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83)
신마의선-283화(283/500)
신마의선 (283)
잠시 후.
현중각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나이 지긋한 노인들.
당곡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당가의 장로들이었다.
그들은 상석에 앉아 있는 당곡에게 가볍게 묵례를 한 뒤 정해진 각자의 자리에 나누어 앉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어두운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 대충 상황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현 당가의 가주 당곡이 차가운 눈빛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당곡의 물음에 여섯 명의 장로들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고심을 거듭하며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장로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당운심이 하얀 수염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흠, 가주께서는 걱정이 너무 지나치신 것 같소.”
그 말에 몇몇 장로가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당금의 그 어떤 무림 세력도 오백 년 넘게 사천의 패주로 군림해 온 우리 가문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소이다.”
“그 말은 별것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떨지 말라는 말씀이시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당곡이 탁자를 내리쳤다.
탕!
“정말 태평하기 짝이 없군! 그러고도 당신들이 본 가의 장로들이라 할 수 있소?”
평소와 다르게 험악한 당곡의 눈빛과 말투에 장로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그들을 향해 당곡이 진노를 쏟아 냈다.
“청성파의 장문인이 누구에게 죽었는지 잊었소?”
“……!”
흠칫하는 장로들을 향해 당곡이 말을 이어 갔다.
“그가 괜히 혈수존자라는 불길한 명호를 지닌 것이 아니오. 끔찍한 참사를 겪은 모용세가의 전철을 밟고 싶소이까?”
눈에 띄게 동요하는 장로들을 당곡은 한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장로들을 향해 당곡의 질책이 이어졌다.
“초악량. 그자는 결코 원한을 잊지 않는 독종이오.”
“가주께서는 그자가 원한을 갚기 위해 이곳으로 오고 있다 확신하는 게요?”
“그것 말고 달리 이유가 있습니까?”
장로들을 대변해 당운심이 반문했다.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이오? 만약 그가 원한을 갚겠다는 의지가 있었다면 어찌 당령 그 아이를 그냥 두었겠소? 이미 몇 차례나 조우했던 걸로 아는데?”
당곡이 바로 반박했다.
“처음 조우했을 당시에는 단악선이라는 꼬마가 연판장을 완성하기 위해 아미파를 방문 중이었소. 그곳에서 피를 보는 것이 연판장 완성에 걸림돌이 되리라 여겼던 것이오. 개방 방주의 장례식장이나 화산파 장문인의 고희연 역시 마찬가지. 자신과 함께 움직이는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참아 왔을 뿐이외다.”
장로들이 입을 다물었다.
당곡 역시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던지 짜증과 힐난의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장로들을 다그쳤다.
“이제 대응책을 말씀해 보시오들.”
시선을 외면한 채 침음하는 장로들.
그 한심한 작태에 당곡이 결국 노성을 터트렸다.
“방법을 모색하라고! 이 한심한 늙은이들아!”
쩌렁한 그의 일갈에 장로들의 얼굴이 휴지처럼 구겨졌다.
명색이 자신들은 집안의 어른.
아무리 분노했다 하더라도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반면 당곡은 당곡대로 속이 터졌다.
전 가주의 혈채를 갚아야 한다고 주야장천 떠들어 대던 자들이 막상 위기가 코앞에 닥치니 잠자코 있는 게 한심했다.
“가주께서는 어찌하셨으면 좋겠소?”
이윽고 입을 연 당운심의 물음에 당곡이 주저앉고 대답했다.
“금독창(禁毒倉)을 열어 주시오.”
“헛!”
해연히 놀란 장로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도 그럴 것이 금옥은 강호에서 사용이 금지된 금용독(禁用毒)을 봉인해 둔 창고였기 때문이다.
“빈대 하나 잡자고 초가삼간을 모조리 태우겠다는 말이오?”
당운심의 우려에 장로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괜히 금용독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무림과 협의해 사용을 금지한 절독을 다시 푼다?
이는 무림의 모든 문파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였다.
당장 사마외도로 지탄받는다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당곡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풍으로는 들불을 끌 수 없소. 오히려 불길을 부추길 뿐이지.”
하물며 천하오절 중 한 명인 혈수존자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소. 그자는 결코 대화로 은원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
“게다가 달리 생각하면 그자의 방문은 본 가에게는 기회가 될 것이오.”
“기회?”
