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293)
신마의선-293화(293/500)
신마의선 (293)
사흘 앞둔 범계위와 벽화령의 혼례.
해남도의 선착장은 수많은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덕분에 혼례의 당사자인 범계위는 말할 것도 없었고, 혼주인 벽대경도 정신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건네 오는 하객들의 축하에 일일이 응대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 와중에도 혼례에 참석하기 위한 무림인들을 실은 배가 속속 도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선착장에 배를 댈 순서를 기다리며 바다 위에 떠도는 수많은 선박.
이를 보며 벽대경은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평생 바다를 누벼 온 그였지만 이렇게 엄청난 숫자의 배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본래 그가 예상한 하객 중 무림 인사들의 숫자는 기껏해야 백여 명 남짓에 불과했다.
한데 지금은 그 수를 아득히 넘어선 지 오래였다.
당장 어림잡은 손님들만 해도 오백 명 이상이었다.
게다가 혼례까지는 앞으로 사흘이나 더 남아 있었다.
얼마나 더 많은 손님이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
과연 이를 전부 감당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눈앞이 아득해졌다.
막 선착장에 도착한 거대한 배가 눈에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뱃머리 쪽에 서서 하선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들을 발견한 벽대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려한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고고한 분위기로 풍기는 노도사는 천하오절 중 한 명이자 화산파의 장문인인 천하제일검, 진명진인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 옆에 나란히 선 고아한 눈빛의 여승은 아미파의 장문인인 정연신니였다.
게다가…….
‘남악신검 진조운까지?’
최근 무서운 기세로 세를 불리더니 쇠락한 청성을 대신해 구대문파의 한자리를 갈아 치운 형산파였다.
그런 형산파의 장문인이 직접 혼례에 참석할 줄이야.
‘저들이 대체 왜?’
물론 청첩장을 보내긴 했으나 참석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의례였고 관례였으니 그리한 것이었을 뿐이다.
기껏해야 속가의 무인들을 통해 선물 정도나 보내올까 싶었는데, 이건 웬걸.
이처럼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직접 방문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것인가?’
벽대경은 당최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큼 해남파는 중원의 정도 문파들과 이렇다 할 교분을 다져 오지 못했다.
바로 관무불가침의 불문율 때문이다.
관과 무림은 오랜 세월 서로를 경원해 왔다.
그러나 해남파는 유일하게 관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출몰하는 왜구와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서였다.
조정은 해남파에 군선과 화약을 제공했고, 해남파는 관을 대신해 해안의 방비를 담당하는 일익으로서 조정의 고민을 덜어 주었다.
상황이 그러한 만큼 해남파가 비록 정파일지라도 중원의 정파들과는 거리감이 존재했다.
너무 가깝지도 않지만, 또 너무 멀지도 않은…….
이른바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의 관계였던 것이다.
물론 짐작 가는 바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우리 사위가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이었나?’
물론 망산초자의 위명과 지닌 무위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파의 거두라 할 수 있는 범계위가 정파를 이끄는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과 따로 친분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 순간 벽대경의 눈에 의아함이 자리 잡았다.
‘어째서 내리지 않지?’
배가 정박하고 발판이 놓였음에도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깨달았다.
“……!”
벽대경이 놀라서 두 눈을 부릅떴다.
양옆으로 물러서는 구대문파의 장문인들 사이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천하오절 중 한 명이자 소림의 최고 고수라 알려진 계율원주 법료였다.
하나 벽대경이 놀란 것은 법료 때문이 아니었다.
법료는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누군가를 부축하고 있었다.
명아주 나무를 꼬아 만든 선장으로 바닥을 짚으며 천천히 하선하는 노승.
당대 소림 방장의 사숙이라 알려진 혜공대사였다.
오랜 세월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이미 입적한 줄 알았던 그가 이곳에 나타날 줄이야!
벽대경이 놀라 뛰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공손히 예를 갖추는 벽대경을 향해 혜공대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건넸다.
“이제라도 보게 되어 다행입니다.”
“예?”
“빈승은 항상 벽 문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오.”
당황한 벽대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혜공대사를 부축하고 있던 법료가 대신 입을 열었다.
“큰스님께서는 예불을 올리실 때마다 매번 문주님의 강녕을 기원하셨습니다. 해남파가 아니었다면 바다를 끼고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는 백성들이 지금과 같은 안녕을 누리지 못하셨을 거라면서요.”
“아니, 그런…….”
너무 감격한 나머지 벽대경은 일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기를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혜공대사가 돌연 벼락같이 일갈을 터트렸다.
“소림을 모욕한 흉악한 놈은 당장 튀어나오너라!”
꼿꼿하게 허리를 편 혜공대사의 눈에서 삼엄한 안광이 줄기줄기 흘러내렸다.
방금 전까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 노승이 맞나 싶을 만큼 숨 막히는 존재감이 사위를 압도했다.
‘아뿔싸!’
벽대경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범계위가 소림에서 말썽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눈살을 찌푸리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범계위를 향해 혜공대사가 준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허락 없이 숭산을 오른 것도 모자라 감히 본 사와 역사를 함께해 온 대불을 박살 낸 녀석이 네놈이렷다?”
뜨끔한 범계위가 힐끗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서 이쪽의 분위기를 살피던 초악량과 시선이 마주쳤다.
만에 하나,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잔뜩 진기를 끌어 올린 모습이었다.
“쩝. 뭐 미안하게 됐수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천하의 범계위도 마지못해 사과를 건넸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슬며시 화가 치밀었다.
“그런데 설마 그거 따지러 온 거요? 그것도 남의 경사까지 망쳐 가며?”
“고얀. 사람을 뭘로 보고?”
