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81)
신마의선-281화(281/500)
신마의선 (281)
달뢰라마가 건넨 물건.
그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금패였다.
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범어(梵語)가 빼곡하게 새겨진 금패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내력을 지닌 것이 분명해 보였다.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으나, 저희 포달랍궁의 귀빈이라는 증표입니다.”
달뢰라마가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또한 우리의 신념에 위반되지 않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기꺼이 돕겠다는 약조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신의와 마의. 두 분께 저를 비롯한 본 궁이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은혜를 갚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분들을 지켜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그 업을 풀어 낼 수 있도록 부디 도와주십시오.”
간곡한 달뢰라마의 눈빛에 단악선은 결국 금패를 받아 들었다.
“그렇다면 감사히 받을게요.”
“아주 작은 일이라도 상관없으니 도움이 필요하시면 주저 없이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주 잡은 손과 눈빛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뵐 때까지 부디 건강하세요.”
그렇게 달뢰라마와 인사를 나눈 단악선은 수많은 라마승들의 환송을 받으며 포달랍궁을 떠났다.
그날 밤.
작은 모닥불에 의지해 노숙을 하던 단악선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참을 뒤척이다 단악선이 결국 신형을 일으켰다.
그러곤 두 팔로 무릎을 껴안은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다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
흘러내리듯 사위를 적시는 고아한 달빛이 위로하듯 단악선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잠이 오지 않느냐?”
“아! 아주머니. 저 때문에 깨셨어요?”
자신의 어깨에 모포를 감싸 주는 한설화에게 단악선이 미안한 눈빛을 건넸다.
“요즘 통 잠을 못 자는구나.”
단악선이 쓰게 웃었다.
“머리가 복잡해서요.”
그나마 독을 연구하며 집중할 때는 잠시라도 고민을 잊을 수 있었다.
한데 그 일을 마치고 나니 새삼 온갖 어지러운 상념들이 밀려들었다.
어느새 부스스 일어난 초악량과 범계위도 단악선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걱정 마, 단 의원. 다 잘될 거야.”
범계위가 커다란 손을 뻗어 단악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단악선이 웃으며 범계위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우리가 언제나 네 곁에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초악량의 눈빛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 단악선은 자신을 지탱해 주는 세 사람의 존재가 더없이 고마웠다.
약해진 모닥불을 말없이 응시하던 단악선이 발치에 놓인 나뭇가지를 꺾어 그 안에 던져 넣었다.
타닥타닥.
꺼져 가던 불길이 다시 살아나며 주위를 밝혔다.
“그래도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고 있어요.”
이글거리는 단악선의 눈빛을 확인한 범계위가 씨익 웃었다.
“그냥 이대로 마교로 쳐들어가는 건 어때? 초 형과 마녀가 손을 보태면 충분히 해 볼 만할 것 같은데?”
범계위의 제안에 초악량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단순한 건 둘째 치고 무턱대고 일단 지르고 보는 저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단 의원 말 아직 안 끝났다.”
초악량의 핀잔에 범계위가 나직이 툴툴댔다.
“쳇, 대초자곤만 있었어도 나 혼자 쳐들어가서 쓸어 버렸을 텐데…….”
그 말에 초악량이 뜨끔했다.
초악량이 슬쩍 고개를 돌려 한설화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한설화의 시선은 오직 단악선을 향해 있었다.
단악선이 웃으며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사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참고 있어요.”
“왜 참아야 하는데?”
여전히 불만을 감추지 못하는 범계위를 위해 단악선이 설명을 이어 갔다.
“이대로 당장 쳐들어간다 해도 승산이 낮으니까요. 설사 우리가 이긴다고 해도 그들은 다시 숨어 버릴 가능성이 커요. 저들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해요.”
“하긴 기련산에서도 도망가 버린 놈들이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범계위가 단악선을 향해 물었다.
“그럼 어떻게 복수할 건데?”
“우선은 그들이 계획했던 모든 걸 무산시킬 거예요. 그리고 천천히 숨통을 조이면서 차근차근 궁지로 몰 거예요. 최후까지 궁지로 몰려 마지막 발악을 할 수밖에 없도록요.”
예상보다 훨씬 냉정하고 차가운 계획에 범계위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초악량과 한설화도 마찬가지.
차분한 단악선의 눈빛은 처음 부모님의 죽음을 인지했을 때와 확연하게 차이가 있었다.
“실패하지 않을 거예요. 조금 돌아가더라도 확실하게……. 반드시 제 손으로 마교를 무너트릴 거예요.”
* * *
무위에 도착한 단악선은 가까운 사람들을 신마곡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교에 대한 자신의 뜻과 생각을 명확하게 밝혔다.
행여나 다른 의견이 있으면 경청하려 했지만, 모두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럼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씀드릴게요.”
단악선의 시선이 능소밀에게 향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능소밀이 겪은 상황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능 아저씨는 무위를 안전하게 만드는 데 주력해 주세요.”
“이미 인근의 위소와는 협력을 약조받았습니다. 또한 소적산에게 상단주의 자리를 맡기고, 저는 제가 지닌 모든 정보력을 총동원해 신강 쪽을 주시하는 데 전력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새로운 상단주로 소 아저씨를 생각하시는 건가요?”
감찰어사라는 벼슬을 지니게 된 이상 상단주 업무를 병행하는 건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익과 공권이 상충되는 부분 때문이었다.
“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그럼 그 부분은 단주님의 판단에 맡길게요. 새로 진행하는 사업에 관해서는…….”
능소밀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황제의 재가가 떨어졌으니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가 틀어진다 싶으면 황제에게 바로 보고해 바로잡으면 그뿐.