“다행히 놈은 혼자 이곳으로 오고 있소. 망산초자와 빙옥선자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본 가의 힘만으로 놈을 처리할 수 있소.”
이곳은 성도.
당가의 앞마당이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이곳에서만큼은 모든 증거와 여론을 얼마든지 자신들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당가에 의지해 삶을 이어 가는 모든 이들의 목소리가 당가를 위한 명분이 되어 줄 터.
“대체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당운심이 말끝을 흐리자 당곡은 말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 미소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날카로운 살의.
이를 느낀 당운심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운심은 입술을 깨물며 고심을 거듭했다.
그런 그를 향해 당곡은 그 어떤 독촉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앉은 채 가만히 장로들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당운심이 무거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허(許)……하리다.”
당곡이 섬뜩하게 웃었다.
“여기는 사천당가요. 적의를 지니고 들어선 이는 누구라도 살아 돌아갈 수 없는 곳이지. 그 사람이 설사 천하오절이라 하더라도 말이오.”
무거운 한숨을 내쉰 당운심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현중각 밖으로 나가 버렸다.
뒤이어 부랴부랴 전각을 빠져나가는 장로들의 뒷모습을 보며 당곡이 스산한 웃음을 말아 올렸다.
* * *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겨울비.
차가운 한기를 품은 부슬비를 뚫고 객잔에 들어서는 인영이 있었다.
초악량이었다.
가늘지만 종일 쏟아지는 비로 인해 객잔 안은 한산했다.
예상치 못한 비에 발이 묶인 몇몇 상인들만이 탁자 위의 음식과 술을 벗 삼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객잔 내부를 둘러보던 초악량의 눈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평소의 무심한 눈빛을 회복한 초악량이 호젓한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쫘라락.
주방 쪽 입구의 주렴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낸 중년의 사내가 초악량이 앉은 탁자로 걸어왔다.
“우기(雨期)도 아니건만 무슨 놈의 비가 이렇게 오는지, 원.”
중년인이 미리 준비해 둔 수건을 초악량에게 건네며 푸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문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화주 한 병과 간단한 안주를 부탁하오.”
“저희 영진루(榮眞樓)에는 처음이십니까?”
“그건 왜 물으시오?”
그 말을 묻기를 기다렸다는 듯 중년인이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이곳 성도에서 백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저희 영진루의 음식은 인근에서 소문이 자자합니다. 마파두부와 같은 서민적인 음식부터 고승조차 그 맛에 반해 담을 넘었다는 불도장(佛跳牆)까지, 어느 것 하나 유명하지 않은 것이 없지요.”
그의 자화자찬에 초악량은 못 미더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전체적으로 낡고 허름한 내부는 어둡다 못해 음침한 느낌마저 자아냈기 때문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과연 이런 곳이 음식으로 유명할까 싶었다.
그런 초악량의 표정을 읽었음인지 중년인이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물론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건물이 좀 낡긴 했지만 음식만은 일품입니다.”
그가 들고 있던 찻주전자를 탁자 위에 올렸다.
“저희는 손님께 내어 드리는 차부터가 여느 곳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손수 차를 따른 중년인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건넸다.
“차가운 비는 몸을 상하게 하지요. 아주 질 좋은 용정입니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우선 이걸로 몸부터 녹이시지요.”
“고맙소.”
초악량이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차 맛이 훌륭했다.
특히나 입 안 가득 퍼지는 향긋함은 이제까지 맛본 차들 가운데 단연 손꼽힐 만큼 훌륭했다.
“좋은 차로군.”
초악량의 감탄에 중년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귀한 손님에게만 내어 드리는 특별한 차니까요.”
중년인의 입가에 맺혀 있는 웃음이 짙어졌다.
“그 손님이 혈수존자라면 말할 것도 없고.”
사람 좋던 미소 대신 자욱한 살기를 피워 올리는 그의 모습에 초악량이 조용히 웃었다.
“나를 기다린 것인가?”
“소개가 늦었소. 나는 당종호라는 사람이오. 본 가의 대외 총관직을 맡고 있지.”
“당종호?”
초악량이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내 어렵지 않게 기억 속에서 한 사람의 별호를 떠올릴 수 있었다.
“상대의 호신강기를 전문적으로 파괴한다는 당가의 독문 암기 혈접표(血蝶鏢). 그걸 귀신처럼 잘 다룬다는 사람과 같은 이름이군. 별호가 아마 추혼수(墜魂手)였지?”
