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75)
신마의선-275화(275/500)
신마의선 (275)
그날 오후, 단악선은 달뢰라마와의 접견을 요청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 번 달뢰라마를 마주할 수 있었다.
“혹시 마교의 독에 중독되었을 당시의 기록을 볼 수 있을까요?”
“그야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달뢰라마는 흔쾌히 단악선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두 분께서 떠나시며 해독제 조제법과 응급 상황을 대비한 침술 몇 가지를 남겨 주셨습니다.”
“다른 기록들은 없나요?”
“두 분께서 직접 남겨 주신 것은 그게 전부입니다만…….”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달뢰라마가 신중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전문적인 기록이라기에는 부족하지만 당시 저희 쪽 의승들이 증상과 예후를 따로 기록해 둔 보고서들이 있습니다.”
단악선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행이네요. 독과 관련해 그 당시 작성되었던 모든 기록을 열람하고 싶어요.”
달뢰라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달뢰라마가 제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이 초악량이 단악선을 향해 물었다.
“무엇을 하려 하는 것이냐?”
“독을 만들어 보려고요.”
뜻밖의 대답에 초악량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범계위는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여기 있는 라마승들을 다시 중독시키려는 거구나?”
황당해하는 초악량과 한설화를 뒤로한 채 범계위가 히죽 웃었다.
“좋은 생각이야. 하독은 내게 맡겨.”
초악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신의와 마의께서 힘들게 치료한 사람들을 왜 다시 중독시킨다는 것이냐?”
“힘들게 치료해 줬는데도 단 의원 부모님을 못 지켰잖수. 그럼 당연히 원래대로 돌려놔야지.”
“너…….”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초악량이 순간 멈칫했다.
뜻밖에도 빙긋 웃는 단악선 때문이었다.
“범 아저씨의 농담은 언제 들어도 재밌어요.”
“어? 어어……. 그, 그렇지? 기분 좀 풀렸어?”
“덕분에요.”
당황한 범계위의 표정을 확인한 초악량이 짧은 코웃음과 함께 핀잔을 던졌다.
“너 때문에 저녁 공양은 맹물만 올라오겠구나.”
괜히 민망해진 범계위가 초악량을 걸고넘어졌다.
“분위기 파악 좀 하슈. 기껏 단 의원을 웃게 만들었는데, 눈치 없이 산통이나 깨고 말이야.”
“뭐, 인마?”
초악량은 내심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범계위에게 눈치 없다는 소릴 듣게 될 줄이야!
“사람이 여유가 없어, 여유가……. 그러니 여태 배필도 없이 혼자 처량하게 늙어 가지.”
“……!”
달뢰라마의 지시를 수행하던 라마승들이 흠칫하며 초악량 쪽을 돌아봤다.
말없이 범계위를 노려보는 초악량의 눈.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끔찍한 살기가 어느새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흥!”
범계위 역시 지지 않고 살기를 드러냈다.
달뢰라마가 단악선을 향해 말을 건넨 것도 그때였다.
“그런데 당시의 독을 재현하려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단악선이 선선히 대답했다.
“그때 사용된 독이 평범한 건 아닌 것 같아서요. 내가 고수들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장기간에 걸쳐 은밀하게 중독되었고, 그것이 내공까지 건드려 주화입마를 야기했다면 분명 고명한 제조 방법이 사용되었을 거예요.”
달뢰라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단악선이 제때 입을 열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포달랍궁 건립 이래 전례 없는 대형 악재가 닥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꼴 보기 싫다는 듯 홱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을 뒤로한 채 단악선이 설명을 이어 갔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영약을 제조할 때는 제조자의 특별한 방법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게 가문의 비전일 수도 있고, 깨달음을 통해 얻은 개인만의 비법일 수도 있고요. 그리고 그건 독도 마찬가지예요. 어쨌거나 만든 사람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죠.”
“독을 제조한 사람을 밝혀내려는 것이냐?”
초악량의 물음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가 만든 거라며?”
볌계위의 반문에 단악선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이제껏 제가 알던 마교의 독과 여러모로 달라서요. 그들은 치명적이고 강력한 독을 사용하지만 대부분 효과가 즉시 발현되는 신경독을 주로 사용해요.”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정반대였다.
