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05)
신마의선-305화(305/500)
신마의선 (305)
“유기진입니다. 명성 자자한 능요능설(能要能說), 능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능요능설?”
“그 어떤 상대라도 일단 설득하려 마음먹는다면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으시다지요? 덕분에 천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신다 들었습니다. 기실 저 같은 사람에게는 무공보다 부러운 능력이지요.”
자신을 유기진이라 소개한 사내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능소밀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한 권의 서책이었다.
“이건?”
의아해하는 능소밀을 향해 유기진이 사람 좋은 미소를 건넸다.
“약소하나 제 성의라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금룡상단에서 곧 안문관(雁門關)을 통해 새외로 나설 모양입니다.”
유기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말아 올렸다.
“아무래도 신마상단을 본격적으로 견제하려는 목적인 듯싶습니다.”
능소밀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나 이처럼 즉각적인 반응은 의외였다.
기러기도 쉬어 간다는 의미 그대로 안문관은 산서의 험준한 산악 지형을 등에 업은 곳.
괜히 천하의 아홉 요새 중 으뜸이라 하는 게 아니었다.
그곳을 통해 새외로 진출한다면 가욕관을 통해 움직이는 신마상단으로서는 지리적 이점이 사라지는 셈.
“거기 적힌 대로 이미 상당한 전력을 끌어모은 모양입니다. 사실 혈운사를 상대하려면 그것도 부족하겠지만요.”
능소밀은 유기진이 건넨 서책을 펼쳤다.
그 안에 기록된 내용을 확인하던 능소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최근 금룡상단의 동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 무위에도 은밀히 금룡상단의 자금을 받고 들어온 상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무위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요.”
유기진의 말에 능소밀이 눈살을 찌푸렸다.
“꽤 귀찮아질 것 같구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금룡상단은 기본적으로 경쟁자를 짓밟으며 성장해 온 상단입니다. 일단 상대를 흔들어 약점을 드러내게 하고, 이후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이 지닌 모든 것을 쏟아부어 흡수하는 걸 기본으로 하지요. 아마도 비슷한 방식으로 신마상단을 공격할 것입니다.”
“…….”
“하지만 저희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지요. 저희에게 있어서 신마상단이야말로 둘도 없는 사업적 동반자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묘하게 말끝을 흐린 유기진이 한 잔의 술을 넌지시 내밀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가만히 유기진을 응시하던 능소밀이 술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차분한 태도로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이는 유기진의 모습에 능소밀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 넓은 천하에 요설(妖舌)의 재능을 지닌 자가 비단 자신만은 아닐 터.
능수능란하게 상대를 설득하는 유기진으로부터 진한 동류의 분위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 * *
초원에 밤이 찾아왔다.
하늘과 맞닿아 끝없이 이어진 지평선.
그 끝에 아슬하게 걸친 채 사위를 온통 붉게 물들인 장엄한 낙조(落照)는 중원에서 경험하지 못한 진한 감동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감흥도 잠시.
해가 지기 무섭게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추위를 피하기 위한 모닥불이 곳곳에 피워졌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모닥불을 중심으로 둥근 방원진 형태를 갖춘 일행은 다음 여정을 준비했다.
그사이 단악선은 가욕관의 책임자인 시조경으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향후 계획을 점검했다.
“북해빙궁이 무너졌으니 북방 새외 세력은 혈운사가 유일해요. 우리는 혈운사를 흔들어 마교를 끌어내고, 이를 이용해 가능한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 그들을 무력화해야 해요.”
최소한 저들의 발호를 늦춰 중원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야 했다.
사무심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칠절마군에게 수장을 잃은 이후 각지로 흩어졌지만 놈들의 생리상 언제든 이합집산(離合集散)이 가능한 놈들입니다. 그런 만큼 한시도 경계를 늦추어선 안 됩니다.”
“실제로도 근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하네요.”
시조경의 서류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최근 혈운사가 빠르게 힘을 규합하는 중이었다.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유목 부족들을 병탄해 규모를 늘리는 중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행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혈운사는 본래 노략과 약탈에 특화된 거친 자들.
빼앗되 다스리지 않고, 영토와 세력에 연연해하지 않던 저들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질적인 움직임이었다.
“확실히 이상하군요.”
단악선으로부터 서류를 넘겨받은 사무심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무심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놈들이 흡수하는 부족의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게 뭐죠?”
단악선의 물음에 사무심이 서류에 기록된 부족들을 가리켰다.
“하나같이 중원과의 조공 무역을 반대하는 강경파 부족이라는 점입니다. 북원의 정통성을 잇는다 자부하는 한(汗)을 지지하는 부족들입니다.”
사무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곳 초원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달연(達延) 한의 부족은 용맹한 것으로 이름 높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승리에 집착해 무모하게 몸을 던지지 않고 때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영리함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자들을 흡수하며 세를 불렸다면 혈운사의 저력 역시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터.
“무언가가 그들로 하여금 변화를 강제했다는 의미로 보이네요.”
단악선의 말에 사무심 역시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더욱 자세한 건 저와 인연이 있는 부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사무심이 동행한 진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과거, 그가 구했던 고아들 중에는 이곳 초원 출신의 아이들도 있었다.
조정이 강행한 몇 차례의 북벌.
그 과정에서 사로잡혀 노예로 팔린 아이들을 구해 준 것을 인연으로 지금까지도 저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고아들 중 한 명은 지금 이곳 초원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권력자 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와의 만남은 단번에 성사되지 않았다.
본래 그들이 지배하던 지역에 들어섰지만 어디에서도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군요.”
그러나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설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일행은 광활한 초원을 헤매야만 했다.
그러다 결국 사무심은 눈에 익은 안장과 고삐를 지닌 초원의 전사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인근 초원을 정찰하던 초병들이었다.
