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69)
신마의선-269화(269/500)
신마의선 (269)
사흘 후.
신마의가에 머물며 여독을 푼 염사인 일행은 다시금 떠날 채비를 마쳤다.
“내가 함께 간다니까.”
“됐다. 얼마 후에 다시 올 건데 뭘 굳이. 그냥 여기서 기다려.”
자신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는 염사인의 완고한 모습에 초악량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거참, 고집은…….”
“이제 와 살가운 척은 무슨?”
초악량에게 핀잔을 던진 염사인이 고개를 돌려 단악선을 바라봤다.
마치 손자를 바라보듯 인자한 눈빛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체류 기간이었지만 이미 단악선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였다.
“또 보세, 단 의원.”
“염 아저씨도 무사히 다녀오세요. 약 챙겨 드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허허. 아저씨?”
“초 아저씨 친구시잖아요. 초 아저씨께는 아저씨라 하는데 염 대인만 호칭을 달리하는 건 왠지 실례 같아서요.”
“아저씨라……. 젊어진 것 같아서 좋군.”
흐뭇하게 웃던 염사인은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일행과 함께 신마의가를 떠났다.
“그리도 좋으십니까?”
염사인을 따라 걷던 장삼이 슬쩍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도 그럴 것이, 걷는 내내 염사인의 얼굴에서는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신마의가와는 한참이나 멀어져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염사인은 몇 번씩이나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고 녀석 참 귀엽지 않던가? 기특한 건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평소의 무뚝뚝한 모습과 대조적인 부드러운 염사인의 표정에 장삼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단 의원이 무척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그러게. 여우에 홀린 기분이 이런 건가 싶네. 그 녀석 사람 마음 훔치는 재주는 아주 타고났어. 그러니 초가 놈도 제 혈육인 양 끔찍하게 아끼는 거겠지.”
“하긴 두 분이 정상적으로 가정을 꾸리셨다면 저만한 손자가 있으셔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염사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장 총관.”
“예?”
자신을 총관이라 부르는 염사인의 말에 장삼의 눈 위로 경계심이 자리 잡았다.
함께 부대끼며 지내 온 세월이 이미 수십 성상.
대부분 이놈 저놈, 혹은 ‘야.’나 ‘인마.’ 정도로 부르던 그가 이처럼 총관이라 부를 때는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을 때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돈 모아 놓은 것 좀 있나?”
“갑자기 돈은 왜요?”
“우리도 영약 좀 사다 먹게. 자네 하나, 나 하나. 어떤가?”
“갑자기요?”
“초가 그 녀석, 이곳에서 영약을 많이도 처먹은 모양이야. 왜 저놈만 세월이 비껴가누.”
“그건 영약 때문이 아니라 무공 때문입니다. 원래부터 초 대협은 연세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젊어 보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무공을 익힐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익힌다고 해서 젊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영약이라도 좀 먹어 보자고.”
“……”
미간을 찡그린 채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장삼의 눈빛에 염사인이 벌컥 역정을 냈다.
“왜? 나는 욕심 좀 내면 안 되나?”
“언제는 추하다면서요?”
“뭐가?”
“언젠가 초 대협께서 건강을 위해 운기토납이라도 해 보라며 심법을 가르쳐 주시려 했잖습니까. 그때 장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늙어 얼마나 더 살겠다고 추하게 아등바등 애를 써?’ 라고요.”
“장 총관.”
“네.”
“자넨 나보다 오래 살 거야.”
“장주님께 하도 욕을 먹어서요?”
척하면 척.
오랜 세월 때론 친구처럼, 때론 조력자로 함께 지내 온 두 사람이다.
염사인이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며 감개무량한 눈빛을 흘렸다.
“하늘 아래 저런 마을이 있긴 하군.”
염사인의 마음을 헤아린 장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이상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지요.”
“나도 저런 곳을 만들고 싶었다네.”
“우리 마을도 살기에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매일같이 까칠한 누구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것만 빼면요.”
