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25)
신마의선-325화(325/500)
신마의선 (325)
바얀은 입맛이 몹시 썼다.
어린 시절, 그의 부족이 명군에 쓸려 나가고 자신은 노예로 중원에 끌려간 것도 따지고 보면 대칸이 북쪽으로 근거지를 옮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충성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교를 등에 업은 혈운사가 초원의 부족들을 복속시키며 세를 불려 나가기 시작했을 때도 수차례에 걸쳐 지원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의 군사가 움직이면 이를 경계한 명의 군사들도 다시 북벌을 감행하리란 우려 때문이었으리라.
그만큼 그는 명을 경계했고, 두려워했다.
‘과연 그에게 자격이 있을까?’
그런 의구심이 새삼 바얀의 가슴을 채웠다.
그리고 이는 바얀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급변한 주변의 분위기를 읽었음인지 전령으로 온 대칸 휘하의 병사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자리 잡았다.
“무엇 하느냐? 어서 알현할 채비를 서두르지 않고?”
불안해진 칙사가 바얀을 다그쳤다.
그러나 바얀은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얀이 눈을 들어 칙사와 시선을 마주했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은 바얀의 눈빛에 칙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리 형제들이 죽어 가는 동안, 칸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 그 무슨 망발을!”
“혈운사가 초원을 유린할 때, 어찌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느냐 묻는 겁니다.”
칸의 칙사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하나같이 자신에게 모아진 시선들.
대답 여하에 따라 여차하면 금방이라도 칼을 뽑아 들 기세였다.
당황한 칙사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바얀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저 중원인들은 오히려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바얀이 침중한 표정으로 칙사를 바라봤다.
“그렇게 함께 흘린 피가 우리를 형제로 만들었습니다.”
극한까지 몰린 위기.
존망의 갈림길 위에서 바얀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어려울 때 찾아와 손을 내미는 친구야말로 진정으로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마지막까지 예의를 다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게 초원의 명예고, 긍지입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굴리는 칙사를 향해 바얀이 단호하게 말했다.
“중원의 형제들이 무사히 귀환한 뒤 제가 직접 칸을 알현하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돌아가십시오.”
“……!”
칙사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칸의 명령에 거역하다니!
결국 바얀이 마지막 선을 넘은 것이다.
반대로 바얀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해방감과 고양감이 가슴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칸의 칙사를 돌려보낸 바얀이 잠시 복잡한 눈빛을 흘렸다.
저들이 돌아가 뭐라 보고할지는 뻔했다.
어쩌면 역심을 품었다고 생각해 군사를 동원할지도 모르는 일.
훗날을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생사를 함께한 중원의 형제들이 눈앞에서 모욕당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는 그의 휘하 전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로 합류한 부족들 역시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지지를 보내오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바얀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그러니…….”
이어진 바얀의 외침에 뜨거운 환호가 초원을 가득 메웠다.
“지금은 떠들고 마셔라! 우리는 승리했고! 또 계속 승리할 것이다!”
“와아!”
의지가 묻어나는 바얀의 외침에 초원의 전사들은 후끈한 열기로 화답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단악선은 끝없이 울려 퍼지는 함성을 뒤로한 채 돌아섰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단악선이 도착한 곳은 주둔지 가장 외곽에 위치한 작은 게르였다.
“무위로 돌아가는 걸 조금 서둘러야겠어요.”
단악선의 말에 초악량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단악선은 방금 전 대칸의 전령이 다녀간 이야기를 언급했다.
그 말에 초악량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건 비슷하군.”
상황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초원의 지배자인 대칸의 입장에서는 휘하의 일개 부족에 불과한 바얀이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을 터.
일찍부터 견제에 나선 것이리라.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바얀의 입장도 곤란해질 거예요.”
“하지만 아직 저놈이 입을 다물고 있구나.”
초악량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단악선은 마혈이 잡힌 채 게르 기둥에 기대어 있는 갈염의를 보았다.
이미 여러 차례 사무심의 가혹한 심문을 겪은 그의 몰골은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참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염의는 여전히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채 단악선을 노려봤다.
독을 잔뜩 품은 독사 같은 눈빛이었다.
이를 마주한 단악선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인정할게요. 당신이 이겼어요.”
“죄송합니다.”
사무심의 사과에 단악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총관 아저씨의 잘못이 아닌걸요. 저 사람의 의지가 그만큼 대단한 거죠.”
갈염의를 향해 다가간 단악선이 품속에서 작은 목갑을 꺼냈다.
그 안에서 꺼내 든 침을 발견한 갈염의가 단악선을 비웃었다.
“그 어떤 고문에도 난 굴복하지 않는다.”
“이건 고문이 아니에요.”
“……?”
“말했잖아요. 아는 걸 모두 밝히게 될 거라고.”
단악선은 갈염의의 몸 곳곳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당신은 충분히 잘 버텼어요. 그리고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은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러니…….”
말끝을 흐리던 단악선이 더없이 복잡한 눈빛으로 갈염의를 바라봤다.
“좋은 꿈 꾸세요.”
“지금 무슨 짓을!”
흐려지기 시작한 의식을 애써 붙잡으며 갈염의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표정이 나른해졌다.
눈빛 역시 마찬가지.
광기와 살기, 저주로 점철되어 있던 눈빛이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하게 바뀌었다.
“취생몽사(醉生夢死).”
