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06)
신마의선-306화(306/500)
신마의선 (306)
“나의 안다였던 빌게가 조부를 배신하고 놈들에게 붙었기 때문이오.”
“안다요?”
단악선의 반문에 사무심이 설명을 덧붙였다.
“의형제란 의미입니다.”
바얀의 입을 통해 뜻밖의 진실이 드러났다.
대족장인 한의 후계자인 만큼 언젠가 때가 되면 권력이 승계될 터.
하나 그때를 기다리지 못한 그의 손자가 휘하 전사들을 대거 이끌고 이탈해 혈운사에 힘을 실어 준 것이다.
그때 단악선이 바얀에게 물었다.
“바가투르께서는 어떠신가요?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고 싶지 않으신가요?”
바얀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들을 환대하는 내 입장엔 변함이 없소.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나 개인으로서의 입장. 한께 충성하는 초원의 일족으로서 중원인에게 협력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요.”
“그렇다면 이들을 지킬 힘은 있으신가요? 머잖아 혹독한 겨울이 닥칠 거예요. 여기서 한 번 더 거처를 옮긴다면 당장 먹을 것부터 걱정해야 할 텐데요.”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발끈하는 바얀을 향해 단악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우선은 현실을 직시해야 제대로 된 대화가 될 것 같아서요.”
“…….”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혈운사를 토벌하러 왔어요. 그리고 반드시 목적을 이룰 것이고요.”
“그리된다면 우리야 바랄 것이 없지.”
“그럼 저희들을 도와주시겠어요?”
“이미 말했다시피…….”
“저희에게 직접 전사들을 빌려 달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
의아해하던 바얀은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얀께서는 기존에 조공 무역에 의지하고 있던 부족들과 접촉해 그들의 협력을 얻어 주세요.”
“그 변절자들과 뜻을 함께하란 말인가?”
“아무리 뜻을 달리한다 해도 결국에는 그들도 초원의 사람들이에요. 그들이라 해서 혈운사의 세력이 강해지는 걸 원할 리 없어요. 결국에는 자신들의 목을 죄어 올 테니까요.”
“하지만…….”
“처음부터 그들과 힘을 합쳤다면 혈운사가 이처럼 세를 확장하지도 못했을 테죠.”
정곡을 찌르는 단악선의 말에 바얀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는 말처럼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오.”
바얀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그동안 서로 반목하며 경원시한 시간이 짧지 않았던 만큼 협상 자체가 요원한 것이다.
그런데 단악선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명예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이들이니 확실한 대가를 보장하면 충분히 협력하지 않을까요?”
“대가?”
“저들과 접촉하기 위해 필요한 물자는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혈운사를 상대하기 위한 보급도 책임질 거고요.”
“……!”
일순 충격을 받은 듯 바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그대들이 얻는 게 무엇이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단악선은 의외로 선선히 대답했다.
“저희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더 이상 혈운사에 복속되는 부족이 늘어나면 안 된다는 것뿐이에요. 그것만으로도 혈운사는 스스로 무너질 테니까요.”
세를 늘리며 점령한 뒤에는 경영과 치세가 뒤따라야 하는 법.
하나 단순히 힘으로 규합한 뒤 약탈에 의지하는 경제 체계는 언젠가 한계에 달할 것이 분명했다.
부족들이 연합해 힘이 강성해지면 혈운사 역시 함부로 그들의 지역을 약탈하기 힘들어질 터.
그들의 발을 묶어 한정된 지역에 몰아넣는 것만으로도 이 계획은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다.
“게다가 조만간 조공 무역은 폐지될 거예요. 조공 무역에 의지해 온 부족들은 당장 미래가 불확실해질 테죠. 그런 만큼 이쪽의 제안을 거부하진 못할 거예요.”
아울러 서역 상단과의 교역을 통해 얻은 이익을 저들에게 꾸준히 배분한다면 더 이상 부족 사이의 갈등이 된 조공 무역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바얀이 입을 연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런데 괜찮겠소?”
“……?”
“장담하기에는 이르나, 초원의 부족들이 하나로 결속된다면 그대들의 황제가 달갑게 여기지 않을 텐데?”
