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90)
신마의선-290화(290/500)
신마의선 (290)
벽대경은 일순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그 말의 진의를 따져 묻기도 전에 범계위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혼인식은 조금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작스런 말에 벽화령이 놀라 반문했다.
“가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가족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순 없으니까.”
범계위가 진지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마교와 싸워야 할 것 같아.”
이어진 범계위의 설명에 벽대경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범계위에게 그 말을 들으니 상황의 심각성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그래서 화령이를 데려가는 건 좀 미루겠습니다.”
벽대경이 굳은 표정으로 범계위를 응시했다.
이미 마교의 시커먼 마수가 곳곳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해남검파 역시 마교가 풀어놓은 마공 비급 때문에 한바탕 홍역을 치른 상황.
하나 마교와의 전면전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자네는 우리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불쑥 입을 연 벽대경이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자네가 말했듯이 우리는 이미 한 가족일세. 가족의 어려움을 모른 척할 만큼 해남검파는 비겁하지 않다네.”
벽대경이 눈앞의 술을 단숨에 비워 냈다.
“마교와의 싸움이라면 우리가 더욱 필요할 터. 혼인식은 예정대로 진행하겠네. 이건 화령이 아비로서 하는 말이네. 만약 자네가 딴소리를 한다면 이 혼인은 무를 걸세.”
벽대경의 눈빛과 음성에서 묻어나는 굳은 의지에 범계위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이 늘어나는 건가…….”
“응? 자네 방금 뭐라 했나?”
벽화령이 범계위의 옆구리를 찌르며 대신 대답했다.
“이이도 좋대요.”
범계위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범계위가 뜨거운 눈빛으로 벽화령을 응시했다.
“내 여자가 원한다면야.”
“범 가가…….”
금방이라도 눈앞에서 신방을 차릴 것 같은 두 사람의 열기에 벽대경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상처한 지 오래된 아비를 앞에 두고 대체 저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커험. 술이 과했나? 잠시 바람 좀 쐬야겠군.”
곤혹스러운 눈빛을 흘리던 벽대경이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과년한 딸을 시집보내는 건 이다지도 어려운 일인 것이다.
* * *
사천 성도.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임시로 급조한 천막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간단히 기둥을 세우고 기름 먹인 천으로 지붕을 올려 간신히 비와 이슬 정도만 그을 수 있었지만 어느 누구 하나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덧 밤이 깊었고, 곳곳에는 한기를 쫓기 위한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환자들이 꽤 줄었군.”
주변의 모닥불 숫자를 헤아리던 홍적문의 말에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던 단악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동 대처가 빨라서 피해를 줄일 수 있었어요. 모두가 개방의 영웅들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우리가 한 게 뭐 있다고.”
겸양을 하던 홍적문이 미소를 거두며 진지한 눈빛을 드러냈다.
“이제 어느 정도 피해는 수습한 것 같으니 슬슬 향후 대책을 모색해 봐야 할 것 같구나.”
홍적문이 넌지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우선은 사천당가의 생존자들을 중심으로 조사를 시작할 생각이다.”
“그들이 입을 열까요?”
단악선의 우려에 홍적문도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흘렸다.
“그 수보라는 자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방법이 당장은 그것뿐이다.”
그래도 내부의 적이 되었을지도 모를 위협을 사전에 미리 솎아 냈다는 점은 희망적이었다.
“이미 당가타는 무너졌고, 전대 가주 둘이 마교와 결탁했다는 것이 밝혀진 이상, 저들도 끝까지 침묵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상당수의 당가 인물들은 전대 가주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 대부분은 아직까지도 마교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개방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건 정파 무림을 배신하는 것으로 스스로 자초하는 셈.
자신들의 혐의를 벗기 위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협조하리라 믿었다.
문제는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느냐는 점이다.
