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41)
신마의선-341화(341/500)
신마의선 (341)
사실 황제는 현재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근래 들어 이처럼 민망한 적도 드물었다.
황제의 권위를 각인시키기는커녕 간신에게 놀아나는 추태를 보인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육부의 한자리를 책임지고 있던 상서가 어린 소년 하나 감당하지 못해 실각을 자초한 것도 심히 못마땅했다.
그야말로 어전 회의 자체가 우스운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불쾌함을 애써 삭이며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네가 세운 공로를 포상할 차례로구나.”
황제의 시선이 단악선에게 고정되었다.
“원하는 것을 말하라.”
“으음…….”
잠시 진지하게 고민한 뒤 단악선이 배시시 웃었다.
“제가 폐하를 진맥해 봐도 될까요?”
“짐을?”
“아무래도 폐하가 걱정돼서요.”
이어진 단악선의 말에 황제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아무리 폐하라도 이런 일을 오래 겪었다면 심력이 크게 소모되셨을 테니까요.”
보수 진영의 대신들 중 한 명이 그런 단악선을 꾸짖었다.
“무엄하도다! 고작 일개 백성에 불과한 자가 어찌 감히 성상의 옥체에 손을 댄단 말이더냐!”
하지만 그는 이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지그시 자신을 쏘아보는 황제의 서늘한 눈빛 때문이었다.
호부 상서를 앞세워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했던 저들의 입장을 황제 역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진맥은 따로 받도록 하지.”
그렇게 완곡하게 거절한 황제가 누그러진 눈빛으로 단악선을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겠다. 원하는 것을 말해 보아라.”
곤란한 듯 뺨을 긁적이던 단악선이 이내 무언가를 떠올리며 반색했다.
“그럼 능 아저씨를 잘 부탁드려요.”
황제가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능 지주는 짐이 눈여겨보고 있노라.”
“그래도 능 아저씨를 데려가진 말아 주세요.”
“원하는 바가…… 그것이란 말이냐?”
황제의 반문에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능 아저씨가 능력을 인정받고 출세하는 건 좋지만, 무위의 백성들은 그분이 필요하거든요. 저 역시 능 아저씨와 계속 함께 지내고 싶고요.”
말을 마친 단악선이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런 건 부탁하면 안 되나요?”
황제가 피식 실소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또래의 아이다운 모습이었다.
방금 전 눈앞에서 호부 상서를 몰아세우던 그 소년이 맞나 싶을 정도.
잠시 생각을 정리한 황제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염두에 두지.”
그러곤 대신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더 논의할 사안이 있나?”
“…….”
“…….”
침묵으로 일관하는 대신들의 모습에 황제가 못마땅한 듯 한 차례 혀를 찼다.
신진, 보수 할 것 없이 대신들은 하나같이 혹시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튈까 싶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저 한시바삐 가시방석 같은 이곳을 뜨고 싶어 할 뿐.
“그럼 금일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성은이 망극…….”
“되었다.”
신하들이 갖추는 예도 받지 않은 채 황제가 어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짐을 따르도록.”
그렇게 어전 회의를 마친 황제가 단악선과 한설화를 데려간 곳은 자금성 안쪽 깊이 위치해 있는 내전이었다.
곤녕궁(坤寧宮) 북쪽에 위치한 어화원(御花園)을 지나자 서쪽에 자리 잡은 여섯 개의 전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는 곧장 황태후가 거처로 사용하는 장락궁(長樂宮)으로 향했다.
황제가 호위들과 먼저 전각 안으로 사라지자 한참 거리를 두고 따라 걷던 단악선과 한설화도 장락궁 안으로 들어섰다.
“와!”
내부에 자리 잡은 거대한 팔선탁(八仙桌).
그 위에 가득 펼쳐져 있는 온갖 산해진미의 향연에 단악선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음식이 전부 모여 있는 것만 같았다.
팔선탁 중앙의 상석을 차지한 황제.
