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34)
신마의선-235화(234/500)
신마의선 (235)
“아주머니께서요?”
단악선의 반문에 한설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한 번은 방문할 생각이었다. 저들이 마교와 손을 잡은 정황이 뚜렷한 이상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으니까.”
“하지만…….”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 단악선의 모습에 한설화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염려할 것 없다. 저들은 결코 나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잠시 말끝을 흐리던 한설화의 눈 위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이건 내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다. 아주 오랫동안 미뤄 두었던 일이지.”
그날 밤.
처소를 찾아온 방문객을 위해 한설화는 손수 한 잔의 차를 우렸다.
“내가 걱정되는 것이냐?”
찻잔을 받아 든 단악선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네.”
한설화가 슬쩍 웃으며 여유를 내비쳤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더 강하다.”
“알아요.”
단악선이 한설화가 건넨 찻잔 속의 찰랑이는 찻물을 응시했다.
“누구보다 오랫동안 아주머니를 진찰해 온 저예요. 변황오세의 고수들이 습격해 왔던 그날. 그때도 전력을 다하신 게 아니라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어요.”
“한데 얼굴이 왜 그리 어두운 것이냐?”
“다치실까 봐요.”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몸이 아닌 마음이요.”
“……!”
일순 멈칫하는 한설화의 모습을 단악선은 놓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빙궁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잖아요.”
“…….”
“분명 아름다운 기억은 아니었겠죠. 그러니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으셨던 걸 테고요.”
침묵을 이어 가는 한설화를 향해 단악선이 안타까운 눈빛을 건넸다.
“그런데 다시 그 기억과 마주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걱정돼요. 혹여라도 그것 때문에 마음이 다치실까 봐요.”
단악선의 목소리와 눈빛.
그 안에 담겨 있는 진심을 마주한 한설화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감동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참 못된 환자였구나. 너는 나를 위해 그토록 애써 왔건만 정작 나는 네게 숨기는 게 많았다니.”
단악선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아주머니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는 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한설화가 가만히 손을 뻗어 단악선의 손을 감싸 쥐었다.
“이번에 다녀와서 전부 말해 주마.”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디 조심하세요.”
“그러마.”
적당히 식은 차를 단숨에 비운 단악선이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멀어지는 단악선을 배웅하는 한설화의 얼굴에는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가 자리 잡았다.
초악량이나 범계위가 보았다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을 만큼 정감이 담뿍 담긴, 온화한 미소였다.
날이 밝기 무섭게 한설화와 사무심이 신마의가를 떠났다.
예정대로 한설화는 북해빙궁으로 향했다.
사무심 역시 북쪽으로 향했다.
새외 지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부족 달연(達延) 한(汗)이 거느린 세력과 접촉하기 위해서였다.
오랜 세월 혈운사를 견제해 온 그들인 만큼 누구보다 저들의 동향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한설화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범계위가 번쩍 두 손을 치켜들며 환호했다.
“마녀로부터 해방이다!”
반면 단악선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이를 깨달은 초악량이 범계위를 향해 핀잔을 던졌다.
“머리만 없는 게 아니라 눈치도 없구나.”
“아침 댓바람부터 왜 또 시비요?”
“언제부터 네가 한 누이 눈치를 봤다고?”
“화령이한테 사기 친 거 들통난 이후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수. 초 형도 솔직히 그랬잖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탄을 옆에 둔 것처럼 전전긍긍하더니만?”
“됐다. 내가 말을 말지.”
초악량이 단악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사히 돌아올 테니 걱정할 것 없다.”
“이왕 간 거, 거기 그대로 눌러앉으면 더 좋겠다.”
초악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없지 않으냐.”
“왜? 원래 북해빙궁 출신이라며?”
반문하던 범계위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한설화가 북해빙궁 출신이라는 것 말고는 아는 바가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북해빙궁은 왜 나온 거래? 초 형은 뭐 아는 거 있수?”
“직접 물어봐라.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떠들어 댈 만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혹시 그게 마녀가 초 형을 오라버니라 부르는 이유와 관련이 있수?”
초악량이 뜨끔한 표정으로 범계위를 바라봤다.
이처럼 가끔가다 정곡을 짚는 범계위의 직감엔 그조차 놀랄 때가 많았다.
그런 초악량을 향해 범계위가 미심쩍은 눈빛을 던졌다.
“지금껏 당연하게 여겨서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상하잖수. 훨씬 나이가 많은 마녀가 어째서 초 형을 오라버니라 부르는 거요?”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초악량이 대답했다.
“그것도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라.”
* * *
무위를 떠난 한설화는 쉬지 않고 경공을 전개했다.
중원을 벗어나 초원과 사막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향하기를 며칠째.
혹한의 냉기를 머금은 바람이 몰아치는 광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없는 눈 쌓인 허허벌판.
이마저 지나 한참을 달리자 이윽고 얼어붙은 거대한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곳은 변한 게 없군.’
호수 한가운데 지어진 거대한 궁궐을 눈에 담은 한설화가 자신도 모르게 아미를 찡그렸다.
건물을 쌓아 올린 기둥과 지붕은 중원의 형태와 흡사했지만 거대한 호수로 인해 철저하게 외부와 고립되어 있는 지형은 그 자체로 천연의 요새와 다름없었다.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대로인 풍경.
그 모습에 기대어 짧게나마 오래전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짧은 추억 뒤에 딸려 오는 기억들은 썩 달갑지 않았다.
말없이 빙궁을 응시하던 한설화가 호수 위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천천히 빙궁을 향해 다가서던 그때.
덜컹.