“일단 장로들을 중심으로 집중 추궁해 볼 생각이다. 또한 중원 각지에 퍼져 있는 당가 소속 무인들도 속속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고 하니 그들을 통해 건질 만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
막연한 기대였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홍적문이 이상한 기분을 느낀 것도 그때였다.
먼 허공을 응시하는 단악선의 눈빛이 기이하게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단악선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
여전히 의아한 눈빛을 거두지 않는 홍적문의 모습에 단악선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요.”
“무엇이 말이냐?”
“당가의 가주 정도나 되는 사람이 마교의 핵심 인물과 직접 접촉했다는 사실이 여전히 마음에 걸려요.”
“그야 본인의 어리석은 걱정과 욕심 때문 아니겠느냐?”
“아니면 수보라는 자를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거나요.”
“설마?”
홍적문이 눈을 부릅떴다.
“그가 정파인 출신일 수도 있다는 뜻이냐?”
“어디까지나 여러 가설 중의 하나일 뿐이에요.”
“그리 생각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느냐?”
“수보를 언급했을 때의 표정과 눈빛, 그리고 분위기요.”
어느 것 하나 직접적인 증거는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섣불리 가능성을 배제하기에는 당시의 느낌이 너무나 묘했다.
“으음.”
침음성을 흘리던 홍적문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쪽도 가능성을 열어 두고 조사해 봐야겠구나.”
이때 두 사람을 향해 급히 달려오는 인영이 있었다.
신마상단과 연락을 담당하고 있는 인근 분타의 이결 제자였다.
“해남검파에서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전서요?”
고개를 갸웃하던 단악선이 이결 제자가 건넨 서신을 받아 들었다.
그 안의 내용을 확인한 단악선이 모처럼 밝게 웃었다.
“한 달 뒤에 해남검파에서 혼인식이 열린다는군요.”
“혼인? 누구의?”
“범 아저씨요.”
“……!”
홍적문이 깜짝 놀랐다.
“아니, 어쩌다가?”
“네?”
당황한 홍적문이 낮게 헛기침을 터트렸다.
“거……. 기쁜 소식이구나.”
단악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정말 잘됐어요.”
단악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달려갔다.
초악량과 한설화에게도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반면 홍적문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짧게 혀를 찼다.
“쯧쯧.”
홍적문의 눈에 안쓰러움이 떠올랐다.
그 눈빛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오직 그만이 알 일이었다.
며칠 후.
단악선은 초악량, 한설화와 함께 해남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범계위의 혼인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와!”
뱃머리에 서서 온몸으로 바닷바람을 만끽하는 단악선의 모습에 초악량이 슬쩍 웃으며 다가섰다.
“그러고 보니 바다를 오가는 배를 타는 건 처음이겠구나.”
“네. 범 아저씨 덕분에 이런 배도 타 보네요.”
복잡한 일은 잠시 내려 두고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단악선이었다.
그런 단악선의 모습에 한설화도 어느새 말없이 다가와 빙긋 미소를 건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선수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단악선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매일매일이 오늘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초악량과 한설화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이라 해서 단악선의 바람을 지켜 주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놈은 늘 얄궂게 단악선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때 단악선이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우리 모두 진심으로 축하해 줘요. 적어도 그날만큼은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진심이 담긴 단악선의 말에 초악량과 한설화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범계위를 축복한다는 것이 썩 내키진 않았지만 단악선을 위해서라면 눈 한번 질끈 감으면 그만인 것이다.
* * *
해남검파 내부에 마련된 넓은 연무장.
그 위에는 초주검이 된 무인들이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온몸이 후줄근한 땀으로 젖은 채 먼지 범벅이 되어 있는 그들의 모습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안쓰러웠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다그치던 벽화령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것들이?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엄살이야? 이래서야 어디 마교 놈들이랑 제대로 싸워 보기나 하겠어?”
“부문주님.”
후들거리는 다리로 가까스로 일어난 종리추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벽화령을 바라봤다.