그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중년의 미부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것도 그때였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다소 후덕한 풍채를 지닌 그녀였지만 서글서글한 눈매와 오뚝한 콧날, 더불어 여전히 고운 얼굴엔 젊은 시절의 미태가 남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고고(姑姑).”
온화한 눈빛과 푸근한 인상.
황제의 모친인 황태후, 흥왕태비 장씨가 한설화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약 없는 만남을 뒤로한 채 헤어진 것이 벌써 칠 년. 덧없이 흐르는 세월만 속절없다 여겼는데, 결국 이리 만나는군요.”
친근하면서도 다정한 미소는 둘째 치고, 집안의 높은 어른을 대하듯 자연스럽게 건넨 고고라는 호칭까지.
그 극진한 태도에 한설화도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단악선이 뒤늦게 황태후를 향해 예를 갖췄다.
“무위의 단가 악선이 황태후 마마를 뵙습니다.”
황태후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 많았다.”
단악선의 눈 위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비록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호의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이미 황극전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
단악선은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윤흠이라 자신을 소개했던 동창 소속의 환관.
금룡상단과 호부 상서가 비밀리에 주고받은 약정서를 자신에게 건넸던 그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자신을 보낸 사람은 황태후라 했었지?’
게다가 황제는 자신이 증좌로 제출한 문서의 존재를 모르는 눈치였다.
이는 황태후가 동창에 지닌 영향력이 결코 적지 않다는 의미.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단악선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마마의 도움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황태후가 기특하다는 듯 단악선을 응시했다.
“듣던 것만큼 총명한 아이로구나.”
그녀가 권한 자리에 두 사람이 착석하자 황태후가 부러운 듯 한설화를 응시했다.
“어쩜 이리 변함없이 이렇게 아름다우세요?”
“그대도 여전하다.”
한설화의 대답에 황태후가 깜짝 놀랐다.
“정말 말을 할 수 있으시군요!”
앞서 윤흠에게 보고를 듣긴 했지만 직접 확인하니 또 놀라웠다.
그 모습에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 앞에서는 일부러 벙어리인 척했던 것인가?”
황제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자신을 우롱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귀찮아서.”
한설화의 대답에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제 손님이세요, 황상.”
부드러운 음성이 실내에 울려 퍼졌다.
황태후였다.
“제가 그토록 고대하던 날입니다. 그러니 부디 이 어미의 심정을 헤아려 주세요.”
황태후와 시선을 마주한 황제가 멈칫했다.
그러기를 잠시.
나직이 한숨을 흘린 황제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거리낄 게 없는 그였지만 단 한 사람, 황태후만은 예외였다.
자신을 향한 그녀의 끝없는 헌신과 희생을 아는 까닭이다.
또한 지금의 황제 위치를 공고하게 만들어 준 것 역시 그녀였다.
제위 초기.
선대 황제의 갑작스런 붕어로 인해 제위에 오른 황제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달리 제왕학을 공부하지 않았기에 신하들을 다루는 것도 미숙했고, 선대 황제 아래서 공고한 지위를 누리던 대신들의 권력 또한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선대 황제와 함께 북방을 오가며 수많은 경험을 쌓은 노련한 대신들은 열다섯 살에 불과한 어린 황제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온갖 권모술수에 능할뿐더러, 닳고 닳은 그들의 처세술은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렇게 그저 이름뿐인 황제로 전락하기 직전.
돌연 황실의 의례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바로 대례지의(大禮之議)다.
당시 권력의 중심이었던 내각대학사 양정화.
그를 비롯한 조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관료들은 황제가 선대 황제의 사촌인 만큼 정통성을 잇기 위해서라도 전 전대 황제였던 홍치제의 양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의 권력은 정통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하나 여기에는 꼼수가 숨어 있었다.
만약 그리되면 황제의 진짜 부친은 황숙부(皇叔父)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이 황제의 부모에게 황고(皇考)와 황태후 지위를 부여하지 않으려 한 이유는 간단했다.
