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37)
신마의선-238화(237/500)
신마의선 (238)
마영기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모규광은 결코 이렇게 맥없이 쓰러질 사람이 아니었다.
마교의 절대자인 천마를 제외하고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여섯 명의 강자.
심지어 정마대전이라는 치열한 지옥에서조차 버티고 살아남은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단 한 번의 공격을 교환하는 것으로 죽어 버렸다.
마영기로서는 그저 아연할 수밖에.
홀로 남은 마영기가 고개를 돌려 한설화를 바라봤다.
비록 두 발로 서 있긴 했으나 고개를 숙인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어쩌면 저 괴물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하나 이미 천금 같은 기회를 한 번 놓친 그였다.
더구나 저 모습조차 자신을 끌어 들이기 위한 함정일 가능성도 있었다.
고민은 찰나였지만 행동은 더욱 빨랐다.
마영기의 신형이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설화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것도 그때였다.
“후.”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한설화가 아쉬운 눈빛을 흘렸다.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작자였다.
마음 같아서는 쫓아가 놈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허락된 시간이 다했기 때문이다.
한설화가 손을 들어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눌렀다.
아무래도 늑골이 두 대는 나간 것 같았다.
그래도 덕분에 육마존 한 명의 목숨을 거둘 수 있었다.
제법 비싼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한설화가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짓는 미소였다.
‘운이 좋았어.’
본래 이곳을 방문한 목적은 한 가지였다.
마교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건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단악선의 목숨을 노린 이상 그녀는 빙궁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이곳을 피로 씻어 단악선을 위협할 세력을 하나라도 줄일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마교의 핵심 고수인 육마존이 딸려 왔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둘씩이나.
그들의 목숨을 거둔다면 제아무리 마교라도 적잖은 충격을 받을 터.
비록 하나는 놓쳤지만 검마를 죽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은 확실히 고수였다.
만약 저들이 방심하지 않고 처음부터 최선을 다해 연수했더라면 그녀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설화가 주위를 둘러봤다.
소복하게 쌓인 눈 위를 물들인 선홍색 핏물과 그 위로 쓰러져 있는 시신들.
그야말로 시산혈해를 방불케 하는 지옥도 속에서 오직 빙정만이 처음의 모습 그대로 요요(妖妖)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뽀득.
발 아래에서 부서지는 눈 소리에 기대어 빙정을 향해 다가선 한설화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로 감싸듯 빙정을 거머쥔 한설화가 진기를 끌어 올렸다.
우우웅.
빙정이 요동치며 거칠게 진동한 것도 동시였다.
마치 스스로 영성을 지닌 것처럼 빙정은 한설화의 의지를 거부했다.
오히려 주위의 냉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육마존 둘과의 싸움에서 이미 상당한 내력을 소모한 한설화였다.
점차 강해지던 빙정의 기운이 어느 순간 한설화의 내력을 넘어섰다.
한설화가 아미를 찡그렸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새하얀 서리가 천천히 타고 올라와 어느새 손목에까지 이르렀다.
콱.
한설화가 빙정을 움켜잡았다.
수많은 방향으로 비죽비죽 솟은 빙정의 날카로운 첨단.
그 예리하고 날카로운 모서리가 한설화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투두둑.
한설화의 손을 타고 흘러내린 핏물이 새하얀 눈밭 위로 떨어졌다.
거부하듯 사납게 요동치는 빙정을 향해 한설화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너는 세상에 오래 나와 있어서는 안 돼.”
자신의 생명을 지탱하는 유일한 버팀목.
반대로 끊임없는 고통으로 그녀를 괴롭히는 천형의 저주.
그녀에게 있어 빙정은 그야말로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빙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때는 그녀도 이곳을 사랑했다.
비록 지켜보는 눈이 있어 그 감정을 가슴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야 했지만, 누구보다 이곳이 좋았고 이곳의 사람들이 좋았다.
그래서 빙궁을 위한 일이라는 감언이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아니…….’
한설화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다만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애써 외면했을 뿐이다.