단악선이 빙긋 웃었다.
“괜찮아요.”
능소밀이 들었다면 비명을 질렀을 말이지만 단악선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능소밀의 능력을 누구보다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바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눈앞의 적에게 집중하자고요.”
이때 게르 안으로 황급히 뛰어드는 인물이 있었다.
단악선 일행을 이곳으로 안내한 초병이었다.
“놈들이 나타났습니다.”
갑작스런 혈운사의 등장에 바얀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놈들의 위치는?”
“서북쪽으로 반나절 거리입니다.”
“그 방향이라면…….”
자신들과 우호적인 부족이 터를 잡은 곳이었다.
바얀은 잠시 갈등했다.
도의상으로는 지원군을 보내는 것이 맞지만 어쩌면 이조차도 놈들의 계략일 수도 있었다.
지원군을 보내 이쪽의 전력이 공백 상태가 되었을 때 놈들이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이치로 우회해 들이닥치면 그야말로 손쓸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단악선이 입을 열었다.
“저희가 다녀올게요.”
“당신들이?”
뜻밖의 제안에 의아해하던 바얀은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곧 같은 편이 될 텐데 한 명이라도 구해야죠.”
지체 없이 게르를 나선 단악선이 말 위에 몸을 실었다.
“총관 아저씨는 이곳에 남아 향후 계획을 상의해 주세요.”
사무심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여유로운 일행의 모습에 바얀은 당황했다.
천하의 혈운사를 상대하는데 그 어떤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다른 의미로 당황하고 말았다.
하나같이 멋들어지게 신형을 뽑아 올려 말 위에 올라타는 것까진 좋았는데, 막상 말을 다루는 모습은 영 어설프고 불안했던 것이다.
말을 모는 건지, 매달려 가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괜찮겠습니까?”
바얀의 질문에 사무심이 어색하게 웃었다.
“염려 말게.”
초악량과 한설화를 위시한 일행들의 무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무심이었다.
한데 그런 그의 눈에도 일행의 모습은 영 못 미더워 보였다.
‘돌아오면 기마술부터 제대로 익히게 해야겠군.’
우려와 불신을 거두지 못하는 바얀의 눈빛에 괜히 자신까지 민망해지는 사무심이었다.
* * *
타오르는 붉은 노을이 드넓은 대지를 물들였다.
그러나 그 아래 대치하고 있는 두 세력은 그 어떤 감흥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끝없는 분노와 적의에 몸을 내맡긴 채 상대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패배를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하라!”
쩌렁한 일갈이 차가운 대기를 흔들었다.
백 명으로 구성된 별동대를 이끌고 있는 마운은 혈운사 내에서도 보기 드물게 중원에 뿌리를 둔 무인 출신이었다.
상대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마운은 고압적인 눈빛을 뿌리며 엄포를 이어 갔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거절한다면 모두 죽을 것이다.”
맞은편에서 대치하고 있던 삼십여 기의 기마.
그 선두에 선 장한이 이를 갈며 받아쳤다.
“닥쳐라! 우리는 자랑스러운 수부타야의 전사들! 이 자리에서 죽을지언정 너희 같은 족속들에게 굴복할 수 없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부타야 측 진영에서 성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운의 눈에서 탐욕 어린 광기가 일렁였다.
그로서는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놈들이 항복하면 노획할 수 있는 전리품이 줄어들지만 깨끗이 쓸어버리면 그만큼 거머쥘 수 있는 이득이 늘어나는 것이다.
일단 회유는 했으니 돌아가서 질책을 받는다 해도 충분히 변명할 수 있었다.
마운이 수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전부 죽여라. 베어 낸 머릿수에 따라 노획한 양과 말을 배분해 주겠다. 오늘 밤 저놈들의 계집을 품고 승리를 만끽할 것이다.”
“와아아!”
백 명에 달하는 기마가 일제히 대지를 박차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서른 명 남짓한 수부타야 부족의 전사들은 밀려드는 절망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수적으로도 열세였지만 전력 자체가 놈들과 비교되지 않았다.
