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25)
신마의선-225화(225/500)
신마의선 (225)
악호군이 움찔했다.
그 다른 사람이라는 게 누구를 의미하는지 그라 해서 모를 리 없었다.
‘이놈……. 보통 내기가 아니다!’
그제야 악호군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만약 이대로 물러난다면 이 자리에는 제갈연이 앉게 될 터.
이쯤 되니 생각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껏 초악량이나 한설화, 범계위를 신경 쓰고 있어 눈앞의 꼬맹이를 내심 가볍게 보고 있던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속내를 들여다보듯 가만히 응시하는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위기감이 밀려들었다.
그 순간.
온갖 계산이 뒤엉킨 머릿속에서 악호군이 현 상황을 타개할 실마리 하나를 붙잡았다.
“그딴 허풍에 내가 넘어갈 거라 생각했더냐?”
악호군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실소했다.
“정작 이곳 무위를 금지로 선포해 놓고 이제 와서 무림맹과 손을 잡는다?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의기양양하던 것도 잠시.
단악선의 대답에 악호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가 못 할 것 같나요?”
“뭐?”
“무위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얼 마다하겠어요?”
“……!”
말없이 단악선을 노려보던 악호군의 눈가가 씰룩였다.
“의술만 뛰어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협박도 탁월하시군.”
살짝 비아냥이 담겨 있는 악호군의 말에도 단악선은 흔들림 없는 태도로 응수했다.
“의원이니까요.”
“……?”
의아한 표정을 짓던 악호군이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사람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사람이 죽지 않게 하는 것이 우선 아닐까요?”
차갑게 식어 있는 단악선의 눈빛에 악호군은 일순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상대하고 있는 꼬마가 의원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명예에 목매는 무림인과 달리 의원이라면 생명을 살리기 위해 지극히 실리적인 방식을 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제길!’
내심 침음하던 악호군이 단악선을 노려보았다.
상황을 뒤집을 만한 묘수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가슴이 답답했다.
한데 놈은 이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녹림을 먼저 만난 건 제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예요. 이제 총표파자께서 그 호의에 답하실 차례예요. 어떡하시겠어요?”
결정을 종용하는 단악선의 눈빛에 악호군이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미 무림맹이 총단의 위치를 파악한 것으로 판단한 이상, 여기서 무위까지 적으로 돌리면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무엇보다…….’
단악선 곁을 지키고 있는 세 괴물을 힐끔거린 악호군이 한숨을 흘렸다.
녹림의 전력을 갈아 넣는다 한들 과연 저들을 이길 수 있을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의 수 싸움은 의미가 없다 판단한 악호군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받아들이지.”
생존 앞에 자존심 따위는 하등의 가치도 없다는 것을 단악선과의 대화를 통해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다.
“내가 내어 주어야 하는 것은?”
단악선의 대답은 간단했다.
“무위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안전을 원해요.”
“그들을 건드리지 않으면 되는 것인가?”
“그건 너무 당연한 것이고요.”
“……?”
“필요할 경우, 조건 없이 우리 사람들을 보호해 주세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악호군이 피식 웃었다.
단악선의 의도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무림맹과의 싸움도 언젠가는 끝날 터.
웅크렸던 녹림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면 전 중원에 흩어져 있는 산채들을 활용해 신마상단의 안전 거점으로 삼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렇게 하지.”
그런데 단악선의 요구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녹림의 정보도 공유해 주세요.”
“정보를……?”
“네. 그 정도 되어야 협상을 통해 서로가 얻을 이익의 균형이 맞지 않겠어요?”
“그건 네게 너무 유리하게 기운 조건 같다만?”
“대신 선택권은 총표파자께서 쥐고 계시죠.”
“지독하군, 지독해.”
악호군이 쓰게 웃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오직 가부(可否)만 주어진 선택권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한참의 고민 끝에 결국 악호군은 단악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다. 그리하지.”
“총표파자의 용단에 감사드려요.”
자리에서 일어서기 직전, 악호군이 단악선의 얼굴을 자신의 눈에 새겨 넣듯 한참 동안 응시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에게는 범계위가 가장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런데 이제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더 상대하기 어려운 부류일지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념.
그 가치를 기준으로 삼아 움직이는 자들을 상대하는 건 늘 그렇듯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지긋지긋한 마교 놈들처럼.’
악호군이 물러가자 초악량이 우려를 담아 입을 열었다.
“아마도 중요한 정보는 공유하지 않을 것이다. 쭉정이처럼 필요 없는 정보만 건네겠지.”
“괜찮아요. 예상한 부분이니까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단악선의 모습에 초악량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요구를 한 것이냐?”
“명분 때문에요.”
“명분?”
“네. 언제든 그들을 압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는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제야 초악량은 단악선의 의도를 깨달았다.
녹림은 분명 정보를 숨길 것이고,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언제든지 압박을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그동안의 단악선에게서는 보이지 않던 심계였다.
“저도 이제 최선을 다할 거예요.”
어느덧 무림의 생리에 익숙해진 단악선의 모습에 초악량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반면 한설화는 그런 단악선의 각오가 안타까웠고.
“으하하! 역시 우리 단 의원! 시커먼 산적 두목 따위는 우리 단 의원의 상대가 안 되지.”
범계위처럼 처음부터 아무 생각 없는 사람도 있었다.
* * *
무림맹의 대회의실 안.
제갈연의 소집령에 응한 각 세가의 가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용세가의 가주를 기다리며 서로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사천 당가와 하북팽가가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정도 무림 내에서 인정받는 고수들로, 악호군과 필적하거나 그 이상의 무공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덜컹.