그 대가로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자신의 존재가 고작 권력의 도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은 피를 손에 묻힌 뒤였다.
자유 의지와 감정이 배제된 완벽한 병기.
그게 그들이 원하던 전부였다.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쌓이고 쌓여 응어리진 마음의 빚은 결국 저들의 명령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인간다운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빙정을 다시 거두어 가려고 했다.
한번 방법을 알았으니 이번에는 그 빙정을 이용해 더욱 완벽한 병기를 만들어 낼 생각이었다.
한설화는 그걸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거부했다.
단순히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불행한 사람은 그녀 하나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빙정을 내놓는 걸 거부하자 그들은 살수를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날.
그녀는 처음으로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사람을 죽였다.
이 아름다운 곳에 깊게 뿌리내린 피의 굴레를 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업보는 처음부터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사방에 즐비한 시신들도 결국 그녀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어쩌면 내 존재 자체가 재앙일지도…….’
밀려드는 회의감에 한설화는 이제 그만 모든 것을 놓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은 아니야.’
비록 마교의 이름 높은 사냥개 한 마리를 잡았다지만 아직 저들에겐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사냥개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들로부터 단악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직 그녀가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죽음에 슬퍼할 단악선의 모습을 원치 않았다.
“그러니까…….”
한설화가 빙정을 움켜쥔 손에 힘을 넣었다.
“너도 그만 돌아와.”
쨍!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빙정이 산산이 부서졌다.
유리처럼 투명한 가루들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더니 이내 눈부신 빛을 뿌리며 천천히 쏟아져 내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희뿌연 안개처럼 흩어졌다.
새하얀 운무의 형태로 일렁이던 빙정의 서기는 곧 한설화의 전신 모공으로 빨려 들 듯 사라졌다.
한설화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급격히 흩어지던 생명의 기운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던 한설화가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거대한 전각 앞에 이르러 있었다.
궁주가 머무는 전각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알싸한 주향이 그녀를 맞았다.
촛불 하나 없이 어두운 실내.
그 가운데 어지럽게 구르는 술병들 사이로 한 사람이 태사의에 기대앉아 있었다.
사내다움이 물씬 묻어나는 눈빛과 강인한 턱선.
거기에 단단한 체구가 유독 돋보이는 장년인이었다.
그의 신분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가 지닌 독특한 분위기와 기파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아는 까닭이다.
“당대 궁주가 너인가?”
한설화의 물음에 장년인이 피식 웃었다.
“그렇소. 내가 바로 북궁령이오.”
빙궁의 궁주라는 것을 인정한 장년인이 흐릿한 눈으로 한설화를 응시했다.
한설화가 묵묵히 그에게 다가섰다.
어둠 속에서 열두 자루의 검이 나타난 것도 그때였다.
새파란 살기를 베어 문 청강검이 순식간에 한설화를 에워쌌다.
섬뜩한 검날이 전신을 난도질하기 직전.
한설화가 어지러운 검영 안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허공을 움켜쥔 손을 잡아당겼다.
검을 쥐고 있던 주인들이 그대로 맥없이 딸려 왔다.
허공을 가득 메웠던 검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진 뒤였다.
하나같이 경악에 사로잡힌 그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눈에 담으며 한설화가 입을 열었다.
“고작 저런 자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가치가 있나?”
그들은 말이 없었다.
침묵만큼이나 무거운 검을 억지로 움직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푸푸푸푹.
“……!”
검을 움켜쥔 사내들의 눈에 경악의 감정이 떠올랐다.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얼음 칼이 온몸을 파고들어 반대쪽으로 튀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들의 눈에서 생명의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궁주를 지키는 최후의 수신 호위인 백검대의 장렬한 최후였다.
그러나 정작 저들의 죽음을 마주한 북궁령은 당연한 결과를 맞이하듯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침묵을 깨며 북궁령이 입을 열었다.
“그들은 어찌 되었소?”
그가 언급한 그들이 누구를 말하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검마는 죽고 염마는 달아났다.”
“크큭.”