“정작 그 사람은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던데?”
“우리 마을에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까?”
시치미를 뚝 떼는 장삼을 염사인이 지그시 쏘아봤다.
“됐고, 가지고 온 술 있지? 그거나 이리 내게.”
“안 됩니다.”
“왜?”
“치매라도 오신 겁니까? 당분간 술은 절대 엄금이라고 단 의원이 말했을 때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자네…….”
“……?”
“이제 그만 은퇴하지 그래?”
“누구 좋으라고요.”
“에잉!”
염사인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걷는 속도를 높였다.
장삼 역시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 * *
늦은 저녁.
풍진성은 내일 쓸 약재들을 점검하기 위해 창고를 찾았다.
그런데 먼저 온 선객이 있었다.
“이 밤에 어인 일이십니까?”
단악선이 웃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약재를 다듬고 배분하기 위해 놓여 있는 탁자.
평소와 다르게 그 위에는 약재용 작두와 유발 대신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다기가 올려져 있었다.
“모처럼 아저씨와 느긋하게 이야기나 나눌까 해서요.”
풍진성이 빙그레 웃으며 단악선에게 다가섰다.
“마침 차가 절실하던 참이었습니다.”
솜씨 좋게 차를 우려낸 풍진성이 단악선에게 찻잔을 건넸다.
“잠이 오지 않으시나 봅니다?”
“저도 가을을 타나 봐요.”
“하하하. 곡주님께서요?”
샐쭉한 단악선의 표정에 풍진성이 애써 웃음을 삼켰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놀리려고 한 것은 아닌데…….”
“제가 그렇게 어리게 보이나요?”
“아무리 커도 제 눈에는 늘 아이 같으시죠. 지금까지 보아 온 세월이 얼만데요.”
“하긴.”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복잡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초 아저씨와 염 대인을 보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
“오랜 세월 이어 온 인연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고요.”
“곡주님께서도 무당과 개방에 친구가 있지 않습니까?”
“못 본 지 너무 오래됐어요.”
“소식을 한번 알아봐 드릴까요?”
“괜찮아요. 수련하느라 바쁠 텐데요, 뭐.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아저씨와 있잖아요.”
단악선이 웃으며 풍진성을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저와 가장 오래된 인연이 아저씨더라고요.”
“제게도 그렇습니다. 곡주님이 태어나신 이후, 유년 시절을 비롯해 모든 성장 과정을 지켜봤으니까요.”
“헤헤. 그러니까요. 제게 있어선 무엇보다 소중한 인연인데 가끔 깜빡한다니까요.”
“괜찮습니다. 그만큼 바쁘게 지내시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그래도 오늘은 아저씨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요. 옛날이야기도 하면서요.”
풍진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더니 넌지시 농을 건넸다.
“일곱 살 때 스승님들 몰래 술을 훔쳐 먹었던 곡주님 이야기 같은 것 말이지요?”
단악선이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일부러 훔쳐 먹은 게 아니라니까요. 약주(藥酒)라 하시기에 어떤 맛이 나는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맛만 보려면 한 모금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요?”
“…….”
“창고 바닥에 곯아떨어진 곡주님을 발견한 두 분 스승님께서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하셨죠. 그도 그러실 만한 게, 술 항아리가 절반 넘게 비어 있었으니까요.”
“그건 술을 따르다 엎지르는 바람에……. 실제로 마신 술은 얼마 되지 않아요.”
“덕분에 저는 아주 곤욕을 치렀죠.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릅니다.”
무언가를 떠올린 풍진성이 무릎을 쳤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일도 있었군요.”
“……?”
“두 분 스승님께서 봉침(蜂針)의 효과에 대해 논의하신 것을 곁에서 들으시곤 다음 날 커다란 말벌을 잡아 오신 거 말입니다. 퉁퉁 부은 곡주님의 얼굴과 손발을 보고 학을 떼시던 두 분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런 일도 있었나요? 왜 전 기억에 없죠?”