“포달랍궁의 의술로도 병이라 생각할 만큼 은밀하고 느리게 하독이 진행되었어요. 무색무취(無色無臭)에 흔적도 남기지 않는 데다, 거의 동시에 증상이 발현되었어요. 아무래도 독 제조 분야의 탁월한 전문가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물론 기록을 확인해 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요.”
잠시 후.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네요.”
눈앞에 산더미처럼 차곡차곡 쌓인 서류들을 헤집어 가며 무언가를 확인하던 단악선이 심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 이상으로 높은 경지의 제조법을 사용했어요. 역시 직접 만들어 봐야겠어요.”
“그런데 기록만으로 독을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한 겁니까?”
달뢰라마의 물음에 단악선이 신중하게 대답했다.
“해독제 제조법을 통해 독약에 쓰인 성분을 어느 정도는 유추해 낼 수 있어요. 부모님께서 남긴 침술 역시 충분한 참고가 되고요. 발현되는 증상의 순서와 처방 방법을 되짚어가면 독약 제조에 쓰인 재료들의 구성비를 얼추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거기에 포달랍궁에서 기록한 임상 기록과 교차해 비교하다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한적한 장소가 있을까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는 일인 데다, 상당한 위험을 동반하는 일인 만큼 안전하고 독립적인 공간이 필요했다.
“차라리 무위로 돌아가서 연구하는 건 어떻겠느냐?”
한설화의 제안에 단악선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무위라면 풍진성이나 주초운처럼 뛰어난 의원들과 머리를 맞댈 수 있었다.
하지만 분명 도중에 포달랍궁 측에 물어볼 것이 생길 것이다.
그때마다 포달랍궁과 무위를 오갈 수는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한적한 사원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방치되어 낡긴 했습니다만, 사람을 보내 손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뜻 부탁을 수락해 준 달뢰라마를 향해 단악선이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러곤 일행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모르니 신마상단에 연락해야겠어요. 필요한 약재들을 공급받아야 할 것 같아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단악선은 다시금 눈앞의 서류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지 알 수 없는 만큼 한시라도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악선은 본격적으로 독약 제조에 뛰어들었다.
* * *
“후우…….”
눈앞에 펼쳐진 자금성(紫禁城)의 으리으리한 광경에 능소밀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돈을 얼마나 쏟아부은 거야?’
무려 십사 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완공된 자금성의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자미원(紫微垣)에서 따온 자(紫)와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뜻에서 따온 금(禁).
무려 십만 명이 넘는 장인과 백만 명 이상의 노동력을 갈아 넣어 완성한 자금성의 화려함과 웅장함은 그 이름에 부족함이 없었다.
걸음을 옮기던 능소밀이 황성의 남문인 승천문(承天門) 앞에 멈춰 섰다.
“오랜 세월 군에 몸담고 있었지만 이렇게 황상께서 거하시는 곳을 직접 보게 되는 영광을 누릴 줄이야……! 이게 다 능 단주 덕분이요. 내 나중에 술 한잔 거하게 사리다.”
이곳까지 자신을 호위해 온 정오품, 정천호의 말에 능소밀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람 속도 모르고…….’
그렇다고 마냥 좋아하는 그의 순진함을 탓할 수도 없었다.
평생을 군문에 몸담아 온 그는 저 안에서 매일같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온갖 귀계가 난무하는 무림을 흔히 도산검림이라 표현하지만 음험하기로 따지자면 정계에 몸담고 있는 높으신 나으리들과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하물며 그 정치인과 관료들의 정점에 선 황제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당금 황제는 향락에 취해 불행한 사고로 요절한 선대 황제와 달리, 닳고 닳은 노신들조차 쥐락펴락할 만큼 뛰어난 자로 알려져 있었다.
젊은 만큼 의욕적이고 야심이 컸으며, 그만큼 과감한 정책들을 단행했다.
무엇보다 갑작스럽게 제위에 오른 만큼 권력 기반이 약했던 황제는 기존 공신들의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고, 이를 통해 확실하게 권력을 거머쥐었다.