황실의 웃어른인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황제가 적통을 잇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황제를 지지하는 신진 관료들은 크게 반대했다.
두 관료 세력의 대립으로 조정은 두 쪽으로 갈라졌다.
실제로 이 문제는 단순한 칭호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의 황제가 적장자의 혈통으로 황제의 위를 차지한 것인지, 아니면 방계의 혈통으로 황위에 오른 것인지에 대한 문제였기에 유교가 사회의 주요 이념이었던 조정 대신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황제는 양정화의 의견에 맞서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오히려 홍치제를 황백부로, 친부인 흥헌왕을 황고라는 칭호를 붙일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황제의 의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당시 두각을 드러내던 뛰어난 학자들로 인해서였다.
그들은 황제가 마음에도 없는 아버지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유교 원리와 인간의 심성을 거스르는 일이라 주장했다.
그 여론을 주도한 사람이 당시 한림원(翰林院) 소속이었던 호부 상서 양소였다.
황제 역시 ‘가문은 계승하지만 적통은 계승하지 않겠다.’라고 뜻을 꺾지 않았다.
결국 최종적으로 황제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부친인 흥헌왕을 예종 헌황제로 추존하였고, 선대 황제였던 정덕제보다도 그 격을 높여 대접하였다.
그리고 이는 황제파 관료들의 발언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대로 양정화를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은 사퇴를 강요당했다.
양정화를 따르던 신료들이 대거 숙청된 이후 비로소 황제는 오롯이 권력을 거머쥘 수 있게 되었다.
그만의 권위적인 통치 방식.
그 초석을 제대로 다지게 된 것이다.
철혈의 군주인 그라 할지라도 모친인 황태후에게만큼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암암리에 여론을 움직여 대례지의를 촉발한 것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반면 이와 같은 사정을 알 리 없는 단악선은 내심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만큼 지금껏 보여 준 황제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모친이라 해도 황제의 지위와 권력이 더욱 높은 법.
하지만 누가 봐도 두 사람의 관계에서는 황제가 황태후에게 상당 부분을 양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는 자신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뒤쪽에는 그를 호위하기 위한 어림친위도 동석해 있었고, 수발을 들기 위한 내관과 궁녀들도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가는 법.
아무리 입단속을 한다 한들 이 안의 일이 소문으로 돌지 말란 법이 없었다.
그런 단악선의 표정을 눈치챈 듯 황태후가 슬쩍 웃더니, 어색한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저들은 눈이 있어도 볼 수가 없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으니까.”
언제나 지근거리에서 황제를 수행하기에 기밀을 엄수하는 자세가 삶의 방식이 된 지 오래였다.
황태후가 고개를 돌려 한설화와 시선을 마주했다.
“보내 주신 조화건잠은 잘 받았습니다.”
그러곤 의미심장한 미소를 건넸다.
“대체 언제 사용하시려나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이어진 그녀의 말에 한설화의 눈 위로 잠시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덕분에 동창의 아이들이 제법 발품을 팔았지요.”
그제서야 한설화는 조화건잠을 구입했던 이들이 왜 번번이 환불을 요구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일찍부터 황태후는 조화건잠의 위치를 파악해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렇다 할 내색도 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고 인내한 것이다.
그 성의가 한설화는 내심 기꺼웠다.
“이제 우리 사이의 빚을 청산할 때가 온 것 같군요.”
그렇게 운을 뗀 황태후가 품속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 한설화에게 내밀었다.
낡고 바래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종이.
그 위에는 수심파랑활(水深波浪闊), 무사교룡득(無使蛟龍得)이라는 열 글자가 적혀 있었다.
강호의 풍파가 깊고 넓으니, 교룡에게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의미였다.
“헤어지기 전 제게 건네셨던 서신을 이제 돌려 드립니다.”
감회 어린 표정으로 말없이 시구를 들여다보던 한설화를 향해 황태후가 말했다.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