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88)
신마의선-288화(288/500)
신마의선 (288)
장내에 내려앉은 어색한 침묵.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해남파의 단주 한 명이 정색하며 왕이수를 쏘아봤다.
“혹시 그 망발을 지껄인 미친놈이 귀하요?”
“아, 아니……. 그게…….”
사색이 되어 우물쭈물하는 왕이수의 모습에 해남파 소속 무인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감히……!”
으르렁대며 자신을 노려보는 단주들의 눈빛에 왕이수는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그동안 시도 때도 없이 벽화령에게 시달려 온 해남파 무인들의 심정을 왕이수가 알 리 없었다.
오랜 세월 바다를 누빈 그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바다도 아니었고, 평생을 목숨 걸고 싸워 온 수적들도 아니었다.
심지어 해남검파의 문주인 벽대경도 아니었다.
단연코 한 사람.
바로 부문주인 벽화령이야말로 진정한 악몽이었다.
평소의 그녀는 지옥에서 기어 나온 나찰이 따로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가혹한 훈련으로 내모는 것은 일상이었고, 조금만 자신의 성에 차지 않거나 미흡한 부분을 발견하면 그날로 해남도에 곡소리가 울려 퍼지곤 했다.
그런데 한동안 지지부진했던 벽화령의 혼사 이야기가 최근 들어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오르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 해남도를 떠나 외유를 마치고 돌아온 벽화령은 사람이 아예 달라져 있었다.
웃음도 많아졌고, 이전처럼 까칠하게 굴지도 않았다.
해남파에 몸담은 사람치고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범계위는 자신들을 구원해 줄 유일한 희망이었다.
출가외인.
벽화령이 혼인하게 되면 해남도를 떠날 것이고, 부문주 자리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오빠들 중 한 명이 대신하게 될 터.
그래서 누구보다 벽화령의 사랑이 결실을 맺기를 한결같이 응원해 온 그들이었다.
심지어 몇 명은 새벽마다 정한수를 떠 놓고 빌기도 했다.
세상에 그 어떤 정신 나간 사내가 벽화령처럼 무시무시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단 말인가.
천하를 다 뒤져도 범계위만이 유일했다.
그래서 그들은 범계위에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풍랑 때문에 발이 묶여,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하던 도중에 끌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범계위를 따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뭐 하냐, 니들?”
“예?”
“선물 고르라니까?”
왕이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단주들이 범계위의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런 그들을 향해 범계위가 무언가를 흔들었다.
그것이 한 무더기의 전표 다발이라는 것을 깨달은 왕이수의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켰다.
‘저게 다 얼마야!’
저만한 돈이면 이 정도 상점은 서너 개도 너끈하게 새로 꾸릴 수 있을 터.
내심 비명을 지르는 그의 모습에 단주들 중 한 명이 코웃음을 쳤다.
“얼마 전 근처에 신마상단 소속의 상점이 개업을 했습니다. 차라리 그쪽으로 가시지요.”
“어? 그래?”
“네.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그쪽이 훨씬 평이 좋습니다.”
왕이수가 울상을 지었다.
최근 무리하게 투자를 감행해 사업을 확장한 것도 새로 개업한 신마상단 소속의 상점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고개를 끄덕인 범계위가 전표를 한 움큼씩 집어 들더니 단주들의 손에 덥석 쥐여 주었다.
“이걸 왜 저희에게?”
당황한 단주들을 향해 범계위가 씨익 웃었다.
“화령이가 뭘 좋아하는지 너희들이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빨랑 가서 돈 남기지 말고 싹 다 쓸어 와. 각자 사고 싶었던 것들도 전부 사고.”
“저희들 것까지요?”
“화령이와 결혼하면 어차피 너희도 한 식구잖아. 뭐가 문제야? 식구한테 선물 좀 하겠다는데.”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
“됐으니까 빨리빨리 움직여. 내 여자가 있는 문파에게 모처럼 선물하는 건데 이 정도는 해야지.”
단주들의 얼굴에 절로 감탄이 묻어났다.
