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22)
신마의선-322화(322/500)
신마의선 (322)
쾅!
보르테가 앉아 있던 의자가 산산이 부서져 박살 났다.
의자를 걷어차 박살 낸 보르테가 출정을 요구한 대주들을 노려봤다.
속에서 천불이 치밀었다.
별도의 외부 활동을 금지한 뒤 대기를 명령했지만, 그 시간이 길어지니 슬슬 내부적으로 불만이 쌓여 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언제 반발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 셈이다.
“본대를 이탈하겠다고?”
살기를 담아 나직이 으르렁대는 보르테의 음성에 대주들이 저마다 명분을 늘어놓았다.
“저들의 세력이 불어나는 걸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라도 병력을 운용해 공략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대로 더 방관했다가는 막상 전투가 벌어졌을 때 제대로 힘을 써 보지도 못하고 머릿수에 눌려 패배할 것입니다.”
부족들이 더 연합하기 전에 공격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은 얼핏 일리 있어 보였다.
하지만 보르테에게는 그 의도가 너무 빤히 보였다.
지금은 자신의 명령에 묶여 있다곤 하나 한번 떠난 이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내 말이 우습나?”
보르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주들의 눈빛, 말투 하나하나가 자신을 우두머리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암존이 있을 때만 하더라도 그의 위세에 눌려 숨도 못 쉬던 놈들이 이제 슬슬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자신의 물음에 그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게르 안으로 뛰어든 수하 한 명이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냥을 하러 갔던 이들이 전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뭐라?”
“이 지역 일대의 짐승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고 합니다.”
“……!”
“놈들이 어떤 수작을 부린 것으로 짐작됩니다. 확인 결과 비슷한 상황이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어진 수하의 보고에 보르테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하루빨리 식량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열흘을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보르테가 침음성을 흘렸다.
당장 식량이 떨어진다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허락하신다면 좀 더 먼 사냥터로 향해 사냥감을 물색해 보겠습니다.”
대주 중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 속내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대로 본대를 이탈해 제 살길을 모색해 보려는 심산일 터.
하나 이를 순순히 허락한다면 다른 대주들의 이탈을 부추기게 될 것이 분명했다.
끓어오르는 노기를 애써 삭이며 보르테가 명령했다.
“사냥대를 편성해라. 최대한 빨리 식량을 확보하되,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놈들이 함정을 파고 기다릴 가능성이 높다.”
“……그리하겠습니다.”
마지못해 대답하는 꼴이 마뜩잖았지만 당장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대주들이 물러가자 홀로 남은 보르테가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손 놓고 지켜보고만 있을 텐가?”
분명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텐데도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이에 보르테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분명 나를 돕겠다 하지 않았나? 내 권위를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본보기가 필요한 것 같은데.”
“추하군.”
“뭐라?”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보르테가 고개를 돌렸다.
지척에서 모습을 드러낸 갈염의가 차가운 눈빛을 흘리고 서 있었다.
“이제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나?”
“깨닫다니? 뭘 깨닫는단 말이냐?”
보르테의 반문에 갈염의의 입매가 슬쩍 비틀렸다.
“애초에 스스로 쟁취해 얻은 권력도 아니지 않은가?”
“……!”
“본래 노력 없는 대가는 이처럼 덧없는 법이야.”
갈염의의 조롱에 보르테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갈염의가 말을 이어 갔다.
“그게 전투를 앞두고 있는 수장의 생각인가? 지금 대주들을 죽인다면 혈운사의 사기는 바닥을 칠 텐데?”
보르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우리가 전투를 앞두고 있다고?”
갈염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얀 쪽의 동향이 심상치 않은 것 같더군.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것 같아.”
“그걸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고?”
갈염의에게 말허리를 잘린 보르테가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 이어진 갈염의의 말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말했다면? 그 정보를 가지고 무언가를 할 능력은 있고? 섣불리 행동하다 우리 계획까지 망쳤겠지.”
“감히!”
자신을 무시하는 갈염의의 태도에 보르테는 눈이 뒤집어졌다.
손을 뻗어 자신의 창을 잡아 가던 보르테가 멈칫했다.
목에 와 닿는 섬뜩한 예기.
고개를 숙이자 턱 밑에서 하얗게 웃는 비수와 그걸 거머쥔 살수를 마주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보르테의 발작을 잠재운 갈염의가 특유의 고저 없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능력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아직도 자신의 위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군.”
“…….”
“잊지 마라. 그 자리를 노리는 자가 한두 명이 아니란 것을. 게다가 혈운사의 우두머리가 꼭 자네여야만 한다는 법도 없지.”
얌전해진 보르테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갈염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보르테의 목에 비수를 대고 있던 흑야벌 소속의 살수가 천천히 물러섰다.
보르테가 마른침을 삼키며 목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곤 갈염의를 노려보며 낮게 으르렁댔다.
“당신들의 일은 대체 언제 끝나는 것이오?”
갈염의가 쓰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군. 정말 쉽지가 않아.”
암존의 살행이 수포로 돌아간 이후 초악량과 한설화는 한시도 단악선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곧 기회가 올 거야. 놈들이 움직이면 우리는 일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보르테는 직감할 수 있었다.
갈염의가 말하는 우리에 자신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 * *
“척후병 둘을 발견했습니다.”
사냥지를 정탐하던 수하의 보고에 투르가 침음성을 흘렸다.
“역시나 함정인가?”
그는 수하들을 대거 이끌고 사냥에 나선 참이었다.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기를 잠시.
“우선은 척후병을 제거해 시간을 번다. 그리고 빠르게 복귀한다.”
대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혈운사 몇 명이 조심스럽게 언덕을 기어 올라갔다.
저 멀리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말 두 마리.
