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3)
신마의선-33화(33/500)
신마의선 (33)
일 층으로 내려온 한설화는 곧장 객잔 입구와 계단 사이에 위치한 탁자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명검이 홀로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비스듬히 검을 끌어안은 모습이 얼핏 방심하고 있는 듯 보였으나 한설화는 명검 주위에 깔려 있는 은밀한 기감의 그물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찌 주무시지 않고?”
한설화를 발견한 명검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의 나이가 자신과 비슷해 보였기에 적당한 예의만 갖춘 것이다. 낮의 소란으로 아직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한 두 사람이었다.
물끄러미 명검을 바라보던 한설화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한시도 마음에서 검을 놓지 않는구나.”
명검의 눈에 은은한 놀라움이 떠올랐다.
눈앞의 여인이 언급한 말은 화산파 무공의 핵심 가결(歌訣)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무공을 익히는 데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가르침.
오직 구전으로만 전승되어 외부로 유출될 리 없는 요결을 그녀가 어찌 안단 말인가?
‘우연일까?’
당황한 명검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한설화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게 홍림(紅林)의 기풍이지.”
“홍림……이요?”
의아한 얼굴로 반문하던 명검의 모습에 한설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매영홍림(梅影紅林)은 이제 쓰지 않느냐?”
“아!”
명검이 탄성을 흘렸다.
“과거에는 본 파를 그리 표현했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대체 언제 적 표현인지…….”
명검이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분명 비슷한 또래인데 말투가 살짝 불편했던 것이다. 그때 한설화가 명검과 시선을 마주했다.
“내일부터는 우리를 호위할 필요 없다.”
“네?”
“복귀하라는 말이다. 이 정도면 화산도 충분한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뜻밖의 말이었지만 명검은 이내 표정을 수습했다.
“죄송합니다. 이는 제가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일말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는 단호한 태도였다.
“우리가 불편하다면?”
명검이 쓰게 웃었다.
호위 자체가 애초에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
“저는 그저 사문의 명을 좇을 뿐입니다.”
“고집이 센 아이구나.”
“아이……라고 불릴 나이는 지난 듯싶습니다만.”
기분이 상했는지 명검이 묘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어딜 가서도 이런 대접은 받아 본 적 없는 그였다.
그렇다고 대놓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어려 보이나?’
명검이 새삼스럽게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올해 나이 약관으로, 화산파 삼 대 제자 명검이라 합니다.”
“아까 들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소저의 방명과 나이를 여쭈어도 될는지?”
“실례야.”
“예?”
“여자의 나이는 묻는 게 아니다.”
명검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한설화를 보고 있을 때였다. 한설화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를 걷었다.
완전히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
명검은 일순 숨이 멎었다.
형언하기 어려운 그녀의 미모에 넋을 놓아 버린 것이다. 비어 있던 찻잔을 끌어와 차를 채운 한설화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불필요한 호위였다.”
“…….”
“세상 어디에 토끼의 호위를 받는 호랑이가 있단 말이냐.”
“…….”
“듣고 있느냐?”
“네?”
뒤늦게 자신의 추태를 깨달은 명검이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그러나 뒤늦게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곤혹스러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불편했던 그녀의 반말은 더 이상 그 어떤 문제도 되지 않았다. 다만 당금 무림에서 매화검수의 위치를 어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사실대로 말해도 스스로 얼굴에 금칠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인정하면 그것 나름대로 화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셈.
고민하던 명검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들이 토끼로 전락하는 것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평가는 너무 박한 것 같습니다. 당금 무림에서 백대고수를 꼽으라면 매화검수 개개인이 능히 그 안에 이름을 올릴 수 있습니다.”
“매화검수라…….”
그 단어를 나직이 되뇌는 한설화의 모습에 명검은 다시 한 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련한 그녀의 눈빛에 애써 다잡은 마음이 자꾸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눈빛을 예전에도 본 적이 있지.”
“네?”
의아해하는 명검을 빤히 응시하며 한설화가 재차 입을 열었다.
“매화검수의 수장을 매화총검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예전에 그 직책을 맡았던 자가 내게 그랬다. 내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그 허울뿐인 지위와 가식을 모두 던지겠노라고. 도포를 벗고 환속하겠다며 집요하게 매달렸었지.”
“……!”
“지금 네 눈빛이 그와 같구나.”
“그런 말도 안 되는!”
명검이 처음으로 노기를 드러냈다.
성심을 다해 호위하라는 사문의 명이 있어 애써 참아 왔지만 방금 그녀가 한 말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당대의 매화총검인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전대 매화총검일 터.
‘사부님께서는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다.’
여인 때문에 화산을 등지겠다니.
“그와 같은 거짓 오욕으로 사부님의 청명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
“마지막 경고입니다. 화산은 모욕을 참지 않습니다!”
“내 말을 믿지 못하는군?”
이글거리는 명검의 눈을 들여다보던 한설화가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만약 내 말이 사실이라면? 호위를 물리겠느냐?”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책임지면 좋을까?”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명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제 소원 하나를 들어주십시오.”
“그게 어떤 것이라도?”
한설화의 목소리에 살짝 한기가 감돌았다.
“좋다. 그리하마.”
과거에도 몇 번 그런 내기를 건 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빙림의 연못 밑바닥에 얼어붙어 있다.
파렴치한 요구를 내건 자들에게 어울리는 말로였다.
이를 알 리 없는 명검은 순진하게도 소원을 미리 말했다.
