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42)
신마의선-342화(342/500)
신마의선 (342)
그 말에 먼저 반응한 사람은 황제였다.
“이미 앞서 같은 내용을 물었으나 그녀는 원하는 바가 없다 하였습니다.”
황제의 말에 황태후가 묘한 미소로 응수했다.
“그건 조화건잠이 황상의 것이 아니라, 본디 이 어미의 물건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황태후의 시선이 다시 한설화를 향했다.
“부디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세요. 황상께서는 워낙 효심이 깊어 제 부탁도 잘 들어주는 편이니까요.”
“…….”
좀처럼 달리 떠오른 게 없어 한설화가 고심하는 사이.
황태후는 채근하지 않고 조용히 미소 지으며 그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황태후가 황제를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제가 너무 들뜬 나머지 눈치 없이 굴었군요. 정사를 돌보기에도 빠듯하실 황상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어요.”
“금일은 정무를 마쳤으니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오매불망 황상을 기다리고 있을 황후와 비빈들에게도 시간을 내어 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완곡하고 세련된 축객령에 황제가 픽 웃었다.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황제를 따라 황태후도 신형을 일으켰다.
“저는 황상을 배웅하고 오겠습니다. 여기 음식들은 고고를 위해 준비한 것이니 마음껏 즐기시며 천천히 결정하세요.”
황제를 따라 밖으로 나선 황태후가 잠시 나란히 걸었다.
그렇게 장락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자 황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과례는 비례라 하였습니다.”
내심 한설화의 태도가 내내 못마땅했던 황제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황실의 어른이신 당신께서 일개 백성 앞에 이처럼 스스로를 낮추시는 걸 지켜보는 게 영 불편하군요. 나아가 이는 황실의 위엄에도 적지 않은 누가 될 것입니다.”
“그리 보였던가요?”
황태후가 황제를 향해 더없이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을 텐데요.”
“…….”
“그분이 아니었다면 지금 황상께서 차지하고 계신 옥좌의 주인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겝니다.”
차마 이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는지 황제가 침음했다.
그런 그를 향해 황태후가 질문을 던졌다.
“이 어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누구보다 저를 깊이 이해하는 황상이시니, 그게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몽이백이수(夢李白二首)입니다.”
두보가 자신의 둘도 없는 지음(知音)이었던 이백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향한 그리움을 드러낸 시였다.
칠 년 전.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 몰아치는 눈보라를 온몸으로 막아 내며 그녀가 읊조렸던 노래도, 두 사람과 헤어지며 한설화가 건넸던 시구 역시 모두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그 시의 마지막 부분도 기억하시겠군요?”
“천추만세명(千秋萬歲名), 적막신후사(寂寞身後事)입니다.”
의외로 선선히 대답하는 황제를 향해 황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입니다. 아무리 천추만세에 이름을 남긴다 해도 죽은 후에 남는 건 그저 적막뿐이죠. 그것이 세상 사는 사람의 이치, 황상께서도 사람인 이상 이를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당시의 추적자들.
하나같이 전장을 떠돌며 사신으로 군림하던 그들이 단 일수에 그대로 쓸려 나가던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그녀였다.
비록 무공은 익히지 않았지만 그녀는 본디 현명한 사람.
자신이 거느린 동창 위사들의 경지를 통해 막연하게나마 한설화의 무위를 가늠할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죽음.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 한설화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니 황상.”
이어진 황태후의 말에 황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옥체를 보전하시려거든 부디 사람 보는 안목을 더욱 기르세요.”
“…….”
“황상의 죽음으로 인해 천하가 혼란과 도탄에 빠지는 것을 이 어미는 원치 않습니다.”
비록 음성은 온화했으나 그것이 엄중한 충고의 의미라는 것을 모를 만큼 황제는 어리석지 않았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조언이었다.
“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어요?”
평소 그녀가 지닌 지혜와 혜안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황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멀어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말없이 응시하던 황태후는 황제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장인태감.”
그녀가 입을 열기 무섭게 한 사람이 화원 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찾으셨사옵니까, 마마.”
황태후를 향해 손을 모으고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는 사내.
십만에 육박하는 환관들의 정점에 선 사례감(司禮監)의 우두머리인 장인태감이 바로 그였다.
제아무리 위세를 떨치는 동창의 우두머리인 병필태감조차도 그가 지닌 권위에는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스물네 개의 아문을 비롯한 모든 환관을 총괄 감독할 뿐만 아니라, 황제의 일정 관리와 관련 문서들을 취급하는 기구가 바로 사례감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외교에도 직접 관여하기에 환관 정치의 중추라 할 수 있었다.
“그대가 보기에도 내가 과하다 생각하나?”
황태후의 물음에 장인태감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사옵니다. 마마께서는 현명하게 대처하고 계시옵니다.”
“황상께서는 달리 생각하시는 것 같네만.”
“무림에는 이런 말이 있사옵니다.”
“……?”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될 역신(疫神) 셋이 있으니, 바로 혈수존자와 망산초자, 그리고 빙옥선자라. 그들을 가까이해서는 아니 되나 결코 적으로 삼아서도 아니 되옵니다.”
“하나 그 단악선이라는 소년은 그 셋 모두와 함께 지낸다 하지 않았나?”
황태후의 반문에 장인태감이 곤혹스러운 눈빛을 흘렸다.
“외람되오나 그것이야말로 강호의 풀리지 않는 문제 가운데 가장 손꼽히는 난제이옵니다. 소관 역시 아직까지 정확한 연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나이다.”
“그런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황태후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만약 저들이 황실을 적대한다면……. 격멸(擊滅)이 가능하리라 생각하나?”
그 안에 숨은 의미를 눈치 빠르게 파악한 장인태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옵니다. 다만 동창을 비롯한 황실의 정예를 모두 갈아 넣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하책 중의 하책.
