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30)
신마의선-230화(230/500)
신마의선 (230)
홍적문이 술병을 거꾸로 들어 남아 있던 술 몇 방울을 마저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긴 여운을 남기며 쌉싸름하게 퍼져 나가는 향을 음미하길 잠시.
손에 쥔 술병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홍적문이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았다.
“잠깐? 타구봉은 잊어도 술병은 반드시 챙기던 인간이잖아?”
아차 싶었다.
“어쩐지 부리나케 달려가더라니.”
일부러 노린 게 틀림없었다.
“망할 방주. 등쳐 먹을 사람이 없어 친구를 벗겨 먹다니!”
마지막으로 병을 비운 사람이 반드시 술을 채워 돌려준다.
따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두 사람만의 불문율이었다.
분명 어딘가 적당한 곳에서 배를 긁적이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이립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한숨을 내쉰 홍적문이 지붕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다행히 멀리 불을 밝히고 있는 객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홍적문이 객잔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개방의 방주로서 고생하는 건 그의 업보니 일단 제쳐 두고, 그래도 험난한 길을 자처하는 친구를 위해 술 한 병은 쥐여 보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여기 술 좀 채워 주시게.”
늦은 장사를 마치고 문을 닫아걸기 직전에 들어선 거지의 요구에 점소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계산대 위에 올려진 작은 은덩이를 발견하곤 대번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
“이 집에서 제일 싸구려 백주……. 아니, 가장 비싼 녀석으로 채워 주게.”
“마침 어제 강소성의 양하주(洋河酒)와 고정공주(古井貢酒)가 들어온 게 있는데, 어느 것이 나으시겠습니까?”
홍적문의 얼굴 위로 이채가 떠올랐다.
“고정공주가 있다고? 그럼 그걸로 주게.”
조조의 고향인 안휘성 고정은 예로부터 물이 좋기로 유명했다.
그곳에서 생산된 고정공주는 특유의 화사한 맛 때문에 모란에 견주어지곤 했다.
홍적문이 고정공주를 선택한 것도 그것 때문이다.
“여기 있습니다.”
점소이가 건넨 술병을 받아 든 홍적문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었다.
술병 뚜껑을 에워싼 봉인지에 새겨진 모란꽃.
그 옆에는 나비와 고양이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고 고양이는 모(耄), 즉 칠십 세를 상징한다. 여기에 나비인 질(耋)은 팔십 세를 상징했다.
즉 모란에 고양이와 나비가 더해져 오래오래 부귀를 누린다는 의미의 부귀모질(富貴耄耋)이 완성되는 것이다.
거지들의 두목인 이립과는 어울리려야 어울릴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술 귀신을 자처하는 이립이 명주를 마다할 리 없으니, 팔자에도 없는 술을 마시게 된 그를 두고두고 놀릴 수 있었다.
객잔 밖으로 나선 홍적문은 이립이 향한 방향을 가늠했다.
개방도로서 추종술(追從術)은 기본 덕목 중의 하나.
특히 개방도 가운데 누구보다 그 분야에 뛰어난 홍적문인지라 이립의 흔적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의 신형이 한 줄기 바람에 녹아들었다.
이립의 흔적을 따라 한참을 달리던 도중.
“……!”
홍적문의 눈 위로 차가운 기광이 번뜩였다.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희미한 혈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방향이 이립이 사라졌던 곳이었다.
돌연 불길한 예감이 홍적문을 사로잡았다.
그래도 이립은 명색이 개방의 방주였다.
늘 헤픈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모습에 종종 사람들이 속긴 하나 실제로는 천하 삼대권사인 자신에 비해 크게 밀리지 않는 고수였다.
특히나 개방 방주의 독문무공인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과 타구봉법은 천하에서도 적수를 찾기 어려울 만큼 실력이 출중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두근대는 심장의 요동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게 피 냄새를 따라 홍적문이 도착한 곳.
흥건한 핏물 속에 누워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한 홍적문이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졌다.
“바, 방주…….”
홍적문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립을 불렀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거요? 장난이 너무 심하지 않소?”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이립을 향해 홍적문이 천천히 다가섰다.