단악선이 사무심을 향해 고개를 돌린 것도 그때였다.
“총관님은 이제 신마의가가 아닌, 신마곡의 총관으로 돌아와 주세요.”
신마의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마교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총괄해 주세요. 또한 훗날 있을 마교와의 싸움에 우리와 함께 싸워 줄 무림인들을 모아 주셨으면 해요. 규모보다 전력에 집중된, 소수 정예의 고수들을 중점적으로 포섭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 외에도 할 일이 많을 거예요. 나중을 대비한 자금과 물자 등도…….”
“맡겨 주십시오.”
자신감 넘치는 사무심의 눈빛에 단악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번도 자신을 실망시킨 적이 없는, 출중한 그의 능력을 잘 아는 까닭이다.
단악선은 마지막으로 풍진성을 바라봤다.
“앞으로 신마의가는 풍 아저씨께서 이끌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풍진성이 나직이 한숨을 흘리며 걱정 가득한 눈빛을 건넸다.
스승님들을 해친 흉수가 설마 마교였다니.
그런 그들을 상대로 복수를 천명한 단악선이 당연히 염려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진성은 늘 그래 왔듯 흔들림 없이 단악선을 지지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 왔기에 누구보다 단악선을 잘 아는 그였다.
틀림없이 오래 고민하고 신중하게 결정을 내렸을 터.
“그리 결정하셨다면 저 또한 최선을 다해 곡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스승님들의 핏줄인 단악선이 복수를 천명했거늘, 제자인 자신이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날 밤.
단악선이 초악량의 처소를 방문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절명전을 초악량 앞에 내려놓았다.
“왜 이걸 보여 주는 것이냐?”
“아저씨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요.”
물끄러미 단악선을 응시하던 초악량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라. 놈들과의 은원을 나중으로 미뤄 두마.”
마교가 사용한 독이 당가의 방식으로 제조되었다는 건 확인했지만 저들이 얼마나 깊이 관여했는지는 아직 모르는 상황.
일단 당가를 방문하기로 결정한 이상 과거의 원한 때문에 저들과 충돌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단악선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
“이번 일은 전적으로 아저씨께서 결정하는 방식을 따를 생각이에요.”
“내가 결정하는 방식?”
“저는 사천당가를 믿을 수가 없어요.”
단악선이 설명을 이어 갔다.
“그들은 힘을 합쳐 아저씨를 죽이려 했어요. 그리고 당시의 일에 대해 소림과 남궁세가는 분명하게 사과를 했었죠. 하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사과는커녕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 오히려 뻔뻔하게 절명전을 돌려 달라며 요구하기까지 했죠.”
“생각해 보니 그렇구나.”
“제가 찾아간다고 해서 저들의 태도가 달라질까요?”
그럴 리가.
초악량이 쓰게 웃었다.
“다시 간계를 부리려고 하겠지. 제갈연의 뒤통수를 칠 때도 그랬으니까.”
제갈연이 무림맹주에 등극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인자 격인 당가타주를 보내 곁을 지키게 했지만, 그녀가 몰락할 낌새를 눈치채자 망설이지 않고 당령을 쳐 내 그녀와의 관계를 끊어 버린 당가였다.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그들은 필시 저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을 거예요.”
부모님이 당가를 싫어했던 만큼 당가 역시 부모님을 싫어했다.
독본(毒本)이라 불리며 중원 내에서도 명성 자자한 당가였지만 어머니는 그런 그들을 옹졸한 겁쟁이들이라 힐난했고, 아버지 역시 군자의 도리를 모르는 소인배들이라며 어머니와 뜻을 함께했었다.
그런 만큼 당가가 자신을 환영할 리 만무했다.
그것도 친선을 도모하고자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마교와 연관된 혐의를 추궁하기 위한 목적이니 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궁금할 정도였다.
“아저씨는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초악량이 싸늘한 눈빛을 흘렸다.
“놈들은 결코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 말에 단악선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 * *
같은 시각.
범계위는 단악선이 수련하던 뒤뜰 후원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단악선이 수련에 사용했던 목봉을 집어 든 범계위가 가볍게 몇 번 휘둘러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아니야.”
목봉을 휙 집어 던진 범계위가 다른 무기를 집어 들었다.
단악선과 대련을 위해 임시로 구입한 육중한 철봉이었다.
철봉의 무게를 가늠한 범계위가 이번에는 제법 마음에 들었던지 흡족한 표정으로 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한설화가 그 모습을 목격하고 지나가듯 물었다.
“달밤에 뭐 하는 짓이야?”
“마교랑 붙으려면 무기가 필요할 거 같아서. 쳇, 이것도 글렀군.”
휘두르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휘어진 철봉을 집어 던지며 범계위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툴툴댔다.
“소림에 한번 다녀와야 하나?”
그곳에 두고 온 대초자곤이 못내 아쉬웠다.
평소에는 성명병기가 없어도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그였지만 상대가 마교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거긴 없으니까.”
무심코 입을 연 한설화는 이어진 범계위의 질문에 멈칫했다.
“응? 거기 없으면 어디 있는데?”
“…….”
곤혹스러운 눈빛을 흘리던 한설화가 홱 돌아섰다.
“야! 마녀! 거기 서! 너 뭔가 알고 있지?”
집요하게 따라붙는 범계위의 모습에 한설화가 아미를 찡그렸다.
잠시 후.
벌컥.
방문이 갑자기 열리고 범계위가 들어서자 초악량이 인상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던 와중에 갑자기 찾아온 범계위가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뭐라 한 소리 해서 쫓아내려던 순간.
“내놔! 내 대초자곤!”
벼락같은 범계위의 일갈에 초악량이 침음성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