“……?”
“오랑캐의 수염이 그렇게 붉다던데 과연 그러한지 내 눈으로 꼭 확인해 보고 싶었느니라.”
“뭐라는 거야?”
뜻 모를 말에 범계위가 의아해하는 사이.
물끄러미 범계위를 올려다보던 혜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눈빛 안에 선기(仙氣)를 타고났도다.”
이어진 혜공대사의 탄성에 범계위가 당황했다.
―저게 뭔 말이유?
범계위가 날린 전음에 초악량이 곤혹스런 눈빛을 흘렸다.
―낸들 알겠냐.
―살기는 안 느껴지는데?
―내가 봐도 그렇다. 적의를 가지고 찾아온 건 아닌 듯싶은데…….
―대체 뭐지? 노망이라도 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반면 혜공대사를 부축하고 있던 법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선종일맥의 불가에서 오랑캐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소림사를 창건한 발타선사도, 선종의 초대 조사인 보리달마도 중원인 입장에서는 이국의 오랑캐인 셈.
따라서 혜공은 범계위 역시 그들만큼 비범한 자라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큰스님!”
경쾌한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진 것도 그때였다.
“오오, 이게 누구신가.”
언제 정색을 했냐는듯 혜공대사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단악선을 푸근한 미소로 반겼다.
“허허, 우리 시주께서는 언제 이리 키가 자랐는지 모르겠군. 이러다 하늘까지 닿는 것 아닐까 모르겠소이다, 그려.”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이 늙은이야 이제나저제나 누울 자리만 찾는 중이라오.”
단악선의 눈에 언뜻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그 말대로 오랜만에 만난 혜공선사는 예전보다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기력이 쇠한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묘한 현기를 깊게 갈무리한 두 눈만큼은 여전히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다시 뵙게 되어 기뻐요.”
슬쩍 손을 뻗어 맥을 짚어 오는 단악선을 향해 혜공대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네. 빈승은 머지않아 선사들께서 앞서간 길을 따를 것이니, 괜히 애쓰지 말게나.”
포옥 한숨을 내쉰 단악선이 애써 웃었다.
“그럼 차 한잔 가져다드릴까요? 먼 길 오시느라 목도 마르실 텐데…….”
“어려운 길이라 해서 어찌 마다하겠나. 본 사가 큰 신세를 진 은인의 혼례거늘.”
실전되었던 세수경을 되찾게 해 준 은혜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단악선이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혜공대사는 주위를 둘러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겸사겸사 우리 어린 시주에게 전할 말이 있어 왔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군. 이 늙은이의 쓸데없는 노파심이었어.”
묘한 말을 남긴 혜공대사가 법료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법료가 주변에 양해를 구했다.
“바쁘실 텐데 저희가 너무 오래 붙들어 두었습니다. 저희는 추후 따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황급히 고개를 젓는 벽대경을 향해 다시 한 번 축하를 건넨 혜공대사가 법료의 부축을 받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체 뭐지?”
범계위가 두 눈을 끔벅였다.
자신을 지나치며 희미하게 떠올린 혜공의 미소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혜공이 떠난 자리를 다른 사람이 대신 채웠기 때문이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진명진인을 필두로 아미파의 장문인인 정연신니와 형산파의 장문인 진조운이 차례대로 축하를 건네 왔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던 벽대경은 문득 뒤쪽이 소란스러워진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자 아미파의 여승들에게 둘러싸인 단악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한 번을 안 올 수가 있어요?”
“맞아. 정말 너무했어.”
단악선의 손과 품에는 어느새 당과며 전병 같은 먹거리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
그 모습에 벽대경은 당황했다.
아미파의 여승들에게 저런 면모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간혹 중원을 방문했을 때 마주쳤던 아미파의 여승들은 하나같이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근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자중하지 못할까?”
정연신니의 일갈에 아미파의 여승들이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겨우 여승들에게서 풀려난 단악선이 정연신니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 아저씨 혼인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해요.”
정연신니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당금 무림에서 신마의선의 초대장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녀와 나란히 서 있던 진조운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악선 덕분에 백 년 넘게 실전된 형산파의 연혼팔검(燃魂八劍)을 복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화산파의 진명진인이 빙그레 웃더니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한설화가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정말 올 줄은 몰랐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선자께서 초빙하셨는데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소이까.”
진명진인 뒤에 도열해 있던 화산파의 매화검수들이 한설화를 향해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자신들의 장문인과 한설화의 친분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단악선의 입에서 당혹성이 흘러나온 것도 그때였다.
뒤늦게 배에서 내려 어색하게 다가오는 일단의 사람들을 발견한 직후였다.
“저 사람들이 어떻게?”
뜻밖의 손님들을 보며 단악선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바로 청성파의 도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때 구대문파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문파인 만큼 형식적으로 초대장을 보내긴 했다.
하나 참석을 기대하진 않았다.
초악량과 청성파 사이의 질긴 악연을 잘 아는 까닭이다.
그런데 의외로 저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혼인을 축하드립니다.”
“어……. 고마워.”
최근에 새로 장문인으로 취임한 운정진인을 향해 범계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초악량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복잡한 눈빛을 흘리며 서 있던 초악량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성칠자를 죽인 것으로 초악량은 이미 모든 원한을 털어 낸 상황.
굳이 남아 있는 자들에게까지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었다.
반면 청성파는 복수를 언급할 명분도 없었다.
개방에 의해 청성칠자의 악행이 밝혀진 이상 오히려 고두백배 사죄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래서인지 인사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정연신니가 입을 열었다.
“저들은 오기 싫어도 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어진 정연신니의 설명에 단악선은 그들이 초청에 응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