서로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홍적문은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철벅.
웅덩이를 이뤄 고여 있는 핏물 위로 홍적문이 주저앉았다.
“뭐 해? 무림맹주 만나러 간다며?”
재차 이립에게 말을 건네며 그의 뺨을 어루만지던 홍적문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싸늘한 냉기가 심장을 쳤다.
“일어나…….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홍적문이 이립의 손을 들어 억지로 술병을 쥐여 주었다.
턱.
하지만 손을 놓기 무섭게 이립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왜 이래? 방주답지 않게. 왜 술을 마다하는데?”
홍적문은 몇 번이고 이립의 손에 술병을 올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매번 어김없이 술병은 바닥을 굴렀다.
밤하늘을 품은 생기 없는 눈빛.
그 공허한 시선이 차가운 얼음 칼이 되어 홍적문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홍적문의 얼굴이 흉신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대체 어떤 놈이…….”
두 눈에서 자욱한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홍적문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흉수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눈에 들어온 것이라곤 곳곳에 남겨진 격전의 흔적뿐.
“으아아!”
한껏 고개를 젖힌 홍적문의 입에서 처절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이립아……. 이 자식아……. 제발 일어나! 끄흐흐흑!”
단장의 애통함 속에서 홍적문이 소리쳤다.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
그 모든 감정이 한데 뒤섞인 뜨거운 눈물이 차갑게 식은 이립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하나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립에게 닿지 않았다.
이미 이립의 넋은 저 멀리 북망산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방 방주 이립의 부고가 단악선에게 전해진 것은 하루 뒤였다.
* * *
이른 새벽.
겉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능소밀이 안개를 헤치며 헐레벌떡 달려와 단악선의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곡주님! 곡주니임!”
새벽 공기를 뒤흔드는 소란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한설화였다.
“무슨 일이지?”
유령처럼 나타난 한설화의 모습에도 능소밀은 놀라지 않았다.
흑점에서 방금 전해 온 소식이 훨씬 더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단악선이 졸린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섰다.
그런 단악선을 향해 능소밀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큰일 났습니다. 방주님께서……. 개방의 방주님께서…….”
“방주님이 왜요?”
가쁜 숨을 몰아쉬던 능소밀이 부르짖듯 소리쳤다.
“돌아가셨습니다!”
“네?”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단악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어진 능소밀의 말에 그 자리에 석상처럼 신형이 굳어 버렸다.
“어제 새벽 습격을 받아 운명하셨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개방 방주님이요?”
그 말이 좀처럼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되묻는 단악선을 향해 능소밀은 그때마다 흑점이 전해 온 부음을 반복해 전했다.
“그럴 리가……. 방주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신가요? 제가 직접 가 봐야겠어요.”
“이미…… 늦었습니다. 그분의 숨이 멎은 걸 쾌수여의께서 직접 확인하셨다고 합니다. 방주님의 시신은 개봉으로 옮기는 중이라고 하고요.”
“……!”
단악선이 겉옷도 걸치지 않고 황급히 계단을 내려섰다.
어느새 다가온 초악량과 범계위가 맨발로 달려 나가는 단악선을 만류했다.
“기다려, 단 의원.”
“그래. 전후 사정을 파악한 뒤 움직여도 늦지 않는다.”
초악량이 한설화를 향해 말했다.
“범가와 내가 단 의원을 데리고 개봉에 다녀오마.”
예전에 개봉에서 열린 개방 대회에서 이립에게 코가 꿰인 두 사람이었다.
당시 개방의 청의빈객(淸衣賓客) 직책을 얻었기에 외부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개방을 방문할 수 있었다.
“갑시다!”
부랴부랴 준비를 마친 범계위는 어느새 단악선을 어깨 위에 올렸다.
“그럼 여기는 맡기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신형을 날렸다.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범계위의 어깨 위에서 단악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불현듯 이립과 함께 강호를 여행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개방의 방주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의 인연을 이유로 늘 자신을 위해 따듯한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던 그였다.
푸근한 미소와 격의 없는 눈빛.