남부 초원의 강자라 자부하는 그들이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상태.
처음 놈들과 격돌할 때만 해도 삼백에 달했던 병력은 보름에 걸쳐 반복된 격전에 의해 유명을 달리한 지 오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물러설 수 없었다.
“가자! 다 함께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자!”
수부타야 측을 지휘하는 툴가의 외침에 그의 휘하 전사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말을 내달렸다.
콰콰콰쾅!
순식간에 기마와 기마가 뒤얽히고, 난무하는 금속성과 차가운 청광 사이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큭!”
“커헉!”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비명 대부분은 수부타야 부족 측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최후의 힘을 쥐어짜 분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내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부족의 미래에 짙게 드리운 암운(暗雲).
난데없이 들이닥친 재앙을 떨쳐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힘이 다한 전사들이 하나둘 말에서 거꾸러지기 시작했다.
“혼자 죽지 마라! 한 놈이라도 데려가라!”
피눈물을 삼키며 외치는 툴가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한번 기울어진 승기는 도저히 뒤집을 방법이 없었다.
툴가는 아득한 절망에 몸서리쳤다.
이대로 자신들이 쓰러지면 부족의 여자와 아이는 노예로 전락할 것이고, 저들이 노획한 양과 말은 힘을 키워 주는 원동력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툴가가 눈을 부릅떴다.
이쪽을 향해 빠르게 접근하는 일단의 기마를 발견한 툴가가 남은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지원군이다! 조금만 더 버텨라!”
기마의 선두에 매달려 있는 깃발은 바얀 부족의 것이었다.
하지만 짧은 희망은 이내 더욱 큰 실망으로 돌아왔다.
놈들의 배후를 노린 것은 좋았지만 기마의 숫자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이십 기 남짓한 병력으로는 눈앞의 혈운사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흥!”
뒤늦게 이를 눈치챈 마운 역시 코웃음을 치며 명령을 내렸다.
“오십은 나를 따라라. 새로 합류한 놈들을 친다. 나머지는 이곳을 정리하도록.”
진영을 둘로 나눈 마운이 그대로 바얀 부족의 깃발을 내건 상대 병력과 격돌했다.
“전부 죽여라!”
섬뜩한 웃음을 말아 올린 마운이 붉은빛이 감도는 연자창을 들어 가장 만만해 보이는 상대를 향해 내질렀다.
우드득.
“……?”
마운이 뭔가 심상치 않다 느꼈을 때는 이미 말 위에서 굴러떨어진 다음이었다.
지극히 짧은 찰나의 순간.
연자창의 궤도와 엇갈려 날아든 시커먼 묵봉이 창대를 휘감아 튕겨 내나 싶더니, 그대로 파고들어 늑골을 으스러트려 버린 것이다.
끔찍한 고통에 눈앞이 아득해졌지만 그 와중에도 마운은 곧장 몸을 굴리며 반격을 시도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묵봉을 휘둘렀던 어린놈이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목뒤가 뜨끔하더니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대체 언제!’
경악하는 마운과 달리 그의 마혈을 제압한 단악선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네요.”
“……!”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마운의 눈에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고작 절반도 되지 않는 수의 기마에 의해 자신이 이끌던 병력이 그대로 박살이 나고 있었다.
단순한 공방의 교환 정도가 아니라 처음 보는 가공할 신위 앞에 산산이 짓이겨지고 으깨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혈풍(血風)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무림인!’
그것도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실력자들이었다.
하나 뒤늦게 저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해도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자신을 따라온 수하들의 목숨을 잡아먹고도 부족했던지, 놈들은 그대로 말을 달려 수부타야 부족을 압박하던 수하들마저 노리기 시작했다.
‘안 돼!’
마운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초악량과 한설화를 필두로 한 무위의 무인들에게 허망하게 배후를 내준 혈운사 무인들은 제대로 된 반항 한번 하지 못한 채 너무나 맥없이 쓰러졌다.
고작 일다경 남짓.
혈운사의 별동대 하나가 대지를 적신 선홍빛 핏물로 화해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