육중한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더분한 눈빛과 부드러운 눈매가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그는 대문 안쪽에서 빙그레 웃으며 한설화를 보고 있었는데, 손에는 쟁반을 받쳐 들고 있었다.
쟁반 위에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한 잔의 차가 올려져 있었다.
한설화가 거대한 대문을 떠받친 문설주를 지나쳐 노인을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서로의 거리가 일 장 남짓 남았을 때 노인이 입을 열었다.
“바람이 찹니다. 본 궁을 방문하신 목적을 말씀하시기 전에 이걸로 우선 몸부터 녹이시지요.”
한설화가 무심한 눈으로 노인을 응시했다.
그리곤 그에게 다가가 말없이 찻잔을 집어 들었다.
“…….”
한 모금의 차를 마신 한설화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차 맛이 훌륭했다.
특히나 입 안을 맴돌며 길게 가져가는 향긋한 여운은 이제까지 맛본 차들 가운데 단연 일품이었다.
“좋은 차로군.”
한설화의 말에 노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귀한 손님에게만 내어놓는 특별한 차니까요.”
노인의 입가에 맺혀 있는 웃음이 짙어졌다.
“그 손님이 본 궁의 배신자라면 말할 것도 없고.”
사람 좋은 미소 너머로 도사리던 살기를 노인은 더 이상 감추지 않았다.
한설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노인이 시간을 끌기 위한 목적으로 차를 내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차를 건네고 몇 마디 주고받는 그 짧은 시간.
은밀하게 주변을 에워싸는 다수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반경 백 장 안의 공간은 완벽히 그녀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고수라 해도 그녀의 기감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한설화의 눈빛이 기이하게 일렁였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만큼 북해빙궁 무인 특유의 기파는 그녀에게 익숙했다.
한데 그 사이로 더없이 위험한 느낌을 자아내는 이질적인 존재감이 느껴졌다.
물끄러미 노인을 응시하던 한설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당대의 현빙이로(賢氷二老)인가?”
상대의 기파를 바탕으로 무공의 깊이를 가늠한 한설화는 어렵지 않게 상대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빙궁 특유의 폐쇄적인 기풍.
이로 인해 빙궁의 인물들에 대한 정보는 강호에 알려진 바가 드물었다.
고작해야 궁주와 그를 보필하는 좌우 호법 정도였다.
특히 궁주를 제외하고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호법이 바로 현빙이로였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노부가 바로 본 궁의 좌호법이다.”
“다른 한 명은 어디 있지?”
“죽었지.”
“……?”
“당신 손에.”
한설화는 단악선을 습격했던 다섯 명 중에 포함되어 있던 복면 여인을 떠올렸다.
내심 무공이 상당하다 생각했는데, 그녀가 바로 우호법이었던 모양이다.
자신을 좌호법이라 밝힌 노인의 눈에 의아함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너무나 태연한 한설화의 표정과 태도 때문이었다.
이는 그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더 들지 그러나? 잠시 후면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텐데.”
한설화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찻잔을 노인이 받쳐 든 쟁반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빤히 노인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던 노인이 이내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이 차는 이승을 하직하기 전의 마지막 대접.
그러니 차를 마실 사람은 자신이 아닌, 그라는 의미였다.
실로 광오하다 못해 어이없기까지 한 자신감이었다.
하나 이제는 찻값을 받아 낼 차례였다.
쨍강.
노인의 손에서 떨어진 찻잔이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그게 신호였던 것일까.
쿠웅.
막 들어선 대문이 닫혔다.
동시에 전각 곳곳에서 수많은 무인들이 쏟아져 나와 한설화를 겹겹이 에워쌌다.
이제는 아주 대놓고 살기를 드러내는 노인의 모습에 한설화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제아무리 빙옥선자라 해도 죽음은 두려운 것인가?”
“아니.”
한설화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겨워서.”
좌호법의 직책을 맡고 있는 북궁정은 내심 기가 막혔다.
한설화의 눈빛은 격전을 앞둔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방비했다.
심지어 그 어떤 긴장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한설화가 말했다.
“과거에 나는 너희에게 기회를 주었다. 한데 여전히 뉘우칠 줄을 모르는구나.”
“뭐라고?”
당황한 노인을 향해 한설화가 얼음장 같은 시선을 던졌다.
“그날. 빙궁을 완전히 지워 버리지 않은 건 내게도 일말의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궁주의 목숨만 거두는 것으로 용서했지. 그런데 배은망덕하게도 또다시 내게 칼을 겨누는구나.”
“닥쳐라! 배신자! 너는 감히 그 말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다!”
“배신자?”
한설화의 반문에 북궁정이 소리쳤다.
“당시의 참사만 벌어지지 않았다면……. 본 궁이 예전과 같은 힘만 지니고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굴욕은 감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한설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뜻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빙궁을 포함한 변황오세가 마교의 주구로 전락한 것 말인가?”
“……!”
북궁정의 눈썹이 꿈틀했다.
역린을 건드렸는지 북궁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본 궁의 신물을 훔쳐 달아난 배신자가 뻔뻔하기 짝이 없구나!”
한설화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전에 자결한 복면 여인과 마찬가지로 눈앞의 좌호법 역시 이를 진실이라 믿고 있는 눈치였다.
많은 세월이 지나며 진실은 묻히고 사실과 다르게 왜곡된 듯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뻔뻔하게 자신을 모욕할 리 없었다.
한설화의 얼굴에 떠오른 씁쓸한 미소.
순간 북궁정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 안에서 소리 없이 피어오르는 전율스러운 살기를 목도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