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50)
신마의선-350화(350/500)
신마의선 (350)
창틈으로 넘어 들어온 햇살이 실내의 어둠을 걷어 내자 벽화령이 천천히 눈을 떴다.
깊은 삼매를 벗어난 그녀의 눈빛 위로 짙은 정광이 자리 잡았다.
한 차례 가볍게 몸을 움직여 현재 상태를 점검한 벽화령이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신마곡 안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혹시 모를 외부로부터의 방해를 차단하기 위해 절진으로 입구까지 닫아걸고 수련에 몰두한 지 한 달째.
그 여느 때보다 빠르게 일취월장하는 무공 실력에 스스로가 놀랄 정도였다.
가부좌를 풀며 천천히 일어난 벽화령이 모옥 문을 나섰다.
자신의 처소와 가까운 곳에 나란히 위치한 모옥.
그쪽을 바라본 그녀가 빙긋 미소 지었다.
처마 위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범계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벽화령이 다가서자 인기척을 느낀 범계위가 번쩍 눈을 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가가, 왜 또 그러고 계세요.”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벽화령이 손을 뻗어 범계위의 뺨을 어루만졌다.
“오늘도 변함없이 멋지세요.”
범계위가 히죽 웃었다.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눈살을 찌푸리며 한 소리씩 해 댔겠지만 상관없었다.
오롯이 수련에 집중하기 위해 이 기간 동안은 각방을 써 온 두 사람이었다.
서로를 향한 눈빛에 더욱 애틋한 감정이 담뿍 담겨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
“그럼 더 멋진 모습을 보여 줘야겠군.”
쿵.
처마에서 내려온 범계위가 벽화령의 손을 잡아 연무장으로 이끌었다.
“그럼 오늘 일과를 시작해 볼까?”
“얼마든지요.”
고개를 끄덕인 벽화령이 범계위와 마주 섰다.
스릉.
그녀의 손을 따라 나신을 드러낸 검이 범계위를 가리켰다.
검을 타고 흐르는 예기가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것을 깨달은 범계위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이제는 제법 고수의 풍모가 느껴지는 벽화령의 모습은 괄목상대 그 자체였다.
“선공은 양보할게.”
범계위의 말에 벽화령이 화사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역시 우리 가가. 어쩜 이리 다정하고 자상하신지.”
벽화령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정감이 담뿍 묻어났다.
하나 그녀의 검은 그렇지 않았다.
희끗한 잔영이 눈앞에서 번뜩이나 싶더니, 그대로 눈앞의 공간이 갈라졌다.
그 갈라진 틈을 새파란 검영이 가득 메웠다.
이에 대응해 범계위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연달아 주먹을 내질렀다.
콰콰콰콰쾅!
대기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주변 경물이 일그러졌다.
가공할 위력을 담은 권풍에 주변의 공기가 급격히 빠져나가며 빚어진 현상이었다.
펄럭.
벽화령의 머리카락과 옷이 태풍을 만난 것처럼 나부꼈다.
그러나 벽화령은 지독한 열기를 동반한 압력을 끊어 내며 오히려 성큼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 들린 협봉검이 기이한 움직임을 그려 냈다.
“오!”
범계위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지독한 압력을 거슬러 오르며 영활하게 움직이는 검.
절묘하게 빈틈을 노리며 파고드는 궤적은 그 자체로도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시기적절한 대응과 반격은 범계위조차 놀랄 만큼 현묘한 무리를 검 끝에 녹여 내고 있었다.
연달아 폭뢰가 터지는 듯한 충격음과 연달아 허공을 찢은 벼락같은 섬광이 삽시간에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매일같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두 사람의 비무.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벽화령을 응시하던 초악량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제는 검기가 의지를 온전히 담아내는 단계에 접어들었군.”
의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진기가 일어나는 심의운기(心意運氣)의 경지.
무공에 뜻을 둔 이들 가운데 하늘의 선택을 받은 극소수만이 도달하는 신위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뚫어져라 두 사람을 응시하던 초악량이 미간을 찡그렸다.
초악량이 신형을 날린 것도 동시였다.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든 초악량이 벼락처럼 손을 휘둘렀다.
따다다다당!