대회의실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섰다.
서로의 근황을 나누며 환담하던 가주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 쪽으로 향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오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피풍의를 벗으며 인사를 건네는 장년인의 등장에 묵묵히 차를 마시던 제갈연이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이로써 모든 세가의 가주들께서 참석하셨으니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먼 길을 달려왔건만 숨 돌릴 여유조차 없는 것입니까?”
마지막으로 도착한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극의 너스레에도 어느 누구 하나 웃음으로 화답하는 이가 없었다.
오직 제갈연만이 조용히 웃으며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켰을 뿐이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조속한 결정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불평을 늘어놓을 때가 아니군요.”
모용극이 자리에 앉아 먼저 도착한 가주들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이에 가주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건조하게 반응할 뿐이었다.
모용극의 서글서글한 미소 뒤로 더없이 음험하고 위험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모용세가는 본래 오호십육국시대에 선비족의 한 부족인 모용부에 뿌리를 둔 가문이었다.
남궁세가가 강남의 명문이라면 모용세가는 강북의 명문이라 할 만큼 유력한 무림 세가였다.
다만 한족이 아닌 까닭에 타 세가와의 교류가 극히 적었다.
또한 지리적인 요건도 한몫했다.
모용세가는 과거 연나라가 위치해 있던 요녕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어떤 이에게는 오지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중원의 변방인 셈이다.
거기에 중원인과는 이질적인 모용세가 사람들의 외모까지 더해지며 눈에 띄는 교류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실제로 모용극의 눈은 푸른빛이 감도는 벽안(碧眼)이었다.
간혹 모용세가의 혈족 중에는 금발(金髮)이나 벽안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선비족의 피를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원의 세가들이 모용세가를 꺼리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가전무공의 위력 때문이었다.
비록 교류도 적고,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모용세가였지만 한 번씩 중원에 나타날 때는 놀라운 무위로 강호를 놀라게 하곤 했다.
북두칠성을 옮긴다는 광오한 의미를 지닌 두전성이(斗轉星移)가 대표적이었다.
사량발천근, 혹은 이화접목이라 일컫는 무공의 종류.
모용세가는 자신들이 그 원류라 자부할 만큼 무공의 깊이와 이해가 남달랐다.
실제로도 모용극은 지닌바 무공이 천하오절에 필적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몇몇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강호의 호사가들이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 부정하곤 했다.
강호의 소문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왕왕 부풀려지고 과장되기 마련이라는 것이 그들의 중론이었다.
하나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그것이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기세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모용극의 존재감.
그것만으로도 호사가들의 의견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망상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갈연이 녹림 토벌을 확신하는 이유도 그를 끌어들였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다른 세가의 가주들은 더욱 모용극을 경계했다.
평소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이처럼 직접 무림맹 회의에 참석한 이유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 녹림 토벌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중원에 진출할 생각이 분명했다.
기존에 박힌 돌인 그들이 대놓고 모용세가를 달가워할 수 없는 진짜 이유였다.
그렇게 회의를 시작하려는 순간.
제갈연의 수신 호위 한 명이 급하게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전음을 통해 제갈연이 보고를 받는 사이.
모용극이 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나저나 남궁세가의 가주님이 안 계시는군요. 듣기로는 모든 세가의 가주님들께서 참석하신다 들었는데.”
뻔히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속을 긁는 수작에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언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남궁백이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소?”
최근 녹림과의 싸움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세가는 다름 아닌 황보세가였다.
그런만큼 누구보다 초조하게 이번 회의 결과에 귀추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초를 치며 흰소리를 늘어놓는 모용극의 모습에 누르고 있던 화가 폭발한 것이다.
“어이쿠, 왜 이렇게 역정을 내십니까? 알다시피 저희 가문이 변방 구석에 위치한 터라 소문에 어둡습니다.”
능글맞은 모용극의 대꾸에 황보언이 매섭게 그를 노려봤다.
이때 제갈연이 입을 열어 좌중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보고에 따르면 방금 악호군이 무위에 다녀갔다고 합니다. 이후 녹림의 정예들이 속속 무위로 집결하고 있다는군요.”
제갈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회의실 곳곳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뭐라?”
“놈들이 금지로 숨어 버린 것인가?”
“그렇다면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 거요?”
가주들의 얼굴은 저마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이 자리에 그들이 모인 이유는 오직 하나.
녹림의 토벌 때문이었다.
한데 그들이 무위에 숨어 버린다면 세가를 주축으로 새로이 결성한 무림맹의 기치가 의미 없어지는 셈이다.
“걱정 마세요. 본 무림맹은 단 한 번도 무위가 금지로 선포된 것에 동의한 적이 없으니까요.”
제갈연의 대답에 하북팽가의 가주 팽종우가 한숨을 흘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묘하게 말끝을 흐리는 그였지만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뒷말을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녹림의 수장인 악호군이 건재한 이상 완벽한 토벌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무위로 쳐들어가자니 당장 신마삼존이라 불리는 세 괴물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제갈연은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설마 제가 그들이 손을 잡는 것도 계산에 넣지 않았을까요.”
“달리 방도가 있는 것이오?”
초조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황보언을 향해 제갈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등 우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저들은 완전한 동맹이 될 수 없으니까요. 우리와는 다르죠.”
제갈연의 얼굴에 맺혀 있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결국 악호군은 무위를 뛰쳐나올 수밖에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