한설화의 말에 초악량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의 방어 기제가 완벽하게 무력화된 갈염의는 이후 단악선이 묻는 말에 잠꼬대를 하듯 순순히 대답했다.
그 모습이 마치 몽유병 환자와 비슷했다.
* * *
다음 날 아침.
바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악선 일행은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단악선의 인사에 바얀이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떠나기 직전 바얀은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다.
“이건 뭔가요?”
“약속의 증표입니다.”
고개를 갸웃한 단악선이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곱게 접힌 이십여 개의 깃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 부족의 깃발입니다.”
이어진 바얀의 설명에 단악선이 환하게 웃었다.
“신성한 초원의 맹약에 따라 그 깃발을 지닌 사람은 항상 우리의 형제로 대할 것입니다.”
“고마워요. 여러분의 마음 잊지 않을게요.”
뜨거운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단악선이 천천히 돌아섰다.
초악량과 한설화가 양옆에 나란히 서자 무위의 무림인들도 저마다 친했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그 뒤를 따랐다.
바얀 일행의 배웅을 받으며 가욕관으로 향하던 도중 단악선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단악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일행은 묵묵히 말을 몰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단악선이 입을 열었다.
“수보라 불리는 자의 정체를 하루빨리 알아내야겠어요.”
갈염의로부터 알아낸 정보들 중 쓸 만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몇 가지 단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바로 수보라는 자가 중원인이라는 점이었다.
갈염의가 그를 만난 건 고작 두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수 특유의 감각은 상대의 특징을 놓치지 않았다.
비록 얼굴은 직접 대면하지 못했으나 어투에 남아 있는 남방 지역의 억양을 읽어 낸 것이다.
‘나이는 대략 서른 중후반.’
그리고 육마존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을 만큼 마교 내에서의 지위가 높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자가 마교의 군사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는 그동안 마교가 배후에서 꾸미고 있던 모든 음모의 주재자가 그라는 의미였다.
문제는 신경 쓰이는 사람이 그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누굴까요?”
“누구 말이냐?”
초악량의 반문에 단악선이 이제껏 간과하고 있던 한 사람을 언급했다.
“혈운사의 총령을 죽였다는 고수요.”
단신으로 걸어 들어와 혈운사의 우두머리를 죽였다는 약관 남짓의 사내.
처음에는 수보라는 자와 동일인이라 생각했는데, 나이대가 맞지 않았다.
물론 짚이는 바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육마존의 제자이거나, 혹은 육마존의 공백을 메울 새로운 후신일 수도 있겠지.”
초악량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바로 그 정도 되는 고수가 아직까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냥 버리는 패로 쓰기에는 혈운사와 흑야벌이 지닌 새외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한설화가 북해빙궁을 찾아오는 걸 대비해 육마존 중 두 명이나 보냈던 마교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육마존 중 한 명만 보냈을 뿐이었다.
만약 마교가 조금 더 전력을 보탰다면 그렇게 쉽게 혈운사가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아한 점은 또 있었다.
어째서 자신을 그토록 집요하게 노렸냐는 질문에 갈염의는 이렇게 대답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마교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시기, 혹은 어떤 특정 인물.’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당장은 전면으로 나설 수 없을 만큼 그들 역시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러기를 잠시.
“그런데 왜 저였을까요?”
“음?”
의아한 표정을 짓던 초악량은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저들의 최우선 목표요.”
자신을 제거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지 않고 새외의 영향력을 장악하는 데 활용했다면 지금쯤 초원은 마교의 지배 아래 놓였을 터.
“넌 아직도 스스로의 가치를 모르고 있구나.”
“가치요?”
“마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일 것 같으냐?”
“글쎄요.”
“바로 중원 무림의 결집이다.”
“아!”
“그런 의미에서 너는 중원의 상징적인 존재다.”
한설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정파와 사파를 모두 아우르는 인물은 당금 강호에 너만이 유일하다.”
오랜 세월 물밑에서 정파와 사파의 갈등을 야기하고 조장해 온 마교 입장에서는 단악선의 존재야말로 가장 큰 위협일 터.
한데 정작 당사자인 단악선은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니.
단악선이 머쓱하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그런가요? 그럼 더더욱 최선을 다해야겠네요.”
초악량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보다 어떻게 더 잘한단 말이냐?”
사무심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
비록 말은 안 했지만 한설화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의견을 같이했다.
“그래도 더 노력해야죠.”
단악선의 눈빛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마교가 제게 이목을 집중하는 만큼 그들도 운신에 제약이 따를 테니까요.”
“두렵지는 않으냐?”
한설화의 물음에 단악선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게다가 암존으로 인해 죽음과 직면하고 나니 새삼 깨닫는 바가 있었다.
흔히 도산검림이라 표현하는 강호무림.
어느새 자신도 이곳에 몸을 던졌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괜찮아요. 이미 각오한 일인걸요.”
“어쩌면 지금보다 더욱 집요하게 너를 노릴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마교 입장에서는 제가 엄청 밉겠죠?”
대답한 사람은 초악량이었다.
“어디 그뿐만이겠느냐? 매번 너로 인해 고배를 마셨으니 손톱 밑의 가시처럼 몹시 불편할 것이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단악선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가 저들을 현혹하는 가장 좋은 미끼일 수도…….”
초악량과 한설화가 정색하며 단악선의 말을 잘랐다.
“절대 불가!”
“생각도 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