순식간에 허공을 수놓은 어지러운 수영과 함께 날카로운 소성이 터져 나왔다.
카가가각.
잘게 찢어지고 와해된 검기와 경력이 거칠게 주변을 긁어 댔다.
“그만! 여기까지!”
초악량의 단호한 외침에 범계위가 눈살을 찌푸렸다.
한창 흥이 오르던 와중에 초악량이 갑자기 난입해 흐름을 끊어 버린 것이다.
“왜 방해하고 난리유?”
“방해?”
초악량이 차가운 웃음을 말아 올리며 벽화령 쪽을 가리켰다.
“왜? 이참에 마누라 보내 버리고 새장가 들게?”
고개를 갸웃하던 범계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해쓱해졌다.
밀랍처럼 창백해진 벽화령의 안색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내 여자! 괜찮아?”
방금 전까지의 흉포하던 기세는 어디 가고 공처가처럼 쩔쩔매는 범계위의 모습에 초악량이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다.
욱신거리는 손목을 매만지며 눈살을 찌푸리던 초악량을 향해 한 사람이 다가선 것도 그때였다.
사무심이었다.
“한 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정중히 예를 갖춰 묻고 있었지만 두 눈만큼은 타오르는 호승심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초악량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와.”
“그럼 사양 않고…….”
팟.
사무심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이 장의 거리를 한순간에 지워 버린 초절한 신법에 멀찍이 서서 지켜보던 능소밀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미 그 순간에 사무심은 초악량과 어지럽게 손을 섞고 있었다.
그사이 호흡을 가다듬고 안정을 되찾은 벽화령도 한설화에게 비무를 요청했다.
“언니, 부탁드려요.”
벽화령의 상태를 가늠하던 한설화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상대를 달리해 연속적으로 비무를 이어 가는 일행들.
그 모습에 능소밀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느끼는 거지만 무공에 미친 사람들은 이따금 섬뜩할 때가 있었다.
소름 끼치는 음성이 귓전을 파고든 것도 그때였다.
“넌 왜 노냐?”
“예?”
무심코 고개를 돌린 능소밀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입맛을 다시고 있는 범계위와 시선이 딱 마주쳤기 때문이다.
“이리 와.”
범계위의 손짓에 능소밀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응, 내가 봐도 괜찮아 보여.”
“아니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사양할 필요 없다니까?”
“당연히 거부권은 없겠지요?”
“억울하면 강해지든가.”
결국 능소밀도 울상을 지으며 범계위와 비무를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식사들 하세요!”
단악선의 외침으로 반 시진에 걸친 자유 대련이 끝났다.
초주검이 된 능소밀과 기진맥진한 사무심, 신마삼존의 높은 벽을 다시 한 번 절감한 벽화령이 지친 표정으로 식탁에 자리했다.
세 사람의 입에서 각기 다른 탄식이 새어 나온 것도 동시였다.
자신들 앞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각종 약재들.
가뜩이나 입맛도 까끌까끌한 와중에 눈앞의 쓰고 떫은 약초들을 씹어 삼키려니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반면 초악량을 위시한 한설화와 범계위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약초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의원에 뜻을 두고 있던 주장명 역시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 그들과 다르게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세 사람의 약초를 보며 단악선이 쓰게 웃었다.
“정 드시기 힘들면 제가 요리를 해 드릴까요?”
그 말에 초악량과 범계위가 정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다. 그럴 것 없다.”
“우린 이게 좋아, 단 의원!”
질리게 경험했던 단악선의 요리는 초원에서의 기억만으로 충분했다.
범계위가 벽화령의 손을 잡으며 안타까운 눈빛을 건넸다.
“날 믿어, 내 여자. 이게 최선이야.”
벽화령이 포옥 한숨을 내쉬며 약초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사무심과 능소밀도 별수 없이 식사를 이어 가던 그때.
“그런데 언니.”
