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30)
신마의선-330화(330/500)
신마의선 (330)
“예? 갑자기요?”
난데없는 한설화의 요구에 잠시 당황했지만 소적산은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만 하십시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만 냥에 팔았던 물건을 사 년 만에 되찾으려면 얼마나 필요하지?”
“글쎄요? 으음……. 매입 가격을 기준으로, 이문과 물가의 변동을 감안하면 이만 냥 정도는 줘야 할 겁니다.”
“그럼 이만 냥이 필요하다.”
“알겠습니다.”
소적산이 탁자 밑에서 전표를 꺼내 곧장 한설화에게 건넸다.
돌아서는 한설화를 향해 소적산이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십니까?”
“흑룡강성 합이빈.”
“다행이군요.”
의아해하는 한설화를 향해 소적산이 환하게 웃었다.
“마침 얼마 전 그곳에 신마상단 지부가 생겼습니다. 그쪽 책임자도 이곳에서 근무했던 적이 있고요. 그곳 지부장이 선자님을 알고 있을 테니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한설화가 그대로 신형을 날렸다.
순식간에 작은 점으로 화해 사라지는 한설화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소적산을 향해 누군가가 다가선 것도 그때였다.
곽명이라는 이름을 지닌, 삼십 대 중반의 장한.
뒷골목을 전전하던 파락호 시절부터 소적산과 함께해 온 믿음직한 수하이자, 지금은 상행단을 이끄는 행수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뭐가?”
소적산의 반문에 곽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내비쳤다.
“그래도 이만 냥이나 되는 거금인데 출자금 장부에 사유는 기재해야 할 것 아닙니까? 하다못해 수결(手決)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괜찮아. 저분의 신원이야 확실하게 확인했으니까.”
“예? 어떻게요?”
곽명이 되묻자 소적산이 씨익 웃으며 자신의 코를 가리켰다.
“아무리 정교한 인피면구로 외모를 위장하고 목소리를 꾸며 낸다 한들 사람의 체향까지는 똑같이 만들어 낼 수 없거든.”
곽명이 화들짝 놀랐다.
“미치신 겁니까?”
곽명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황당한 나머지 그만 본심이 튀어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소적산을 향해 곽명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선자님의…… 냄새를 맡았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행여나 어디 가서 그런 소리 마십시오. 개도 아니고 냄새로 사람을 구분하다니……. 변태로 찍히기 딱 좋습니다.”
소적산이 흠칫하더니 이내 얼굴을 붉혔다.
“내가 요즘 단 의원님의 뜻을 본받아 너무 관대해졌구나.”
“네?”
“개? 변태? 몇 대 맞아 보면 내가 누구였는지 다시 깨닫게 될 게다.”
그제야 곽명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아이고! 단주님! 제가 바쁜 일이 있었는데 깜빡했습니다!”
곽명은 재빨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 * *
쏴아아아.
동굴 안을 가득 메운 낙수 소리.
단악선은 새하얀 포말과 함께 눈앞에서 부서지는 거대한 물줄기를 응시했다.
“휴우…….”
폭포를 벗 삼아 동굴 안에 틀어박힌 지 닷새째.
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잡힐 듯하면서도 좀처럼 잡히지 않는 그 무언가.
그래서 더욱 애가 탔다.
생사의 기로를 경험한 뒤 느껴지기 시작한 벽.
처음에는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한계를 지금은 의식으로나마 제대로 인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하루빨리 그 벽을 부수고 높은 경지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얻을 것처럼 느껴지던 깨달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요원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럴수록 마음만 다급해졌다.
무언가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지금의 조바심이 오히려 족쇄가 되는지도…….’
문제는 단악선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단악선이 고개를 숙여 온몸에 새겨진 흉터를 눈에 담았다.
암존을 상대하며 입었던 부상의 흔적들이었다.
그때를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보이지 않는 바위를 올려놓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누군가를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돼.’
실력이 부족한 만큼 그 위험은 고스란히 다른 이들의 몫이 될 터.
장곡의 경우처럼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상황은 두 번 다시 없어야 했다.
신마곡에 돌아온 이후 폐관 수련을 반복하는 진짜 이유였다.
특히나 앞으로 어떤 적을 조우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만큼 지금보다 훨씬 압도적인 무위가 필요했다.
그것만이 자신을 지키고, 나아가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앞의 폭포 너머로 드리운 석양을 발견한 단악선이 깜짝 놀랐다.
하염없이 넋을 놓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애써 마음을 다잡은 단악선이 다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동시에 위화신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낙숫물이 댓돌을 뚫듯 안 된다면 계속 반복해 노력하면 그만이었다.
그것이 부모님께 배운 가르침이었고, 그간의 삶을 통해 얻은 믿음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악선은 이내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상태에 접어들 수 있었다.
하나로 집중된 의식 너머 찾아온 지극한 고요.
그렇게 삼매(三昧) 속을 거닐던 도중 변화가 찾아왔다.
잠시나마 모든 제약을 벗어나 완벽하게 자유로운 무념무상의 상태에 접어들자 단악선의 전신에서 상서로운 서기가 안개처럼 뭉클거리며 쏟아졌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자욱한 운무처럼 단악선을 에워싼 채 일렁이던 서기가 눈에 띄게 짙어졌다.
