의인의 손가락이 수수깡 부러지듯 꺾여 나갔다.
천막 안을 가득 메웠던 어지러운 수영 역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너무나 간단히 상대의 공격을 무위로 돌린 초악량이 불쑥 입을 열었다.
“모용세가의 인물이 왜 이런 변방을 어슬렁대는 거지?”
그 말에 흑의인이 흠칫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창졸간에 자신의 무공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뒤늦게 초악량의 얼굴을 확인한 흑의인이 해쓱한 얼굴로 소리쳤다.
“혈수존자!”
흑의인이 곧바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그러나 채 몇 걸음도 떼기 전에 그 자리에 풀썩 고꾸라졌다.
초악량이 지풍을 날려 그의 마혈을 짚어 버렸기 때문이다.
“네놈에게 들어야 할 말이 있을 것 같구나.”
흑의인의 맥문을 움켜쥔 초악량이 진기를 흘려 넣기 시작했다.
“끄아아! 그만! 제발 그마안!”
처절한 비명이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상대의 맥문을 통해 흘려 넣는 진기의 양을 늘려 가며 초악량이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너는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다.”
“……!”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모용세가의 무인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노단양! 노단양 그자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초악량이 진기를 거두며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히 강단이 있는 놈이 아니었다.
한데 놈이 한 말이 의외였다.
“어째서 모용세가가 놈을 감시하단 말이냐?”
“맹주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맹주? 지낭리 말인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흑의인을 향해 초악량의 섬뜩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래서? 지금 노단양은 어디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