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70)
신마의선-270화(270/500)
신마의선 (270)
“병으로 돌아가신 게 아니라고요?”
단악선의 반문에 풍진성은 한 차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단악선은 잠시 주저했다.
그러기를 잠시.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펼친 단악선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지금은 그 누구보다 눈에 익은 익숙한 필체.
엄마의 글씨였다.
몇 번이고 읽어 지금은 셀 수도 없는…….
의서를 펼칠 때마다 수없이 마주했던 필체가 두 눈에 선명히 새겨졌다.
―진성 보아라.
그렇게 시작한 서신을 가득 메운 것은 평소의 단정한 서체가 아닌, 급히 휘갈긴 듯한 초서체였다.
―이 서신이 도착했을 때쯤에 우리 부부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스승으로서 마지막 부탁을 하마. 앞으로 적어도 오 년 동안은 악선이와 떨어져 지내고, 신마곡에도 찾아가지 마라. 이후에도 네 곁에 감시자가 없다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평생 신마곡과 관련 없는 사람으로 살아라. 그리고 우리 죽음에 대해서 절대 알려고 하지 마라. 그 아이에게는 그저 우리가 사고를 당해 죽었다고 하면 된다. 네가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당시의 다급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서신의 내용에 단악선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신은 지필묵으로 쓰이지 않았다.
종이 대신 쓰인 헝겊은 치마 일부를 찢어 낸 것이었고, 그 위에 타다 남은 목탄(木炭)으로 글씨를 새겨 넣었다.
그마저도 마지막에는 부족했던지, 말미에는 검게 말라붙은 핏물이 목탄을 대신하고 있었다.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나머지 내용을 채워 넣은 것이다.
“…….”
단악선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서신의 형태를 빌렸지만 내용만큼은 유언이 분명했다.
잠시나마 이렇게라도 엄마의 흔적을 마주한 것이 너무나 반가웠지만 한편으론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서신의 내용대로라면 이제 두 번 다시 부모님을 만나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형언하기 힘든 슬픔이 밀려드는 와중에도 단악선은 애써 침착하려 애썼다.
‘대체 무엇이 그토록 두려워 이런 서신을 남기셨던 것일까?’
만에 하나라도 풍진성이 자신들의 행방을 수소문할까 싶어 자신들의 죽음에 관한 이유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남겨진 자를 걱정하는 마음이 여실히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단악선과 시선을 마주한 풍진성이 안타까운 눈빛을 흘렸다.
“스승님께서는 제가 이걸 전해 주길 바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곡주님께서 모든 걸 판단할 시기라 생각했습니다.”
예전처럼 신마곡 안에서만 지냈다면 모를까, 지금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의 위험과 맞닥뜨릴지 모르는 상황.
그래서 이제는 단악선도 진실을 알아야 할 때라 생각한 것이다.
“너무 늦게 전해 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아저씨 잘못이 아닌걸요.”
서신이 쓰인 헝겊을 기름 먹인 종이에 덧대 지금까지 보관해 온 것만 보더라도 풍진성이 얼마나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더구나 몇 번이나 반복해 읽었는지 서신에는 손때가 가득했다.
그때마다 매번 고민하고 갈등했을 풍진성의 고뇌가 느껴졌다.
단악선이 복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서신을 품에 끌어안았다.
툭툭.
서신 위로 떨어지는 단악선의 눈물을 마주한 풍진성은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단악선을 바라보는 것만이 당장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마치 유품을 대하듯 서신을 품에 안은 단악선이 천천히 돌아섰다.
들썩이는 어깨 너머.
숨죽여 흐느끼는 울음소리에 풍진성은 차마 단악선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단악선은 자신의 처소에 틀어박힌 채 좀처럼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단악선의 칩거가 길어질수록 풍진성의 마음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결국 사흘째에 이르러 풍진성은 아예 환자들을 주초운에게 맡긴 채 단악선의 처소 앞을 지키기 시작했다.
두문불출한 단악선의 모습에 좌불안석하는 사람들은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초악량을 위시한 범계위와 한설화 역시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단악선의 처소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저러다 몸이라도 상하는 건 아닐까 모르겠수.”
우려가 가득 담긴 범계위의 음성에 초악량도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둘째 치고 마음이 걱정이다. 다치면 약도 없는 것이 마음이니까.”
“한번 몰래 들어가서 살펴보고 올까?”
“아서라.”
초악량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단 의원을 믿고 기다려야 할 때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초악량도 내심 그 말에 흔들렸다.
단악선에 대한 걱정이 앞서 며칠째 잠을 설치고 있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비록 내색하진 않았으나 단악선은 혹시라도 모를 부모님의 생환을 기대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가슴은 부모님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의가 직접 남긴 서신을 통해 가혹한 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실낱같던 희망마저 속절없이 무너진 지금, 그 마음이 오죽할까 싶었다.
말없이 서 있던 한설화가 불쑥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만약 저 아이가 복수를 하고 싶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서신에 관한 내용은 이미 풍진성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정확한 흉수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마의는 누군가에 의해 자신들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범계위가 정색하며 소리쳤다.
“당연히 우리가 도와야지!”
평소라면 매번 딴지를 걸었을 한설화도 이번만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범계위의 말에 동의했다.