한설화의 대답에 북궁령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뚝 웃음을 그쳤다.
“그래도 마지막에 본 궁의 저력을 놈들에게 보여 줬구려.”
“너희가 아니라 내가 한 것이다.”
“당신의 뿌리마저 부정할 생각이오?”
“…….”
“애초에 빙정은 본 궁의 신물이었소. 그걸 당신이 훔쳐 간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너희는 그것을 지닐 자격이 없다.”
“그러는 당신은? 그 자격이라는 건 누가 어떻게 부여하는 거지?”
“글쎄.”
이어진 한설화의 말에 북궁령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교에 굴복하는 놈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자격이라는 건 확실하지.”
한설화를 노려보던 북궁령이 한숨을 터트렸다.
“어쩔 수 없었소. 본 궁이 과거와 같은 성세를 유지했다면 저들에게 굴복하는 일 따위는 없었겠지.”
“그래서? 그게 내 탓이라고?”
“저들은 처음부터 본보기가 필요했소. 변황오세 중 세 곳을 끌어안고 나머지 두 곳은 피로 씻겠다는 제안을 해 왔지. 굳이 희생양 역을 자처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북궁령이 마른 웃음을 풀썩였다.
“뭐, 빠르나 늦으나 결과는 매한가지지만.”
북해빙궁의 무인들은 모두 죽고 이제는 그만이 남아 있었다.
“당신은 돌아와서는 안 되었소.”
“맞아, 돌아오지 않으려 했지.”
“…….”
“너희가 자초한 거야.”
한설화의 말에 북궁령이 힘없이 웃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가를 치르고 있지 않소? 지금도 충분히 아프고 괴롭다오. 그러니 적당히 하고 이만 끝냅시다.”
“그래. 그러지.”
한설화가 손을 들어 북궁령을 가리켰다.
길고 긴 악연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된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도 북궁령은 한순간 거대한 빙산이 눈앞에서 무너지는 것 같은 압력을 느꼈다.
숨이 막힐 듯한 존재감.
무엇보다 가슴에 날아와 박히는 차디찬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북궁령이 불쑥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염치없지만 부탁이 있소.”
“그럴 입장이 아닐 텐데.”
“내가 다 끌어안고 가리다. 지난 과오도, 그리고 서로를 향한 원한도. 그러니 나 하나로 끝내 주시오.”
비록 무인들은 모두 죽었다곤 하나 아직 이곳에는 생존자들이 남아 있었다.
어린아이를 비롯한 아녀자들이었다.
“물론 공짜로 하는 부탁이 아니오. 그 값은 충분히 치르리다.”
물끄러미 북궁령을 응시하던 한설화가 입을 연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난 마교를 쫓고 있다.”
그 말에 북궁령이 조용히 웃었다.
다행히 그녀가 원하는 대가를 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련산 근처에 강명이라는 객잔이 있소.”
북령이 설명을 이어 갔다.
“그곳에 명부가 있소. 비급을 전달한 중원인들에 대한 명단이오. 그 명단에 있는 자가 객잔을 찾아오면 마교의 인물이 접촉하기로 되어 있소.”
“명단은 누가 가지고 있지?”
“흑암령주(黑暗令主). 적어도 내가 파악한 그의 신원은 그렇소.”
마교 서열상 마교 교주 바로 아래 직책이었다.
지금은 오마존이 된 육마존이 실질적으로 마교의 호법 역할이라면 흑암령은 교주의 명에 따라 정보를 관장하고 교내 인사의 감찰과 처벌을 담당하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소림사의 계율원주 정도의 직책과 권위를 지닌 셈이다.
“무림맹과의 관계는?”
“그것과 관련해서는 아는 바가 없소.”
말없이 북궁령을 응시하던 한설화가 천천히 돌아섰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북궁령이 그 순간 울컥 핏물을 토했다.
“부탁을 들어주어……. 고맙소.”
이미 거래는 끝났다.
이제 와 목숨을 구걸할 만큼 염치가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게 북궁령은 스스로 심맥을 끊어 자결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