이를 다시 볼 수 없다 생각하니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깨 위에서 전해지는 흐느낌에 범계위의 표정도 더없이 무거워졌다.
매일같이 만날 때마다 구박을 하긴 했지만 사실 그는 이립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이립이 마음에 들었다.
꼬장꼬장하고 고지식한 정파 놈들과 달리 유연하고 부드러웠고, 천하를 가슴에 담은 인품만큼은 사파인인 그조차도 가끔은 대단하다 느껴졌다.
초악량도 마찬가지.
이립의 부고에 마음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은 그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분과 나이, 입장을 떠나 이립은 초악량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숭상협의(崇尙俠義) 천하개방(天下丐幇).
다른 사람이 그 말을 입에 담는다면 비웃었겠지만 그만큼은 예외였다.
누구보다 천하를 위해 생각하고 움직였던 사람.
“이제 곧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울지 마, 단 의원.”
두 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범계위가 단악선을 위로했다.
하지만 그의 눈시울도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반면 초악량은 으스러져라 이를 악물었다.
누구의 짓인지 알 수 없으나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할 터!
범계위와 초악량의 신형이 점차 빨라지더니 종국에는 한 줄기 빛살이 되어 안개를 뚫고 사라졌다.
* * *
이립의 사망 소식이 무림 전체로 퍼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각 문파의 장문인들을 필두로 수많은 무림의 명숙들이 개방의 본타가 있는 개봉을 찾았다.
화산파 장문인의 고희연에 참석하기 위해 일찌감치 여행길에 오른 그들이었다.
한데 뜻밖의 소식에 개봉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아미타불!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에 빈승의 수양이 덧없음을 느낍니다. 불존께서도 무심하시지. 강호를 위해 헌신한 그를 어찌 이리 급히 데려가셨는지……. 통재! 통재로다!”
소림의 방장인 법연을 시작으로, 각 문파의 장문인들이 추모가 이어졌다.
“친구여! 나의 친구여! 목 놓아 불러도 대답이 없으매, 상심한 마음은 향처럼 덧없이 허공을 떠도는도다! 황망한 눈물로 나 그대 배웅하노니, 부디 편히 가시게! 부디 편히 가시게!”
평소 이립과 친분이 두터웠던 곤륜파의 장문인인 광진도장이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들기며 오열했다.
이때 가슴까지 길게 늘어트린 백염을 휘날리며 들어선 선풍도골의 노도사를 발견한 홍적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당대 천하오절 중 한 명인 화산신검.
화산파의 장문인인 진명진인이었다.
그 역시 비통한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각골통한(刻骨痛恨)의 심정을 어찌 빈도가 헤아릴 수 있으오리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주를 맡은 홍적문의 인사에 진명진인이 더없이 무거운 눈빛으로 탄식을 터트렸다.
“와야지요. 의당 와야지요.”
빈소를 둘러보던 진명진인의 얼굴 위로 감출 수 없는 슬픔이 떠올랐다.
“강호를 위해 헌신해 온 귀 방의 노고와 협의를 위해 늘 솔선수범하시던 방주님의 노력에 기대어 저를 포함한 뭇 강호인들은 언제나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생전에 감사의 말을 전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통탄하고 애석할 뿐입니다.”
이때 형산파의 장문인인 진조운이 황급히 빈소로 들어섰다.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머리를 고정했던 도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런데도 진조운은 봉두난발인 상태로 이립의 위패 앞에 무너지듯 엎드렸다.
“이 형! 어찌 이리 허망하게 간단 말이오!”
숨죽여 오열하는 그의 모습에 앞서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숙연한 눈빛을 흘렸다.
평소 돈독했던 이립과 진조운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에 홍적문은 그저 말없이 그 옆을 지켰다.
주위를 둘러보던 홍적문의 눈에서 싸늘한 한광이 뿜어져 나온 것도 그때였다.
연이어 들어서는 조문객들.
그 사이로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섞여 있었다.
세를 과시하듯 이십여 명이 넘는 무리를 대동한 채 들어서는 선두의 여인.
바로 제갈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