“곧바로 기절하셨거든요. 두 분 스승님이 계셨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
“꿀벌보다 말벌이 훨씬 크니 효과도 더 뛰어나지 않겠냐고 하셨지요.”
“…….”
“제가 잠시 한눈판 틈에 감나무에 올라갔다 떨어진 건 기억하십니까?”
자꾸 소환되는 부끄러운 역사에 단악선이 민망한 눈빛을 흘렸다.
“그런 것들 말고요. 하나같이 제가 말썽 피운 것들뿐이잖아요.”
“하하, 괜찮습니다. 그래도 귀여웠으니까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하나같이 제겐 소중한 추억들입니다.”
“자꾸 그러시면 저 그냥 가요?”
짐짓 화난 표정으로 협박하는 표정마저 그저 귀엽게 느껴지는 풍진성이었다.
“이곳에서 저를 애 취급하시는 분은 아저씨가 유일할걸요?”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부쩍 성장한 단악선이었다.
이제는 자신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 키는 말할 것도 없었고, 눈빛이나 분위기 역시 제법 어른스러운 느낌이 묻어났다.
풍진성은 문득 감회가 새로웠다.
그 작던 말썽꾸러기 꼬마가 지금은 이곳 무위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어 있었다.
그런 단악선이 풍진성은 한없이 대견했다.
‘대체 언제 이렇게 컸을까.’
비록 가정을 꾸린 적은 없으나 어느 순간 커 버린 자식을 바라보는 아비의 심정이 이해 가는 순간이었다.
“두 분 스승님께서도 지금의 곡주님을 보시면 매우 자랑스러워하실 것입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무심코 입을 연 풍진성이 뒤늦게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역시나.
어두워지는 단악선의 표정에 풍진성 역시 덩달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을 깨며 풍진성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묻지 않으십니까?”
“뭐를요?”
“두 분……. 스승님들께서 돌아가신 이유에 대해서 말입니다.”
입을 다문 채 어색하게 웃는 단악선의 표정에 풍진성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얼마 전, 능 단주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의아해하던 단악선이 이어진 풍진성의 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바트얼지라는 달자에게 두 분의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물으셨다지요?”
“……!”
단악선이 멈칫했다.
해남도로 복귀하던 벽화령을 암습했던 마교 측의 암살자.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을 중독시켜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장본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연판장을 완성 시키는 걸 방해하기 위해 여러 음모를 주도했다.
범계위와 한설화의 소행으로 꾸미기 위해 비슷한 무공을 익힌 자들을 이용해 곤륜 문하를 암살하기도 했고, 공동 문하를 납치한 전력도 있었다.
“어째서 제게는 묻지 않으십니까?”
단악선은 잠시 동안 말없이 풍진성을 응시했다.
“저 때문에 거짓말을 하시는 아저씨는 보고 싶지 않아서요.”
“곡주님…….”
“그러니까……. 괜찮아요.”
풍진성이 무거운 눈빛으로 고심을 거듭했다.
그러기를 잠시.
풍진성이 이내 마음을 굳혔다.
언제까지 잡아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전에 스승님들의 죽음에 관해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네.”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마을에 끔찍한 전염병이 창궐했다고 하셨죠. 아무도 들어서지 못하는 그곳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부모님께서 가셨고요.”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다.
물끄러미 단악선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풍진성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제가 곡주님을 속였습니다.”
“왜죠?”
“스승님, 곡주님의 어머님께서 그리 지시하셨으니까요.”
“엄마가요?”
고개를 끄덕인 풍진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양해를 구한 풍진성이 창고 밖으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낡고 바랜 한 장의 서신이 들려 있었다.
풍진성이 그 서신을 단악선에게 내밀었다.
“이건 뭔가요?”
“스승님께서 제게 마지막으로 보낸 서신입니다.”
이어진 풍진성의 말에 단악선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두 분은 전염병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