이렇게나 통이 크니 벽화령 정도 되는 여자를 감당하나 싶었던 것이다.
기껏 찾아온 천금 같은 기회를 걷어찬 왕이수.
사람 볼 줄 모르는 자신의 안목을 원망하며 그만이 홀로 후회막급의 눈물을 삼킬 뿐이었다.
* * *
사납던 풍랑이 잠잠해지자 선물이 가득 실린 배가 해남도의 포구에 도착했다.
나루터에는 이미 연락을 받고 마중 나온 해남파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의 선두에는 험악한 인상만큼이나 풍채가 좋은 노인이 서 있었다.
해남파의 장문인인 벽대경이었다.
그 뒤로는 벽화령의 오빠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우리 사위.”
배에서 내린 범계위가 환한 얼굴로 맞이하는 벽대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내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에서도 벽화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령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순간 벽대경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벽화령의 오빠들도 마찬가지.
저마다 복잡한 눈빛을 흘리며 묘한 침묵만 지키는 그들의 모습에 범계위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세.”
범계위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화령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으음……. 그게…….”
말끝을 흐리며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벽대경의 모습에 범계위의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솟구쳤다.
“대체 뭡니까?”
한순간 범계위가 뿜어낸 기파에 벽대경이 움찔했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존재감 때문이었다.
그 역시 적지 않은 세월 동안 도산검림을 종횡해 온 고수.
그런 그조차 일순 기가 질릴 만큼 범계위의 기도는 실로 전율스러웠다.
이미 천하에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평이 지배적이었거늘, 그사이 더욱 벽을 깨고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큽!”
뒤에서 새어 나온 신음 소리에 벽대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조차 마주하기 버거운 기파였다.
하물며 본인보다 무위가 약한 아들들이 이를 버텨 낼 리 만무했다.
“화령이는 함곡도(含哭島)에 갔다네.”
“거기가 어딥니까?”
“지옥팔관(地獄八關)이 있는 곳일세.”
“지옥…… 뭐라고요?”
벽대경이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림의 최정예라 불리는 십팔나한.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소림만의 특별한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혹 그것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나?”
범계위는 일순 어리둥절했다.
벽화령의 행방을 묻는데 왜 갑자기 소림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그러나 이어진 벽대경의 말에 그대로 표정이 굳어졌다.
“언젠가 불가해(不可解)라 불리던 강호의 전설적인 기인, 무불능요(無不能要) 탁요신이 소림을 방문했다더군. 그는 그곳에서 큰 영감을 얻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소림을 뛰어넘는 관문을 만들고자 천하를 떠돌다 이곳 해남도를 찾아왔네.”
“설마……?”
벽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옥팔관은 그가 만든 일종의 기관진일세.”
범계위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
‘어째 그 인간은 사방에 발을 걸치지 않은 곳이 없군?’
신마곡에 설치되어 있는 절진 역시 그의 작품이었다.
게다가 어째선지 최근 들어 그 이름을 자주 듣는 기분이 들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포달랍궁에서 달뢰라마가 직접 그를 언급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벽대경이 탄식하듯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우리는 끝까지 말렸지만 그 아이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네. 자신이 자네의 약점이 될 수는 없다고 하더군.”
“그래서 화령이는요? 어찌 되었다는 겁니까?”
“지옥팔관에 들어선 지 오늘로 한 달째인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네.”
벽대경은 지옥팔관의 특성상 여덟 개의 모든 관문을 통과하기 전에는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우리도 달리 방법이 없었네. 그저 기다릴 수밖에.”
“원래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립니까?”
범계위의 물음에 벽대경이 곤혹스러운 눈빛을 흘렸다.
“그건 우리도 알 수 없네.”
“그걸 왜 모릅니까?”
“지금까지 지옥팔관을 통과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
“아무래도 탁요신 그분이 지나치게 의욕이 앞선 나머지 기관을 과하게 만든 모양이야.”
그래서 지옥팔관이 설치된 섬의 이름도 함곡도였다.