처음에는 바짝 경계하던 초병들은 사무심이 치켜든 깃발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들이 섬기는 대족장.
달연 한을 상징하는 깃발이라는 것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초병들 중 한 명이 사무심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반색하며 뭐라 떠들었다.
그러곤 다른 일행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한 기의 인마가 어딘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른 초병들이 일제히 말을 몰아 사무심에게 다가왔다.
서로의 거리가 좁혀지자 초병들을 지휘하던 우두머리 사내가 반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몰랐다. 은공. 왜 여기?”
상대의 어눌한 한어에 사무심이 빙그레 웃더니 저들의 언어로 능수능란하게 대답했다.
“바얀을 만나러 왔다.”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말 머리를 돌렸다.
그들의 안내를 받아 단악선 일행이 도착한 곳은 처음 예상했던 곳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외곽 지역이었다.
곳곳에 세워진 천막.
저들 말로 게르라 부르는 이동식 집 앞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나와 단악선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인물이 성큼 걸어와 사무심을 덥석 끌어안았다.
“어서 오십시오, 은공.”
적당히 그을린 피부와 강인함이 묻어나는 눈매와 턱선.
사내다운 기상이 물씬 느껴지는 외모를 지닌 청년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사무심의 얼굴 위로 씁쓸함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와 비교해 게르의 숫자나 전사들의 규모가 상당히 줄어 있었기 때문이다.
“근거지를 옮겼군.”
사무심의 말에 청년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야 원래 초지를 침대 삼고 하늘을 이불 삼아 떠도는 자들 아닙니까.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갈 뿐이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청년의 눈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착잡함을 사무심은 놓치지 않았다.
인원만 줄어든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도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변에 도열해 있는 전사들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힘이 넘친다는 점이었다.
사람의 가치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진정 빛을 발하는 법.
눈앞의 청년을 향한 저들의 믿음과 충성이 얼마나 확고한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서로 간에 짧은 인사가 오간 뒤, 사무심이 단악선을 소개했다.
“이 분이 전에 말씀드린 내 은인일세. 지금은 우리를 이끌고 계시지.”
단악선이 앞으로 나서 예의를 갖췄다.
“단악선이에요. 방문을 허락해 주신 바얀 바가투르께 감사드려요.”
“……!”
이곳 부족을 이끌고 있던 젊은 족장, 바얀은 여러 의미로 놀랐다.
우선은 사무심 정도나 되는 사람이 은인으로 모시고 있는 이가 이토록 어리다는 사실에 놀랐고, 다소 어색하긴 했지만 중원인인 소년이 자신들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에도 놀랐다.
바가투르는 용감한 전사를 의미하는 경칭.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이 분명했다.
원래부터 바얀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물질적인 대가와 보상보다 마음에서 우러난 성의와 노력이 중요하다 여기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겪은 험난한 경험을 통해 얻은 그만의 철학이기도 했다.
그래서 바얀은 정중하게 화답했다.
“나 바얀과 부족 모두는 진심으로 손님들을 환영하오.”
빙그레 웃은 단악선이 뒤쪽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장곡을 필두로 한 무인 몇 명이 두 대의 수레를 끌고 와 바얀의 부족들에게 넘겨주었다.
“나름대로 저희가 준비한 성의입니다.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으음…….”
수레에 실려 있는 내용물을 확인한 바얀이 침음성을 흘렸다.
소금과 차를 비롯한 편자, 그리고 각종 약을 비롯한 온갖 물자들이 잔뜩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초원에서 구하기 힘든 독주까지.
지금처럼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시점에서 저 물품들의 가치는 천금과도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는 법.
바얀은 더욱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를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당장의 자존심보다는 부족의 생존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감사히 받겠소.”
직접 안내하는 바얀을 따라 게르 안으로 들어선 단악선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본론을 꺼냈다.
“거처를 옮기신 이유가 혹시 혈운사 때문인가요?”
“…….”
바얀은 애써 불쾌함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하나 부정할 수도 없었다.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저들의 우두머리가 죽은 이후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집요하게 공격을 가하고 있소.”
처음에는 놈들을 격퇴했지만 반복되는 파상 공세로 인한 피해가 점점 누적되었다.
그 과정에서 절반이 넘는 부족 전사들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고, 결국 압박을 견디지 못한 바얀은 두 번이나 근거지를 옮겨야 했다.
달연 한의 깃발을 하사받은 그로서는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부족의 운명을 짊어진 내게 달리 방법이 없었지.”
이곳에는 비단 전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족의 미래인 여자와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당장의 오욕을 감내하기로 한 것이다.
사무심이 이해한다는 듯 안타까운 눈빛을 던졌다.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바로 그들, 혈운사를 무너트리기 위해서일세.”
“혈운사와 싸우겠다는 말입니까?”
바얀이 미심쩍은 눈으로 단악선을 일행을 확인했다.
“은공께서 무림의 고수라는 것은 잘 알지만, 무림과 초원의 전투는 상당히 다릅니다.”
“나를 믿게.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자네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나?”
잠시 고민하던 바얀이 이윽고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혈운사 놈들의 목적은 한의 힘을 약화하는 것입니다. 굴욕적인 조공 무역에 반대하는 강경파를 위주로 복속시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그들의 힘이 커진 만큼 지금은 스스로 찾아가 놈들에게 귀의하는 부족도 나타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나마 혈운사에 대한 거부감이 심해서 끝까지 항전하는 부족도 있다지만 이조차 얼마나 갈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단악선이 가장 궁금했던 점을 질문했다.
“그런데 한 번 크게 와해된 혈운사가 어떻게 이처럼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건가요?”
바얀이 움찔했다.
“그건…….”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바얀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