그리고 점차 정수리 근처에서 엉기더니 하나의 형태를 갖춰 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삼화취정(三花聚頂)이라 불리는 경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내원으로 향한 삼양(三陽)의 기운이 혼원을 거쳐 완성된 형태.
그 정화가 이처럼 빛나는 꽃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꽃의 모습이 크게 출렁인다 싶더니, 그대로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종국에는 형체를 잃고 자욱한 운무로 흩어졌다.
단악선이 천천히 눈을 뜬 것도 그때였다.
“아…….”
단악선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한숨에는 감출 수 없는 진한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매번 겪는 좌절이었지만 그래도 늘 안타까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도가에 뿌리를 둔 수련 과정 중 현재 자신이 머물러 있는 단계는 연기화신(練氣化神)의 초입 정도.
선천지기를 수련해 기를 축적하는 연정화기(練精化氣)의 단계를 넘어 최근에야 겨우 연기화신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가부좌를 풀고 신형을 일으키던 단악선이 한 차례 휘청였다.
전신이 나른하고 무거웠다.
그러고 보니 밖은 이미 어두워진 상태였다.
‘자기 전에 한 번만 더 시도해 보자.’
우선은 그 전에 배를 채우는 게 먼저였다.
종일 운공 삼매경에 빠져 있던 터라 몸을 움직이기 무섭게 극심한 허기가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이 순간의 허기가 단순한 육체적 배고픔이 아닌 다른 의미의 허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만큼 단악선은 지금보다 강해질 방법을 갈망하고 있었다.
심지어 꿈에서도 무공을 수련할 정도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벽곡단이 담겨 있는 항아리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던 그때.
“……?”
단악선의 시선이 폭포 쪽으로 향했다.
폭포 너머에서 느껴지는 불안정한 기운 때문이었다.
초악량이나 한설화는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단악선이 걸음을 돌려 폭포 밖으로 나섰다.
어차피 이대로는 폭포 너머의 존재가 마음에 걸려 온전히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곳 신마곡의 위치는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고, 이는 곧 방문자가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역시나.
폭포를 돌아 나오니 반가운 얼굴과 마주할 수 있었다.
“풍 아저씨!”
오랜만에 만나는 풍진성을 향해 반갑게 다가서던 단악선이 멈칫했다.
자신을 보는 풍진성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곡주님. 부득이하게 폐관 수련을 방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풍진성이 심각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문제요?”
“황씨 부인의 해산을 돕던 산파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이어진 풍진성의 말에 단악선의 얼굴이 굳어졌다.
“양수가 터진 지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아이가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요?”
“배 속의 아이가 거꾸로 돌지 않아 분만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더군요.”
단악선이 한숨을 터트렸다.
신마의가에는 뛰어난 의원들이 많았지만 분만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분만은 대부분 산파의 전문 영역.
그런데 그 산파가 연락을 해 왔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나쁘다는 의미였다.
무엇보다 분만에 실패하면 배 속의 아이뿐만 아니라 산모의 목숨도 위험해진다.
“알겠어요. 어디로 가면 되죠?”
“저자 동쪽에 붉은 담을 올린 두 번째 집입니다.”
단악선이 깜짝 놀랐다.
“네? 거긴 장곡 아저씨 댁인데요?”
“아! 황씨 부인의 남편이 그 사람 맞습니다. 곡주님과 함께 혈운사 토벌에 참여했던…….”
풍진성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단악선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황하기도 잠시.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초악량을 향해 서둘러 인사를 건넨 풍진성이 황급히 말에 올랐다.
“아니. 함께 가지.”
그 말과 동시에 초악량이 풍진성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신형을 날렸다.
풍진성은 순식간에 눈앞을 지나쳐 멀어지는 주변의 경물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이를 악물어 신음을 참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초악량의 표정이 더없이 어둡고 심각했기 때문이다.
‘진기의 흐름이 몹시 불안정했어.’
찰나였지만 그의 기감에 포착된 단악선은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내공이 깊어지고 무공이 높아질수록 무엇보다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심마였다.
육체와 정신의 괴리.
점차 강해지는 내공을 정신이 온전히 지탱해 주지 못한다면 그 사이의 어그러진 균형은 파탄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초악량은 단악선의 마음에 드리운 그늘을 일찍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의원으로서의 삶과 무림인으로서 부득이하게 마주해야 하는 죽음이라는 숙명.
이율배반적이고 모순되는 상황 앞에서 더없이 괴로웠을 단악선을 떠올리니 초악량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않은 이유는 오직 하나.
이마저도 오롯이 극복해야만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심득(心得)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도를 도라고 알려 주면 이미 도가 아니게 되어 버리는 것처럼, 구체적인 설명으로 얻을 수 있는 경지는 오히려 얻지 않느니만 못했다.
관념적으로 스스로 한계를 그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서는 진정한 깨달음의 요체(要諦)를 얻을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당장은 주화입마가 오지 않더라도 가까운 곳에서 단악선을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쓸데없는 기우에 그치더라도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