“호위를 계속하게 해 주십시오.”
한설화의 눈에 의외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걸로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본래 내기란 공평해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한설화는 눈앞의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좋다. 그럼 내 이야기의 진위는 어떻게 확인할 것이냐?”
“마침 공무차 무림맹 서안 지부에 사부님께서 방문 중이십니다.”
명검이 간단한 서신을 작성해 일행인 매화검수에게 맡겼다.
“이 자리에서 보고 들은 것을 확실히 전달하도록.”
나이를 떠나 매화검수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기강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이에 예를 갖추는 매화검수 역시 절도가 느껴졌다.
서신을 챙겨 매화검수가 떠나자 한설화가 명검에게 앉기를 권했다.
“그럼 우리는 결과를 기다리며 차나 마시자꾸나.”
“그냥 서서 기다리겠습니다.”
“심장 박동이 지나치게 빠른 것 같은데? 좀 쉬어야 하는 것 아니냐?”
“괘, 괜찮습니다.”
“어른의 호의는 사양하는 게 아니야.”
“어른…….”
그 말에 명검은 마음이 심란해졌다.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의 사부와 비슷한 연배. 화산의 도첩에 도명을 올린 이후 이렇게 마음이 어지러운 적이 없었다.
“앉으래도?”
“엇!”
명검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저항할 수 없는 경력이 전신을 휘감나 싶더니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한설화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대체 이건?’
여우에 홀린 것만 같았다.
차마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어 명검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차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맞은편의 여인은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그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것이 더욱 어려웠을 테니까.
* * *
서안의 밤은 화려했다.
특히 기루가 밀집해 있는 홍등가는 불야성이라는 표현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나 빛이 밝으면 어둠도 짙은 법.
달콤한 주향과 교태 가득한 웃음소리 이면에는 수많은 여인의 한숨과 눈물이 서려 있기 마련이다. 술값 때문에 일어난 시비는 애교 수준이었고, 인명 피해를 동반한 유혈 사태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그래서 우이와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우이는 홍등가의 어둠에 기대 살아가는 자였다.
소위 어깨라 부르는, 기루에서 고용한 보표였던 것이다.
한때는 강호에서 이름 높은 표국의 표사였지만, 지금은 이곳 이화루를 지키고 있었다. 표국에서 받는 돈만으로는 여동생의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이의 기본적인 업무는 취객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술값으로 생떼를 쓰거나, 기녀에게 진상을 부리는 손님은 조용한 곳에서 우이와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때마다 그는 가장 원초적이고 효과적인 의사소통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바로 폭력이었다.
하지만 간혹 그의 실력을 뛰어넘는 고수를 상대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냥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상대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얻어터지는 것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업무 중 자신이 죽더라도 막대한 보상금이 동생에게 지급되기로 약조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이는 자신 안의 어둠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이었다.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 받는 돈.
그 돈은 결국 여동생과 비슷한 또래의 여인들이 웃음과 눈물을 팔아 번 돈이다.
그게 점점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오늘도 손님이 없군.’
어둠 속에서 이화루를 주시하던 우이가 한숨을 흘렸다.
최근 들어 더욱 설쳐 대는 무림맹의 무인들 때문에 서안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손님이 부쩍 줄었다.
기녀 대부분이 빚에 팔려 온 이들.
매일같이 빚을 쳐 내지 않으면 이자 때문에 오히려 빚이 늘어난다. 난데없는 불황에 한숨짓고 있을 기녀들을 생각하니 우이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순간.
쿠웅.
“……!”
나른하던 우이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거한 때문이었다.
‘고수!’
십오 년 가까이 무림에 몸담아 온 그였지만 이 정도로 놀라운 경공은 본 적이 없었다.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거물.
우이가 곧장 거한에게 다가갔다.
“이화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범계위가 고개를 돌려 우이를 바라봤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우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줄기줄기 흘러내리는 안광.
그 너머로 꿈틀대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기가 질린 것이다.
“제가 진짜 남자로 태어날 곳이 여기예요?”
갑자기 들려온 어린아이의 음성에 우이는 뒤늦게 거한이 안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거한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단 의원이 경험할 새로운 세계가 바로 저 앞에 있지.”
우이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아이의 나이는 기껏해야 열두어 살 정도? 기루에 출입하기엔 일러도 너무 이른 나이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따로 있었다.
거한에게서 느껴지던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는 것이다.
“안의 손님은 모두 물려라. 오늘 내가 이곳을 통째로 빌릴 것이다.”
“알겠습니다.”
즉각 대답한 우이가 범계위를 대연회장으로 안내했다.
마침 손님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지금은 최대한 상대의 기분을 맞춰 줘야 한다. 사소한 트집이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번지기 전에 최대한 위험을 피해 가는 것이 상책인 것이다.
앞장선 우이가 기루를 관리하는 총관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총관이 조금 떫은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화려하게 치장한 수십 명의 기녀가 술과 요리를 내오기 시작했다.
“오! 여기 물 좋네?”
상석에 앉은 범계위가 단악선을 향해 웃음을 건넸다.
“단 의원이 직접 골라 봐.”
“뭘요?”
“저기 보이는 여인들 중에서 단 의원 눈에 쏙 드는 사람을 고르라고.”
단악선이 도열해 있는 기녀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어?”
단악선이 손을 들어 한 사람을 가리켰다.
“저분이요.”
단악선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린 범계위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