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16)
신마의선-316화(316/500)
신마의선 (316)
검지손가락 정도 되는 길이의 원통형 물체.
처음에는 용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상아를 깎아 만든 재질이 독특하긴 했지만 그것뿐.
그 외의 특별한 장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딸칵.
“아!”
단악선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혹시 몰라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끄트머리 부분이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비어 있는 내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보관함이었군요.”
단악선의 얼굴 위로 언뜻 실망감이 떠올랐다.
암존 정도나 되는 인물이 소지하고 있었기에 대단한 물건이 아닐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악선이 그 안에서 돌돌 말려 있던 종이를 꺼냈다.
펼치고 나니 손바닥 정도 되는 크기의 종이였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새하얀 백지.
단악선에게 이를 건네받아 유심히 살피던 초악량이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특이한 점은 찾아볼 수 없구나.”
일부를 물에 적셔 보기도 하고, 불빛에 비추어 보기도 했지만 그저 평범한 종이일 뿐.
단악선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특이한 점이 없어서 더욱 특이한……. 그런 경우네요.”
의아해하던 초악량은 이어진 단악선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잖아요. 암기를 포함해 최소한의 물건만 지니고 있는 사람이 이유 없이 이런 걸 가지고 있을 리 없으니까요. 분명 나름의 용도가 있을 거예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단악선이 종이를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도 모자라 종이 일부를 찢어 입에 넣고 맛을 보기도 했다.
그러기를 잠시.
단악선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하는 걸 초악량은 놓치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그저 단순한 종이가 아니에요. 무언가 독특한 처리가 되어 있어요. 약 냄새가 나거든요.”
고개를 갸웃하던 단악선이 휴대용 지필묵을 꺼내 종이 위에 글자를 채워 넣었다.
그런데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가 더 있을 것 같은데…….’
마교의 고위 핵심 인사가 연락을 주고받는다면 무엇보다 기밀 유지를 필수로 할 터.
그 안의 정보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을 만한 보완책이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단악선은 다시 한 번 보관함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미처 확인해 보지 않은 것이 있었다.
단악선이 보관함을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
아니나 다를까.
종이에서 나던 냄새와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특히 처음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뚜껑 부분에서 유독 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냄새.
바로 광물성 약재 특유의 금석취(金石臭)였다.
뚜껑 부분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힘을 가해 보길 잠시.
톡톡.
뚜껑을 두들겨 보던 단악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안쪽에 이중으로 한 번 더 비어 있는 공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손가락에 묻어 있는 미세한 분말을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만큼 극소량의 가루.
이를 혀에 살짝 갖다 대 맛을 보던 단악선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인(燐), 황(黃)……. 그리고 수은(水銀)인가?’
그 외에도 두어 가지 성분이 더 포함된 것 같았지만 미각과 후각만으로 정확히 구분해 내는 건 무리였다.
단악선은 무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분말 속에 포함된 성분들이 어떤 작용을 일으킬지 고심하던 단악선의 눈빛이 한순간 달라졌다.
단악선이 들고 있던 종이 위에 보관함의 뚜껑 부분을 흔들었다.
그러자 종이에 변화가 있었다.
물을 묻혔던 부분만 검붉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핏빛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색이었다.
단악선이 재빨리 손가락에 물을 묻혀 종이 위에 글씨를 적어 나갔다.
물은 금세 말랐고, 당연히 종이 위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한데 그 위로 뚜껑 안에 담겨 있는 미세한 분말을 뿌리니 물로 적었던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역시 그랬어요.”
단악선이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이건 일종의 감응지(感應紙)였어요.”
특수한 방법으로 처리해서 일정 조건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종이.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종이 전체에 도포되어 있는 특정 성분이 물과 작용해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다시 보관함 속에 숨겨져 있던 분말과 만나 색을 변하게 만드는 것이다.
순간 단악선이 들고 있던 종이가 바스러지듯 흩어졌다.
마치 원래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용도를 다한 직후 완벽한 증거 인멸을 목적으로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일단 이건 비밀로 해야겠어요. 어쩌면 결정적인 순간에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보관함에 들어 있던 종이는 총 다섯 장.
그 용도를 확인하기 위해 한 장을 소진했으니 이제 네 장이 남은 셈이다.
“용케도 알아냈구나.”
초악량의 탄성에 단악선이 멋쩍은 듯 배시시 웃었다.
“별거 아니에요. 집중하고 고민하면 누구라도 알아냈을 거예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단악선이었지만 초악량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만약 마교의 고위 인사가 들었다면 기막혀 할 말이었다.
‘감응지라 했던가?’
비밀스러운 연락 수단을 강구하기 위한 마교의 노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한데 단악선은 이를 파헤쳐 완벽하게 무력화했다.
이는 결코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그것을 해낸 본인은 스스로 얼마나 대단한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초악량이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 짓던 그때.
주변을 정찰하던 초원의 전사들이 황급히 말을 달려왔다.
뭐라 다급하게 외치는 모습에 초악량의 눈에 긴장감이 자리 잡았다.
이곳은 혈운사 본대의 근거지와 그리 멀지 않은 위치.
어쩌면 물러났던 놈들이 다시 돌아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안도한 눈빛을 흘렸다.
“명의 기병이 접근하고 있다는데요?”
전투를 마무리 지은 직후.
사태의 수습을 위해 가욕관과 안문관 쪽으로 지원 요청을 한 기억이 떠올랐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혈운사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렇지?”