저 멀리 도열해 있던 금의위 군사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온 것도 그때였다.
“장등일세.”
오직 자신의 이름을 밝혔을 뿐인데도 호위군을 지휘하던 정천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상대의 복장만으로도 황제의 직할군인 어림친위군(御臨親衛軍) 소속의 장수임을 알아본 것이다.
장등이라 자신을 소개한 장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능소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대가 신마상단의 상단주인가?”
“그렇습니다.”
“따르게.”
뒤로 물러난 위소의 병력들을 대신해 어림친위군이 순식간에 능소밀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 일사불란하고 삼엄한 군기에 능소밀은 새삼 자신이 황궁에 와 있음을 실감했다.
그들을 따라 황성 내부로 들어선 능소밀은 엄청난 규모의 광장과 건물을 마주할 수 있었다.
황제의 즉위식을 비롯해 국혼과 조회 등, 국가적인 중대사 때 주로 사용되는 봉천전(奉天殿)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그대로 봉천전을 지나쳐 한참을 걸어간 능소밀이 도착한 곳은 뒤편에 위치한 화개전(華蓋殿)이었다.
봉천전에서 공식 행사를 치르기 전에 황제가 잠시 대기하며 휴식을 취하는 전각이었다.
그러나 평소에는 각지에서 올라오는 상소문을 읽고 처결하는 공간으로 사용되는 곳이기도 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능소밀은 화개전에 들어서기 무섭게 쩌렁한 외침과 함께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이미 이곳에 오는 동안 황실 예법에 대해 귀에서 피가 나도록 들어 온 그였다.
“……?”
능소밀은 기분이 이상했다.
예를 올린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곤란한 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뒤통수와 목덜미에 날아와 박히는 따가운 시선이었다.
그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마삼존을 상대로 단련된 감각 덕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듣자니 신마상단에서 받은 돈은 뒤탈이 없다지?”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능소밀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거였나?’
능소밀은 비로소 자신이 이곳에 불려 온 이유가 신마상단에 대한 청문회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서역과의 교역으로 상단의 기반을 닦아 일어선 신마상단이다.
당금 조정은 황실의 허락하에 이루어지는 조공 무역외에는 외부 나라와 교역은 철저히 금지된 상태.
그래서 밀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이는 명백한 불법.
이를 위해 능소밀은 중앙 정계를 비롯한 지방 관리들을 포섭하려 수많은 선물을 뿌렸다.
또한 본래 납부해야 할 금액 이상의 세금을 약속했고, 황실에도 교역을 통해 얻은 값진 보물들을 진상했다.
한데 그것이 이제 자신의 목을 겨눈 칼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고개를 들어라.”
황제의 음성에 능소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옥좌에 앉아 날카로운 눈빛을 던지는 황제를 중심으로 좌우로 어림친위군이 시립해 있었고, 그 아래로는 수십 명에 달하는 문무백관이 도열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턱을 괸 채 능소밀을 유심히 응시하던 황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최근 중원에서 가장 급격히 성장한 상단이라 들었다.”
능소밀이 곧장 대답했다.
“모든 것이 하해와 같은 폐하의 은혜 덕분이옵니다.”
“세금도 성실히 납부했다지?”
“예. 모든 사업에 부과되는 세금에 항상 일 할을 더 얹어 납부하고 있나이다.”
“그래?”
황제가 흥미로운 눈빛을 드러냈다.
“그 이유는?”
“더 내는 것은 폐하께서 어질게 써 주실 것을 의심치 않으니 아까울 것이 없으나, 행여 착오가 있어 적게 내는 것은 폐하를 속이는 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옵니다.”
황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때였다.
“폐하, 황공하오나 신이 감히 한 말씀 아뢰옵길 청하나이다.”
한눈에 봐도 고위 관리가 분명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평소 과묵하던 좌도어사(左都御司)가 어인 일로? 좋다. 허한다.”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좌도어사라 불린 창백한 얼굴을 지닌 문관이 능소밀을 노려봤다.
“저자의 말을 믿어서는 아니 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