지아비와 자식을 잃은 여인들의 곡소리가 맺혀 있는 섬이란 의미였다.
“그래서 오래전에 폐쇄했지.”
벽대경의 말에 범계위가 버럭 했다.
“그런데 그걸 허락했다는 겁니까?”
다소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범계위의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벽대경이 말을 이어 갔다.
“그게 해남도의 규칙이니까. 그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이상 우리가 관여할 수 없는 일이라네. 그리고 무엇보다…….”
잠시 말끝을 흐리던 벽대경이 재차 한숨을 터트렸다.
“자네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어 나오겠다는 그 아이의 의지를 꺾을 수가 없었네. 당당하게 그곳을 통과하고 자네와 혼인할 자격을 갖추겠다고 하더군.”
“하…….”
범계위는 내심 기가 막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세상의 어느 아비가 그처럼 위험한 곳에 몸을 던지는 딸을 방관한단 말인가?
나루터에 서 있던 해남도의 무인들이 바짝 긴장한 것도 그때였다.
돌연 범계위 주변으로 엄청난 살기가 뻗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기를 잠시.
범계위가 자신을 태우고 온 배에 다시 올라탔다.
“함곡도로 간다.”
쾌속선을 지휘하던 단주가 벽대경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거나 말거나.
범계위가 으르렁대듯 입을 열었다.
“만약 화령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다 죽는 거야.”
벽화령 없는 해남도가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
선을 넘은 그 말에 벽대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어진 범계위의 음성이 가슴을 쳤다.
“나까지 포함해서.”
진심이 느껴지는 그 말에 벽대경을 포함한 해남파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가 안내하지.”
훌쩍 신형을 날린 벽대경이 쾌속선 위에 몸을 실었다.
“아버님, 하지만……!”
벽화령의 오빠들 중 한 명이 당황해 소리쳤다.
지옥팔관은 누구의 조력 없이 홀로 돌파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하오나…….”
우려를 담은 아들의 눈빛에 벽대경이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가 나설 것이 아니라면 입을 다물어라. 나 역시 화령이를 직접 도울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다행히 사위 될 자가 나서 준다니 고마워해야지.”
벽대경의 지시가 떨어지자 미리 승선해 있던 해남파의 무인들이 닻을 끌어 올렸다.
뱃머리를 돌리기 무섭게 돛이 펼쳐지고, 바람을 한껏 끌어안은 쾌속선은 빠른 속도로 파도를 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내달려 함곡도에 도착하자 벽대경이 해안 절벽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동굴을 가리켰다.
“저곳일세.”
그 순간, 거대한 쾌속이 한차례 크게 출렁이나 싶더니.
콰앙!
쏘아진 포탄처럼 대기를 찢으며 날아간 범계위의 신형이 순식간에 동굴 안으로 사라졌다.
‘이런!’
벽대경이 당혹성을 삼켰다.
각각 여덟 개의 관문에 대한 정보와 주의점을 설명하기도 전에 범계위가 튀어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써 표정을 수습하며 범계위가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부탁하네, 사위.’
벽대경의 눈빛.
그 안에는 간절한 염원과 깊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 * *
한편 거침없이 동굴로 뛰어든 범계위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캄캄한 어둠.
그 속의 사방에서 벼락이 치듯 끊임없이 짧게 명멸하는 섬광이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그극.
귀에 거슬리는 묘한 소리가 청각마저 교묘히 방해하고 있었다.
들어선 이의 감각을 차단하는 까다로운 함정.
나름 고수라 자부하는 범계위조차도 한순간에 시각과 청각을 완벽하게 빼앗겨 버렸다.
“흥!”
그러나 범계위는 범계위였다.
호신강기를 한껏 끌어 올린 범계위가 으스러져라 이를 악물었다.
꽈앙! 꽈앙! 꽈앙!
일대를 송두리째 무너트릴 것 같은 굉음이 동굴 안을 가득 메운 것도 그때였다.
“내 여자 내놔!”
쩌렁한 일갈과 함께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박살 내며 범계위가 전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