“보름 뒤가 혼례입니다.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내 말이! 왜 이렇게 내 발목을 잡는 거야?”
벽화령이 기진맥진한 상태로 쓰러져 있는 무인들을 가리켰다.
“저 꼴을 보고도 어떻게 그냥 두고 볼 수 있겠어?”
나름 해남파의 정예라 자부하는 십여 명의 무인.
그중에는 벽화령의 세 오빠도 있었다.
기껏 얻어 낸 남해삼십육검의 진정한 오의를 그들에게 전수하고 싶은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의 열의는 그들에게 너무나 가혹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누운 채로 울상을 지었다.
“화령아. 너 준비할 것이 많다. 떨어지는 가랑잎도 조심해야 할 새 신부가 혼례를 앞두고 사내들 사이에서 칼질이라니.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이냐?”
참다못해 맏이인 벽파영이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벽화령은 단호했다.
“오라버니, 명심해. 이 수련이 끝나지 않으면 난 아무 데도 안 가. 어쩌면 여기 연무장 위에 살림을 차릴 수도 있어.”
벽화령이 천천히 다가가서 오라버니들에게 속삭였다.
“정말 괜찮겠어?”
“……?”
“이러다 만약 내가 이대로 영영 눌러앉으면? 그러다 내가 문주가 되어 버리면? 정말 나 감당할 수 있겠어?”
“……!”
벽화령의 오빠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떡 일어서는 오빠들의 모습에 벽화령이 화사하게 웃었다.
결국 다른 사람들도 마지못해 비틀거리며 신형을 일으켰다.
죽을상을 하고 있던 종리추가 나란히 선 장철우를 바라봤다.
“야.”
“……?”
“지난번 몰래 빼돌렸던 폭뢰 아직 가지고 있냐?”
장철우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놈.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걸 부문주님께 쓸 생각을 해?”
종리추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부문주님 노린대?”
“그럼?”
“여기 연무장을 날려 버리는 거야. 그럼 사흘 정도는 벌 수 있지 않을까?”
“으음…….”
나름 일리 있는 생각이라 장철우가 내심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내 여자, 그렇게 너무 무리하지 마. 땀 흘렸잖아.”
“가가!”
갑자기 등장한 범계위를 향해 벽화령이 달려가 안겼다.
언제 험악한 살기를 뿌렸냐는 듯 애교 가득한 표정과 몸짓이었다.
“저도 다 관두고 가가와 함께 지내고 싶죠. 그런데 마교와 싸워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잖아요.”
교태 섞인 벽화령의 코맹맹이 소리에 종리추와 장철우가 정색했다.
그녀의 수신 호위로 무위까지 따라가는 바람에 이미 적지 않게 두 사람의 닭살 행각을 목격해 온 그들이었다.
그래도 이건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범계위가 속을 뒤집었다.
“그렇지만 저런 둔재들이 하루아침에 오의를 깨닫지는 못할 텐데?”
“그래도 해남검파 최고 기재들이에요. 물론 가가 눈에는 안 차겠지만.”
“당연히 안 차지. 무려 단 의원을 가르쳤던 나인데.”
범계위가 소매를 들어 벽화령의 얼굴에 맺혀 있던 땀을 닦아 주었다.
“아이참, 가가두. 사람들 보는데…….”
“뭐 어때? 머잖아 혼인할 사인데.”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온갖 애정 표현을 서슴지 않는 두 사람.
그 모습에 벽화령의 오빠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종리추와 장철우를 포함한 해남파의 무인들은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저마다 인상을 구겼다.
차라리 나찰처럼 다그치던 벽화령이 낫지 혀 짧은 소리를 남발하며 온몸을 배배 꼬는 그녀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종리추가 한숨을 내쉬며 장철우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폭뢰 어딨다고?”
“진짜 연무장 박살 내게?”
“아니.”
“……?”
“그냥 내가 안고 죽을란다.”
“살아서 저 꼴을 보느니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