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89)
신마의선-289화(289/500)
신마의선 (289)
“하아……. 하아…….”
턱까지 차오른 숨을 가까스로 가다듬으며 벽화령이 전면을 응시했다.
한 자루 검을 늘어트린 채 가만히 서 있는 여인.
마치 쌍둥이였나 싶을 만큼 그녀는 완벽히 자신과 닮아 있었다.
일곱 개의 관문을 차례로 돌파하고 이제는 마지막 관문만을 남겨 놓은 상황.
하지만 마지막 관문은 지금까지와 차원이 달랐다.
괜히 지옥이라는 말을 갖다 붙인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누구도 통과한 사람이 없었기에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건 결코 통과할 수 있도록 설계된 관문이 아니었다.
관문을 하나씩 통과할수록 순차적으로 오감을 앗아 갔으니까.
한데 그조차도 지금의 환상을 끌어내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이처럼 강력한 자기 암시라니!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앞의 상대만큼은 뚜렷하게 인지할 수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분명 머리는 현실이 아니라 자각하고 있는데, 몸과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어.’
처음에는 왜곡된 감각이 만들어 낸 심마의 일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상대가 휘두르는 초식 하나하나에 실려 있는 살기는 진짜였고, 초식의 연계는 평생 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을 익혀 온 그녀조차 소름 끼칠 만큼 정교하고 빈틈이 없었다.
무엇보다…….
단순한 환각이나 심상이었다면 지금처럼 팔이 날아가지도 않았을 터.
팔꿈치 아래로 매끄럽게 잘려 나간 자신의 왼팔을 확인한 벽화령이 고소(苦笑)를 머금었다.
새삼 이 같은 함정을 설계한 귀수라는 작자의 재능과 악의에 치가 떨렸다.
대체 이걸 어떻게 돌파하라는 것인지.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여기까지인가…….’
벽화령이 천천히 검을 늘어트렸다.
그때였다.
“내 여자! 어디 있어!”
어디선가 들려온 쩌렁한 음성.
그것이 범계위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벽화령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다 하다 이제 범 가가까지 불러내?’
벽화령은 갑자기 화가 났다.
하지만 이내 서글퍼졌다.
마지막 관문을 돌파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한 자신의 모습이 더없이 처량했기 때문이다.
이미 팔 하나를 잃은 상황.
거기에 진기는 이미 고갈되어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화령은 이 순간 범계위가 미친 듯이 보고 싶었다.
환청이라도 좋으니 다시 한 번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지독한 그리움 너머 한편으론 홀가분한 기분도 들었다.
지옥팔관에 들어선 이유는 오직 하나.
자신이 범계위의 약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을 통과해 강해지든지, 아니면 죽음을 맞이하든지.
슬프게도 지금 상황에서는 죽음으로 귀결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범계위의 약점이 되어 그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만 끝내자.”
언제까지 자포자기한 상태로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대로 모든 것을 놓고 무력하게 죽음을 맞고 싶지 않았다.
먼 훗날 죽어서 범계위를 다시 만나더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노라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를 악문 벽화령이 검을 들어 상대를 가리켰다.
그러자 상대 역시 같은 자세로 마주 검을 들었다.
‘재수 없어!’
분명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음에도 도저히 허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
반면 자신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
거기에 팔 하나를 잃어 더욱 불리했다.
하지만 벽화령은 주저하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츠츠츳!
마지막 힘을 쥐어짜 검 끝에 실어 낸 검기가 허공을 찢으며 상대에게 쇄도했다.
상대 역시 같은 초식으로 검을 휘둘러 왔다.
마치 거울 속의 자신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상대의 검법이 더 정교하고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
망막 가득 투영된 한 자루 검.
그 순간 벽화령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한 팔을 잃어 균형이 미묘하게 틀어졌고, 그 실낱같은 빈틈 사이로 헤집고 들어온 검을 도저히 막아 낼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해남검파 최고 검객을 자부하는 그녀라 할지라도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다.
살아서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벽화령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미안해, 범 가가.’