“때론 드러내지 않은 칼이 더욱 두려운 법.”
나직이 한숨을 흘린 황태후가 장인태감에게 말했다.
“창공(廠公)에게 지시해 당분간 느슨한 경계를 유지하도록. 행여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창공은 장인태감 다음가는 환관 무리의 이인자로, 동창을 지휘하는 제독태감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었다.
“더 지시하실 것은 없는지요?”
황태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인태감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럼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그렇게 장인태감을 물린 황태후는 다시금 장락궁으로 걸음을 돌렸다.
“아직 떠오르시는 게 없나 봅니다?”
한 잔의 차를 홀짝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한설화에게 미소를 건넨 황태후가 단악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듣자니 밖에서는 신의로 불린다지?”
“아버지께서 그리 불리셨어요. 아직 제가 그런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에요.”
“아! 내가 착각을……. 신마의선이라 했던가?”
“어쩌다 보니 그런 과분한 명호를 얻게 되었네요.”
머쓱하게 웃는 단악선의 모습에 황태후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혹시 내 딸아이를 한번 살펴봐 줄 수 있을까?”
“어디 불편하신 곳이 있나요?”
“큰 문제는 아니고, 최근 들어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여서. 원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아이라…….”
“황실 어의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들었는데요.”
“그들에게 맡기면 만에 하나라도 병이 있을 경우 황상이나 다른 이들의 귀에도 들어갈 것 아닌가? 그 아이가 이를 원치 않을 것 같아 이렇게 따로 부탁하는 것이란다.”
“그런가요? 알았어요.”
“고맙구나.”
황태후가 가까이 다가와 단악선의 손을 감싸 쥐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단악선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것도 그때였다.
떨어져 있을 때는 몰랐지만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황태후의 짙은 화장 아래 드리워진 눈 밑의 검은 그림자가 확연히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두 눈에 자리 잡은 황달 역시 마찬가지.
미소로 감추고 있어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징후가 심상치가 않았다.
“잠시 실례할게요.”
다짜고짜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는 단악선의 모습에 황태후가 흠칫했다.
그녀를 호위하던 금의위의 무사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
서둘러 검파에 손을 올리는 그들을 향해 황태후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부를 때까지 모두 밖에서 대기하도록.”
“하오나 마마…….”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할 셈인가?”
여전히 온화한 음성이었으나 그녀의 눈빛만큼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어전 회의에서 뿌려 대던 황제의 삼엄한 눈빛.
그것이 누구로부터 물려받은 것인지 단악선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어림친위와 내관, 궁녀들이 모두 밖으로 사라지자 황태후는 그제야 단악선을 바라봤다.
그러곤 심각한 표정을 짓는 단악선을 향해 조용히 웃었다.
“썩 좋지 않나 보구나?”
“…….”
“걱정할 것 없다. 일찌감치 알고 있었으니까. 네 말대로 황궁 어의들도 제법 실력이 뛰어나단다.”
한설화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어디가 안 좋은 것이냐?”
단악선이 한숨을 터트렸다.
몇 번인가 이와 비슷한 사례를 접한 적이 있었다.
하나 이번만큼은 손을 쓸 수 없었다.
이미 상세가 너무 깊어 돌이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약을 이용해 최대한 죽음을 늦추는 방법뿐.
단악선이 안타까운 눈빛을 흘렸다.
“이 정도면 잠도 이루지 못하셨을 텐데…….”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는 황태후의 모습이 실로 대단해 보였다.
“어의들은 일 년을 내다보던데, 우리 어린 의원님이 보기에는 어떠신가?”
“제가 약을 처방해 드릴 수 있어요. 꾸준히 복용하신다면 오 년까지 바라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단악선이 말끝을 흐렸다.
이게 과연 최선의 방법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연명은 환자에게 더욱 가혹한 처사가 될 수도 있었다.
죽음을 늦춘다 한들 고통과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태후의 표정은 크게 밝아졌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이지 바랄 게 없겠구나.”
황태후가 단악선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그러면 혹시 날씬해지는 약도 처방해 줄 수 있을까?”
“예?”
“갈수록 옷이 끼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 약이 없는 건 아니지만 권하고 싶지 않아요.”
“왜지?”
“몸이 붓는 건 지병 때문이니까요.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이 커요.”
“그래? 그렇다니 어쩔 수 없군.”
포옥 한숨을 내쉰 황태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생글거렸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네?”
“죄책감을 덜었거든.”
의아해하는 단악선을 향해 황태후가 겸연쩍은 미소를 건넸다.
“지금껏 내가 게을러 살이 찌는 줄 알았지 뭐냐. 어쩐지 아무리 끼니를 걸러도 계속 옷이 작아지더라니……. 살이 찌는 게 아니라 부은 거였어.”
단악선은 새삼 황태후가 대단해 보였다.
이렇게까지 긍정적이고 유쾌한 성격이었을 줄이야.
지금껏 수많은 환자를 봐 왔지만 자신의 죽음마저 담담히 관조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정말 괜찮은 것이냐?”
한설화의 물음에 황태후는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칠 년 전 그날 죽었어야 할 몸인걸요. 그래도 덕분에 이만큼 살았고, 황상께서 치세를 펼칠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 당장 죽어도 여한은 없어요. 그러니 고고께서도 늦기 전에 원하시는 걸 말씀하세요. 저 떠나고 나서 후회하지 마시고요.”
한설화의 애잔한 눈빛을 뒤로한 황태후가 단악선을 향해 진지하게 부탁했다.
“외부에 내 병이 알려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이를 알면 황상께서 몹시 마음이 어지러울 테니까.”
“그렇게 할게요.”
단악선의 대답에 황태후가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이제 영순(永淳)을 보러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