무언가를 떠올린 벽화령이 한설화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아까 대련할 때 제 검을 흘려 낸 낙화파영(落花波影)의 초식 말인데요. 그때 제가 회풍무류(回風無流)를 응용한 방식으로 대응했다면 그렇게 쉽게 거리를 내어 주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중은 쾌로, 쾌는 환으로 제압하는 무리대로라면 정석적인 대응이라 할 수 있지. 다만 극에 이른 환은 암향부동(暗香浮動)의 묘리와도 잇닿아 있기 때문에 당장의 공격을 받아치는 것보다 상대의 흐름을 끊어 주도권을 가져오는 데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호흡의 변화에 주목해야겠군요.”
“그런 셈이지. 자신보다 우위의 실력을 지닌 자를 상대로는 정공법으로 상대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단순히 속도에 의지한 찌르기 위주의 초식은 기세를 싣기 어렵고, 반대로 상대의 실수를 유도해 받아치는 방법은 흐름 자체를 지배하기 요원하다.”
“그렇다면 그 미세한 흐름의 변화는 어떻게 읽어 내야 하죠?”
그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초악량이었다.
“사실 이건 달리 방법이 없다. 누적된 경험을 통해 어느 순간 발현되는, 일종의 초감각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권법을 백 번 익히면(拳練百遍) 신법이 저절로 드러나고(身法自現), 권법을 천 번 연마하면(拳練千遍) 그 이치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其理自見) 경지와도 일맥상통하는 의미였다.
“백 번 보는 것이 한 번 익히는 것만 못하고(百看不如一練), 백 가지를 익힌다 한들 하나의 전일함만 못하다(百練不如一專)는 가르침이 괜히 나온 게 아니야. 계속 몸을 던져 부딪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감각이 네게 깃들어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범계위는 다른 해법을 제시했다.
“상대의 예상을 벗어난 공격으로 주도권 자체를 무산시켜 버리는 방법도 있지.”
벽화령과 한설화의 비무를 복기한 범계위가 약초를 질겅질겅 씹으며 손을 내저었다.
“예를 들어 아까 시전했던 일풍벽파(一風劈波)의 초식으로 상대를 현혹한 후에 창랑도도(昌浪滔滔)로 급격히 선회하면 빈틈을 노리고 들어온 상대는 오갈 데가 없어지는 거지.”
벽화령이 눈을 크게 떴다.
반면 초악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너나 되니까 가능한 거고!”
“잠깐만요.”
벽화령은 이 순간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깨달음이 머릿속을 간지럽히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초식을 연계하려면 기존의 심법이 상충하지 않나요?”
벽화령의 반문에 범계위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굳이 검으로 펼칠 필요 있나? 회전하는 기세 그대로 힘을 실어 걷어차거나, 검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장법을 펼치면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벽화령이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자 범계위가 벌떡 일어나 직접 시연했다.
“이런 식으로 말이야.”
쾅!
너무나 자연스럽게 초식을 연계한 범계위의 발길질에 허공에서 벼락 터지는 굉음과 함께 사나운 일진광풍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어차피 손도 두 개, 발도 두 개인데 놀려서 뭐 할 거야?”
그 말에 단악선이 탄성을 터트렸다.
“와! 대단해요! 그렇게 되면 실제 초식과 허초의 구분이 의미 없어지겠군요.”
“역시 단 의원! 이해가 빨라!”
의기양양한 범계위의 모습에 초악량이 코웃음을 쳤다.
자연스럽게 범계위 앞을 막아선 초악량이 방금 전 운용 방법에 기반한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어깨를 밀어 넣어 초식의 연계가 이루어지기 전에 위치를 선점해 버리면 오히려 역으로 발이 묶여 버리게 되겠지. 차라리 후발선제의 묘리를 살려…….”
한설화가 불쑥 입을 열어 끼어든 것도 그때였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공을 뿌리고 거둠이 자유로운 고수를 전제로 한 거지. 충격을 제대로 흘려 내지 못하면 역류한 진기가 양날의 창이 되어 내부를 뒤흔들 거야.”
“무슨 소리야? 그럴 때는…….”
“아니, 너희 두 사람은 본질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이럴 때는…….”
“내 말이…….”
“아니, 그보다는 내 말이…….”
점차 과열되기 시작한 장내의 분위기에 벽화령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듣고 보면 전부 맞는 말인 것 같았다.
한데 고수인 그들이 저마다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박을 해 대니 결국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그때였다.
“전사경을 활용해 보면 어때요?”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단악선에게 모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