“하하, 이거 영광이오. 천하오절 중 한 분인 혈수존자께서 이 미천한 자를 다 알아봐 주시다니.”
당문 특유의 폐쇄적인 가풍.
그로 인해 당가의 인물들에 대한 정보는 강호에 알려진 바가 드물었다.
가주와 장로들을 제외하면 당가 내에서 가장 강한 고수로 일컫는 당가팔수(唐家八手) 정도였다.
특히 눈앞에서 웃고 있는 추혼수 당종호는 오래전부터 상당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혈족으로 구성된 당가는 집요한 복수로 유명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한 곳이 추혼단이었다.
그리고 그 추혼단을 이끄는 사람이 외당의 책임자인 당종호, 바로 이자였다.
초악량이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이 안에는 뭘 넣었지?”
“눈치채셨소?”
“천하의 추혼수가 평범한 차를 내오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말일세.”
“칠보단장(七步斷腸)이오.”
“오! 그것은 당가의 십대 극독 아닌가? 나를 위해 그리 비싸고 유명한 독을 대접하다니. 그래서 맛이 더욱 각별했던 모양이군?”
탄성을 터트린 초악량이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마저 차를 비워 냈다.
그 태연하고 의연한 모습에 당종호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계속해서 차를 마시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칠보단장은 강호에 떠도는 흔한 독이 아니었다.
당가 내에서도 허락된 몇 명만이 다룰 수 있는 극독 중의 극독.
복용하는 즉시 내부 장기가 녹아내리는 극통을 선사하고, 일곱 걸음을 떼기 전에 절명하는 독이었다.
탁.
초악량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것이 당가의 대답인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객점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있던 사람들이 신형을 일으켰다.
당종호가 슬쩍 웃음을 말아 올렸다.
제아무리 멀쩡한 척해도 칠보단장을 복용한 이상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터.
그런데 조소를 흘리던 당종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자신을 응시하는 초악량의 눈빛.
결코 중독된 사람이라 믿을 수 없는 담담한 눈빛 너머로 소름 끼치는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여유 있는 미소로 화답하던 초로인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천하오절에 당당히 명호를 올리고 있는 절대 고수.
혈수존자만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압력이 객잔 안을 가득 메운 것도 그때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초악량의 기파를 정면으로 마주한 당종호가 왈칵 피를 토하더니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초악량은 대답 대신 품속에서 피독주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본래 백옥색이었던 피독주는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큭!”
황급히 물러선 당종호의 손에는 어느새 섬뜩한 핏빛 암기가 들려 있었다.
한번 노린 상대는 끝까지 쫓아가 예리한 독니를 박아 넣는 그의 성명암기.
나비 형태의 날개와 몸체 전체가 날카로운 칼날로 이루어진 혈접표였다.
당종호의 손을 떠난 혈접표가 초악량을 향해 쇄도했다.
번쩍.
당종호의 눈앞으로 한 줄기 수영(手影)이 짓쳐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가공할 경력에 의해 혈접표가 궤적을 잃고 사방으로 튀어 오르나 싶더니, 순식간에 섬뜩한 무언가가 가슴팍을 향해 날아든 것도 한순간이었다.
“……!”
당종호는 머리털이 쭈뼛하며 한줄기 서늘한 공포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황급히 물러선 당종호가 양팔을 교차해 가슴 부근을 방비했다.
하지만 상대는 초악량.
천하오절의 이름을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콰앙!
객잔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폭음이 터져 나오며 한 사람의 몸이 훨훨 날아갔다.
당종호였다.
실 끊어진 연처럼 한참을 날아간 당종호가 객잔의 벽면 하나를 무너뜨리며 처박혔다.
“커헉!”
한 움큼의 피를 토한 당종호가 비틀거리며 신형을 일으켰다.
그의 두 팔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가까스로 가슴뼈가 으스러지는 것은 막았지만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손목뼈가 부러져 버린 것이다.
싸늘한 눈빛을 흘리며 초악량이 입을 열었다.
“너희 가주에게 가서 전해라. 내가 찾아갈 것이라고.”
“…….”
“부디 그가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 마지막 기회마저 끝내 걷어찬다면…….”
창백한 얼굴로 떨고 있는 당종호를 향해 초악량이 악귀처럼 웃었다.
“오늘 이후 이곳 사천에서 당가 성을 쓰는 자는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