주위를 둘러보던 초악량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바짝 긴장한 초원의 사내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말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진형을 갖춘 그들의 눈에 자리 잡은 짙은 두려움과 긴장감을 그라 해서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무리도 아니죠. 아무래도 이들에겐 중원의 군대에 대한 나쁜 기억이 뿌리 깊이 박혀 있을 테니까요.”
단악선의 설명에 초악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원의 부족이 이토록 경계하는 데에는 나름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을 몰아내고 명을 건국한 이후 몇 번이나 단행되었던 북방 정벌.
어쩌면 저들에게는 혈운사만큼이나 두려운 이들이 장성 너머에 주둔하고 있는 정규군일 것이다.
이때 단악선이 초원의 전사들을 향해 외쳤다.
“걱정 마세요. 지금 오는 병력은 우리를 지원하기 위한 아군이니까요.”
그렇게 단악선이 초원의 부족들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이쪽으로 접근해 오는 군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수가 어림잡아도 칠백 이상에 달했다.
예상을 훨씬 넘어선 규모에 단악선도 당황했다.
이 정도 규모라면 관문을 지키던 병력의 절반을 동원한 셈.
게다가 저들을 지휘하고 있는 지휘관의 얼굴도 낯설었다.
“아!”
단악선은 단번에 그가 안문관 쪽에서 출진한 지휘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욕관과 안문관, 양측에 동시에 연락을 했지만 지리상으로 안문관이 가까웠던 만큼 그들이 먼저 도착한 것이다.
“안문관의 양홍서다.”
스스로를 양홍서라 밝힌 지휘관이 곧장 단악선을 향해 다가왔다.
“네가 이 무리의 책임자인가?”
삼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한눈에 봐도 오만함이 느껴지는 눈빛과 표정이었다.
단악선을 향해 곧바로 질문을 던진 것을 보면 사전에 어느 정도 상황을 숙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데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표정엔 지금의 상황이 달갑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금룡상단 일행이 안문관을 통해 넘어온 만큼 그 역시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 정도 피해라면 틀림없이 문책이 뒤따를 터.
그 불쾌한 감정이 고스란히 눈빛과 목소리에 묻어났다.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을 들어야겠다.”
아랫사람에게 명령하듯 입을 여는 그의 태도에 초악량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꼬박 날을 새워 가며 치료를 한 의원이다. 전후 사정을 파악하는 것은 금룡상단의 생존자들에게 들어도 될 터.”
양홍서가 피식했다.
“오랑캐치곤 중원어가 제법 능숙하군.”
“……!”
“아, 아닌가? 이거 실례했군. 오랑캐들과 어울려 있으니 구분하기가 영 쉽지 않아서.”
자신을 향한 비아냥은 둘째 치고, 초원의 부족을 면전에 두고 오랑캐 운운하는 양홍서의 태도에 초악량의 눈에서 차가운 불꽃이 튀었다.
비록 민족은 다르다 하나 함께 사선을 넘나든 동료들이다.
이런 식으로 모욕받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더 화가 나는 건 그 말을 듣고도 입술을 짓씹으며 분노를 억누르는 초원 전사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이라 해서 중원어를 아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특히 바얀과 함께 중원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전사들이 오랑캐 운운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명예가 걸린 문제만큼은 결코 그냥 넘기는 법이 없는 그들이었다.
그런데 모욕을 절대 참지 않는 그들이 애써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그들의 가족 상당수가 가욕관 너머, 중원 땅에 일신을 의탁하고 있는 상황.
그런 만큼 만에 하나 가족에게 피해가 갈지 몰라 함부로 중원의 장수를 적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초악량은 화가 났다.
그런데 눈치도 없이 양홍서는 거만한 표정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 보고를 들을지는 내가 선택한다. 자, 그러니 답해라.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지?”
그 말에 초악량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말아 올렸다.
초악량을 아는 사람이 보았다면 소스라치게 놀라 그대로 달아났을 섬뜩한 미소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양홍서는 군문의 사람.
그것도 천하오절과 관련된 이야기까지 한낱 저자를 떠도는 풍문 정도로 여기는 부류였다.
게다가 그의 뒤에는 수백의 기병이 버티고 있었다.
초악량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양홍서를 태우고 있던 말이 앞발을 들며 펄쩍 튀어 올랐다.
“어엇!”
당황한 양홍서가 고삐를 낚아챘지만, 그가 타고 있던 말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더욱 길길이 날뛰었다.
쿵.
“큭!”
졸지에 그대로 낙마한 양홍서의 얼굴이 불붙은 석탄 가루가 내려앉은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그것도 수하들 앞에서!
뒤늦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초악량을 발견한 양홍서가 흠칫하며 그대로 굳어졌다.
더없이 차갑게 식은 초악량의 눈.
그 안에서 쏟아지는 살기를 뒤늦게 눈치챈 것이다.
“가, 감히 본관을 해치려 드는 것이냐?”
그 무엇으로 형언할 수 없는 가공할 살기.
난데없이 이와 맞닥뜨린 양홍서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냉혹했다.
“안 될 게 무어란 말이냐.”
“……!”
지척에서 뿜어낸 초악량의 살기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양홍서의 낯빛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무림인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천자의 백성.
지엄한 황제의 명에 따라 군을 통솔하는 자신에게 이처럼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 제아무리 군문에서 많은 시간을 굴렀다 한들 초악량 정도 되는 고수를 상대해 본 적 없는 그로서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사람이 초악량을 향해 걸어온 것도 그때였다.
“같이 해.”
한설화였다.
처음에는 그 말의 의미를 몰라 의아해하던 양홍서의 얼굴이 이내 해쓱해졌다.
초악량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자신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빛.
그 너머에서 웅크리고 있는 나락이 입을 벌려 자신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