닿을지 모르겠지만 마음으로나마 그에게 전언을 남겼다.
그런데 그때.
모든 것을 놓고 지극히 고요해진 마음의 한순간.
“화령아!”
다시 한 번 범계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음이 임박했음에도 벽화령은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바람이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그래도 시집은 가고 싶었는데.’
범계위의 얼굴을 떠올린 벽화령에게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들었다.
이제 더 이상 범계위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험상궂지만 가만히 뜯어 보면 귀여운 그 얼굴도 이제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까닭 모를 억울함과 분노가 가슴을 채웠다.
그리고 이는 곧 오기가 되어 벽화령의 정신과 육체를 지배했다.
그 오기를 따라 단전으로부터 한 줄기 미증유의 기운이 솟구친 것도 동시였다.
우우웅!
벽화령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웅혼한 울음을 토해냈다.
번쩍!
한순간 눈앞의 모든 것이 베어지고 갈라졌다.
만 이랑의 푸른 물결.
벽화령의 검을 통해 남해삼십육검의 최후 절초인 만경창파(萬頃蒼波)가 그 신위를 드러낸 것이다.
“아아!”
벽화령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힘든 고양감!
이는 곧 끝없는 희열이 되어 가슴을 채웠다.
끝없는 검기의 파도 앞에 그토록 그녀를 괴롭혔던 모든 것이 가닥가닥 잘려 나가고 있었다.
벽화령은 비로소 이 끔찍한 절진에도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남해삼십육검의 마지막 초식인 만경창파.
제아무리 지옥팔관의 설계자인 귀수가 둘도 없는 천재라 해도 지금껏 어느 누구도 도달한 이가 없는 초식까지는 절진에 담아 구현해 낼 수 없었던 것이다.
홀연히 찾아든 깨달음.
이를 통해 한계를 깨고 벽을 넘어선 순간 지옥팔관은 더 이상 그녀를 옭아맬 수 없었다.
등 뒤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날아든 것도 그때였다.
“잘했어! 내 여자!”
“범 가가?”
벽화령이 놀라 뒤돌아보니 무너진 벽 사이로 거짓말처럼 범계위가 서 있었다.
몇 번이고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범계위가 분명했다.
“정말…… 범 가가?”
“그래. 나…… 헉!”
두 팔을 벌리고 벽화령에게 다가서던 범계위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벽화령의 눈빛이 한순간 싸늘해지나 싶더니 어마어마한 검기의 파도가 끝없이 쇄도해 왔기 때문이다.
“대체 왜?”
정신없이 검기를 피하던 와중에 범계위는 문득 깨달았다.
“미안해! 그래도 최선을 다했어! 늦고 싶어서 늦은 게 아니라고!”
범계위는 나름 억울했다.
관문 자체를 송두리째 부수며 이곳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벽화령을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무수한 검기를 맨몸으로 받아 내며 범계위가 앞으로 나아갔다.
검기가 긋고 지나간 그의 옷은 순식간에 넝마가 되었고 피부 위로도 붉은 줄이 죽죽 그어졌다.
날카로운 고통을 감내하며 벽화령에게 다가선 범계위가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
벽화령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억센 팔과 바로 앞에서 이글거리는 불덩이 같은 한 쌍의 눈.
게다가 피부에 직접 와닿는 온기에 비로소 눈앞의 범계위가 관문이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가가!”
벽화령이 범계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그를 올려다보며 슬프게 웃었다.
“비록 팔 하나를 잃었지만 남해삼십육검의 마지막 절초를 얻었어요.”
“어? 팔을 잃다니?”
범계위는 어리둥절했다.
날아갔다는 팔이 어떻게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
벽화령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 것도 그때였다.
분명 잘려 나갔던 팔이 멀쩡히 붙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조차도 환상이었다니!’
얼마나 지독한 암시였는지 팔이 잘릴 때의 그 섬뜩한 고통이 아직까지 뇌리에 선명했다.
하지만 만약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환상은 환상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안에서 죽음을 맞는다면 현실에서도 죽음을 맞이했을 터.