반면 초악량은 눈빛이 무거워졌다.
복수는 당연히 피를 동반하는 법.
단악선이 과연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무엇보다 당장은 복수의 대상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서신의 내용만으로는 흉수의 정체를 짐작해 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덜컹.
처소 입구가 열리며 단악선이 걸어 나온 것도 그때였다.
“단 의원 괜찮아?”
가장 먼저 달려가 묻는 범계위를 향해 단악선이 푸석한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다.
“걱정 끼쳐 죄송해요.”
사흘 만에 부쩍 초췌해진 단악선의 모습에 풍진성은 억장이 무너졌다.
풍진성과 시선이 마주치자 단악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풍진성에게 다가가 가만히 손을 뻗더니 그의 손을 감싸 안았다.
“곡주님……?”
의아해하던 풍진성이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두 눈이 붉어졌다.
“아저씨께서 소중하게 보관해 주셔서 이제라도 엄마의 서신을 볼 수 있었어요. 덕분에 늦게나마 마음의 결심이 섰고요. 엄마 말씀대로 아저씨가 계셔서 다행이에요.”
따듯한 눈빛으로 풍진성을 위로하던 단악선이 신마삼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 잠시 무위를 떠날까 해요.”
“어디를 가려는 게냐?”
초악량의 반문에 단악선이 그동안 고심한 결과를 말했다.
“진실을 알고 싶어요.”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본인이라도 반드시 그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우리가 도와줄게!”
초악량과 한설화도 고개를 끄덕여 범계위와 뜻을 같이했다.
“고마워요. 모두.”
감사한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이는 단악선을 향해 초악량이 대견한 눈빛을 건넸다.
“속이 속이 아닐 텐데, 잘 견뎌 내고 있구나.”
단악선이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은 지금도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서두를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부모님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냉철한 이성이 필요하니까요.”
초악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떠나겠다는 것으로 보아 이미 목적지를 정한 모양이구나?”
“네.”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이 있더냐?”
“처음에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계속 고민했어요.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전혀 없었거든요.”
이때 단악선과 시선이 마주친 풍진성이 우울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전 그 당시 신마곡을 떠나 있어서 스승님들의 행적을 알지 못합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으나 허사였지요.”
“아저씨도 많이 힘드셨겠어요.”
이 상황에서도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는 단악선의 말에 풍진성은 울컥했다.
그 말대로였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단악선을 찾아가 묻고 싶었다.
혹시 최근에 무슨 일은 없었는지, 두 분 스승님들께서 어디로 간다 하시는 말씀은 없었는지…….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어린 단악선에게 차마 곧이곧대로 서신의 내용을 알릴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스승님의 부탁 때문에 단악선과 거리를 두어야만 했다.
단악선이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우선은 중원을 벗어나 새외의 토번(吐蕃)으로 가 보려고 해요.”
“토번?”
범계위의 반문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포달랍궁(布達拉宮)이 있는 곳이죠.”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곳이라 일행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교일치(政敎一致) 사상이 뿌리내린 그 지역을 지탱하는 서장불교.
그런 그들의 성지이자 총본산이 바로 포달랍궁이었다.
또한 그 자체로 강력한 새외무림 세력이기도 했다.
소위 변황오세(邊荒五勢)라 불리는 다섯 곳의 새외 문파와 달리 그들은 오랜 세월 직접적으로 무림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달랍궁이 지닌 역사만큼이나 그들의 저력과 영향력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는 가운데 단악선이 설명을 이어 갔다.
“부모님과 헤어지던 당시의 상황을 몇 번이고 다시 떠올려 봤어요.”
단악선이 며칠 동안 칩거했던 이유는 그저 단순히 감정만 추스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부모님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기억 속에서 실마리 하나를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 신마곡을 떠나기 전, 어떤 라마승이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아!”
풍진성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지병에 중독이 겹쳤는데, 억지로 독과 싸우다 결국 주화입마에 빠졌던 분 말씀이시죠?”
“맞아요. 그때 부모님께서 처음으로 협력해 그분을 살려 내셨죠. 그분의 증상이 절맥과 매우 유사했고, 그분을 치료한 것을 발판 삼아 절맥의 치료법을 찾으셨어요.”
단악선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온 건 그 직후였다.
“그분께서 제게 벌모세수(伐毛洗髓)를 해 주셨고요.”
신마삼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세 사람도 전에 한 번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바로 무공 전수를 위해 단악선의 몸을 처음 살폈을 때였다.
단악선이 지닌 근골은 그야말로 천고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
임독양맥은 말할 것도 없었고, 생사현관 역시 이미 타통된 상태였다.
거기에 기경팔맥과 십이경맥 역시 잘 닦여 있었다.
당시 단악선은 자신이 태중에 있을 때 마의가 온갖 영약을 복용했고, 태어난 직후에는 벌모세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었다.
“그분에게 여쭤보면 부모님께서 신마곡을 떠난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분이 신마곡을 떠나신 뒤, 부모님께서는 매우 분주하게 여행을 준비하셨거든요. 아마 그분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분명해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단악선이 선언하듯 입을 열었다.
“일단 포달랍궁에 가서 그분을 만나 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