그리고 그 위에 앉아 잡담을 나누는 바얀의 전사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활에 오늬를 먹였다.
피잉.
시위를 떠난 화살이 긴 곡선을 그리며 목표했던 상대에 적중했다.
맥없이 말 위에서 굴러떨어지는 적의 척후병을 확인한 혈운사는 사냥한 짐승들을 싣고 서둘러 복귀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갔나?”
놀랍게도 화살에 맞고 굴러떨어졌던 사내가 천천히 신형을 일으켰다.
함께 쓰러져 있던 다른 한 사람도 움켜쥐고 있던 화살을 내던지며 씨익 웃었다.
“아주 꽁무니가 빠져라 튀는군.”
“아마도 이 근처에 아군 전사들이 매복을 하고 있다고 짐작했을 테니까.”
“이로써 다른 의심은 못 하게 되겠지?”
바얀의 전사들로 위장하고 있던 독릉산응(毒陵山鷹) 조맹방과 혈음노봉(血陰老蜂) 양익천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화살에 맞은 척 연기를 펼치는 건 그들 정도 되는 고수에게 그다지 어려운 임무도 아니었다.
혼전 중에 날아든 눈먼 화살이라면 모를까, 미리 알고 대비하면 날아오는 화살쯤이야 얼마든지 낚아챌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거리도 멀었기에 놈들은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저들은 자신들이 음모를 떨쳐 냈다 굳게 믿을 것이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진짜 함정은 눈치채지 못하게 되리라.
이른바 작은 것을 얻고 큰 것을 내어 주게 만드는 이양역우(以羊易牛)의 계책.
큰불로 작은 불을 덮듯 암계 안에 다른 암계를 감추는 방법이었다.
“그럼, 가지. 곡주님께 보고하러.”
“흐흐. 한동안 몸이 찌뿌듯했는데 조만간 제대로 몸을 풀 수 있겠군.”
이제 이 지긋지긋한 초원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니 괜히 시원섭섭해지는 그들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이천에 달하는 기마가 대열을 이뤄 전투 준비를 마쳤다.
“우리에게는 의무가 있다.”
그들의 선두에 선 바얀이 전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선조께서 피와 땀으로 개척한 이 초원을 우리의 자식들에게 다시 물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사내고 이 초원의 주인으로서 책무며 권리다. 하나 우리는 지금 존망의 시험대 앞에 섰다.”
바얀은 능숙한 독전관(督戰官)처럼 연설을 이어 갔다.
“지금껏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며, 마지막 숨이 다하는 날 고단한 몸을 눕힐 곳도 오직 이곳 초원뿐이다.”
숨죽인 채 전의를 불태우는 전사들의 눈빛 하나하나를 마주하며 바얀이 목소리를 높였다.
“비록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는 것을 세상이 주목하지 않더라도 우리만큼은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단언하건대, 우리의 싸움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영광스러운 기록으로 남으리라.”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사기.
하나의 군세를 이룬 기마 병력이 내뿜는 군기(軍氣)를 바얀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바얀의 독려사가 절정에 이르렀다.
“초원의 가호 아래 명예롭게 싸우고, 명예롭게 죽으리라!”
“와아!”
이천의 기마가 일시에 터트린 쩌렁한 함성이 초원을 가득 메웠다.
“가자! 우리는 오늘 신성한 이 초원을 모욕한 적들의 피와 비명으로 지난 오욕을 걷어 내고 명예로운 역사에 걸맞은 긍지를 되찾는다.”
그 말을 끝으로 바얀을 필두로 한 이천의 기마가 초원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바로 혈운사를 이 땅에서 쓸어 내 버리는 것이었다.
그 시각.
혈운사 본단은 혼란이 극에 달해 있었다.
난데없이 발병한 괴질에 곳곳에서 신음과 괴성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시작된 원인 모를 피부병.
오한과 발열, 무기력을 동반한 증상은 삽시간에 혈운사 전체로 번져 나갔다.
‘제기랄!’
수포가 올라와 가려운 팔을 할퀴듯 벅벅 긁던 보르테가 으스러져라 이를 악물었다.
이처럼 빠르게 번지는 병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원인은 하나.
바로 독이었다.
툭.
결국 수포가 터지며 진물과 뒤섞인 피가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바람에 피부는 이미 걸레처럼 너덜거렸지만 그래도 긁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갑옷들이 눈에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최소한의 무장도 도외시한 채 온몸을 긁어 대는 수하들의 한심한 모습에 보르테는 고함을 질렀다.
“정신 차려! 이 머저리들아!”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말을 귀담아듣는 자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는 또 있었다.
바로 갈염의였다.
“사냥해 온 식량에 문제가 있었나 봅니다.”
수하의 말에 갈염의가 조소를 머금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군. 그런 기본적인 것도 확인을 하지 않다니.”
흑야벌은 이곳에 온 이후 건량에 의지해 끼니를 때워 왔다.
그래서 눈앞의 사달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이때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부복했다.
“바얀을 위시한 부족들이 이곳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준비를 해야겠군.”
“그런데 이 사실을 저들에게 알리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수하의 질문에 갈염의가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혈운사가 무너지는 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지?”
“죄송합니다.”
“우리는 오직 신마의선을 제거하는 데 집중한다. 그게 우리가 받은 명령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곧 이곳에서 난전이 벌어질 것이다.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겠지.”
“하지만 암존께서도 실패했습니다. 혹 방도가 있으십니까?”
“놈에겐 큰 약점이 있다.”
“약점이라 하시면……?”
갈염의가 비릿한 웃음을 말아 올렸다.
“곧 알게 될 것이다. 내 손으로 놈을 처리할 테니, 너희들은 지시했던 대로 움직여라.”
“복명!”
흑야벌의 살수들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