벽화령이 주위를 둘러봤다.
박살 난 채 곳곳에 굴러다니는 목검과 파괴된 기관 장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별것 아닌 저런 장치들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니.
무불능요(無不能要)라 불렸던 탁요신.
불세출의 천재로 불리며 건축과 기문 둔갑에 있어 아직까지 그를 최고로 꼽고 추앙하는 데에는 과연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벽화령이 더욱 세게 허리를 끌어안자 범계위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이야.”
“네? 마지막이라니요?”
의아해하는 벽화령을 범계위가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내 허락 없이 두 번 다시 이런 짓 하지 마.”
벽화령이 배시시 웃으며 범계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고마워요, 걱정해 줘서.”
그러나 범계위가 진짜 걱정하는 건 따로 있었다.
‘더 강해지면 곤란해.’
솔직히 방금 전의 공격만 해도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데 여기서 더 강해진다면?
자신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범계위와 벽화령이 동굴 밖으로 나서자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벽대경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딸의 안위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지만, 그보다 우선해야 할 말이 떠올랐다.
“두 사람의 혼인식을 준비하라.”
벽대경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섬 전체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죽은 줄 알았던 부문주의 귀환 때문인지, 혼인식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사들의 환호성은 어느 때보다 기쁨에 차 있었다.
“와아아!”
“드디어!”
그 모습을 유심히 응시하던 벽화령의 아미가 꿈틀했다.
“뭐야? 시집은 내가 가는데 왜 너희가 좋아하는 건데?”
“그, 그거야…….”
황급히 말을 삼키는 수하들의 모습에 벽화령이 빙긋 웃었다.
지금껏 몇 번인가 그 미소를 마주한 적이 있었던 해남파의 무인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 시집가도 여기 있을 건데.”
“……!”
그 말에 환호하던 무인들의 표정이 그대로 썩어 들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벽화령이 말을 이어 갔다.
“저 안에서 깨달음을 얻었거든. 갈 때 가더라도 전수는 제대로 해 줘야지. 본 파의 절학이 명맥 끊어지는 일 없도록 말이야.”
그리고 이어진 벽화령의 말에 해남파 무인들이 울상을 지었다.
“기대해. 내일부터 당장 특별 훈련이니까.”
세상 무너진 눈빛으로 벌써부터 한숨을 내쉬는 해남파의 무인들이었다.
그날 밤.
벽대경은 따로 범계위와 벽화령을 조용히 불러냈다.
“내 딸을 잘 부탁하네.”
본래대로라면 꽤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을 혼사였다.
남자 집에서 혼인을 위해 예를 갖추어 청하면 여자 집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납채(納采)를 시작으로, 문명(問名)과 납길(納吉), 납폐(納幣), 청기(請期), 친영(親迎) 등의 육례(六禮)를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하물며 해남검파 문주의 딸이자 부문주인 벽화령의 혼사인 만큼 이처럼 벼락불에 콩 볶아 먹듯 진행돼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벽대경은 과감히 모든 과정을 생략했다.
듣자니 이미 쌀은 익어 밥이 된 상황.
궁합이야 이미 실컷 확인했을 테니 사주(四柱)는 따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남은 것은 손 없는 날을 골라 날짜를 잡으면 될 뿐.
벽대경이 건넨 술잔을 받은 범계위가 단숨에 이를 비워 냈다.
말로만 듣던 육십오 년 묵은 여아홍이었다.
초악량이 들었다면 이 자리에 없었던 것을 두고두고 한탄할 만큼 진귀한 노주(老酒).
벽화령의 배필을 찾으면 뜯으려고 벽대경이 아껴 놓은 술이었다.
과연 술맛을 잘 모르는 범계위조차 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술맛은 훌륭했다.
범계위가 벽대경을 향해 씨익 웃었다.
“이제 화령이는 제 겁니까?”
“그래. 자네 거네.”
호탕하게 고개를 끄덕인 벽대경이 이어진 범계위의 말에 당혹감을 드러냈다.
“그러면 해남검파도 이제 제 거군요.”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