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52)
신마의선-352화(352/500)
신마의선 (352)
당황한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던 것도 잠시.
“크큭.”
범계위가 돌연 웃음을 흘렸다.
“뭐가 배수의 진이고, 뭐가 대단한 결의야?”
“……!”
이어진 범계위의 말에 초악량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무공을 완성해 진법을 깨트릴 정도의 수준이 되기 전까지는 신마곡을 나서지 않겠다!
단악선이 절진을 작동시킨 이유가 그와 같은 의지를 반영한 행동이라 믿어 왔던 초악량은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착각을 해도 아주 단단히 한 셈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쉽게 여닫을 수 있는 진법이었다니…….
게다가 그 착각을 부추긴 건 다름 아닌 범계위였다.
벽화령이 한계를 넘기 위해 들어섰던 해남도의 기관진을 언급하며 호들갑을 떨어 댔기 때문이다.
지옥팔관이 설치된 섬이 지아비와 자식을 잃은 여인들의 곡소리가 맺혀 있다 해서 함곡도라 불린다느니, 이를 설치한 탁요신이 어째서 불가해(不可解)라 불리는지 알았다느니…….
물론 범계위는 무력으로 지옥팔관을 파훼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죽을 고생을 한 벽화령의 체면을 위해 그 위력을 한껏 과장했다.
이를 알 리 없는 초악량은 당연히 오해할 수밖에.
소림의 관문에 영감을 얻어 대충 만든 것이 그 정도였는데, 하물며 그가 남긴 최후의 역작이라는 혼천미리암진(混天迷理暗陳)은 당연히 더 대단할 것이라 짐작한 것이다.
“배수의 진이요?”
단악선의 반문에 민망함을 금치 못하는 초악량과 달리 범계위는 모처럼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껏 이죽댔다.
“크흐흐. 그때 초 형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하지 마라.”
초악량의 나직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범계위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초악량의 말투를 흉내 냈다.
“아무리 저 절진이 대단하다 한들 단 의원이 이곳 신마곡에 뼈를 묻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그리 두지 않을 테니까.”
“닥쳐.”
“싫은데?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더라? 아! 맞다! 가끔 절진이 둘린 입구 쪽을 노려보며 이렇게 읊조리곤 했었지? 하늘이 의지를 시험한다면…….”
콰앙!
난데없는 폭음이 범계위의 음성을 집어삼켰다.
“무슨 짓이유?”
두 팔을 교차해 초악량의 공격을 막아 낸 범계위가 얼얼한 손목을 문지르며 벌컥 역정을 냈다.
그런 범계위를 향해 농밀한 살기가 쏟아졌다.
“닥치라 했을 텐데?”
“어, 그랬지.”
범계위 역시 정색하며 으르렁댔다.
“난 싫다고 했고.”
“이 자식이!”
누가 만류할 틈도 없이 두 사람이 그대로 뒤얽혔다.
콰콰콰콰쾅!
연달아 터져 나오는 굉음과 함께 어지러운 공방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에 한설화가 한심하다는 눈빛을 던졌다.
“멍청이들.”
단악선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도 오늘은 수련보다 치료 시간이 길어질 것 같네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혹감을 금치 못하던 사무심과 능소밀의 등을 단악선이 떠밀었다.
“얼른 떠나세요. 괜히 휩쓸리기 전에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보중하시길.”
한바탕 소란을 뒤로한 채 어찌어찌 신마곡을 벗어난 능소밀과 사무심은 아직도 폭음이 터져 나오는 방향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그때.
거짓말처럼 굉음이 뚝 사라지며 정적이 찾아왔다.
“곡주님께서 진법을 다시 작동시켰나 보군.”
사무심의 말에 능소밀이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쳐 올렸다.
역시나.
멀리 보이는 신마곡의 입구 쪽에 다시금 짙은 운무가 뒤덮여 있었다.
“수련 기간 동안 절진을 운용하신 이유가 이것인가?”
능소밀의 말에 사무심이 고소를 지었다.
그러기를 잠시.
두 사람은 이내 경공을 펼쳐 무위로 향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그간의 노력이 아깝지 않을 만큼 쾌속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 무위가 시야에 들어오자 능소밀이 물었다.
“형님은 어디부터 갈 생각이십니까?”
“일단 제일 어려운 사람부터 만나야지.”
“형님께서 어려워할 만한 사람이 세 분 말고 또 누가 있다고…….”
의아한 얼굴로 반문하던 능소밀이 뒤늦게 무언가를 깨닫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 보니…….”
주조장에 칩거한 이래 두문불출하고 있어 잊고 있었지만 무위에는 또 다른 괴물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천하오절 중 가장 괴팍하고 까다롭다는 괴걸(怪傑), 주광도귀 강위룡이 바로 그였다.
“휴. 산 넘어 산이라더니……. 그러고 보면 형님 팔자도 어지간히 사납군요.”
“어쩌겠나. 온갖 군상들을 상대해야 하는 자네에 비하면 그나마 양호한 게지.”
“그럼 무위관에서 뵙겠습니다.”
“그럼 자네도 수고하게.”
어느새 무위로 들어선 두 사람은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 * *
한편 같은 시각.
주조장의 처소에 머물고 있던 강위룡은 술 창고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육중한 술독을 바삐 나르던 젊은 사내들이 뒤늦게 강위룡을 발견하고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졌다.
“쯧.”
강위룡이 못마땅한 듯 짧게 혀를 찼다.
제법 술 좀 만들어 봤다는 놈들 중 고르고 고른 놈들이건만 여전히 그의 눈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나마 만족스러운 건 창고 가득 떠도는 향긋한 주향이었다.
장정 둘이 힘을 합쳐야 겨우 옮길 수 있는 크기의 술 항아리.
그 숫자만 무려 백여 개에 달했다.
밀봉되어 있던 봉인지를 뚫고 뿜어내는 도원향의 향기는 불편한 그의 심기를 달래기에 충분했다.
강위룡이 그중 하나를 골라 봉인지를 뜯었다.
최종 숙성을 마치고 출하를 앞둔 도원향이었다.
한 방울이라도 흘릴세라 조심스럽게 술을 떠 입으로 가져간 강위룡이 슬쩍 입매를 말아 올렸다.
역시나 술맛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로 많은 양의 도원향을 주조한 것이 처음이라 내심 걱정이 앞섰는데 기우였던 모양이다.
‘확실히 돈이 무섭긴 무섭군.’
원래 도원향은 긴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어도 극히 적은 양만 생산할 수 있었다.
재료 선별은 말할 것도 없었고, 제조 과정 자체가 워낙 까다롭기 때문이다.
한데 신마상단은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 것으로 이를 해결해 버렸다.
지금처럼 눈앞에 즐비한 도원향도 그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다.
아무리 천하에 거리낄 게 없는 그라 해도 금력의 위대함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음?”
강위룡이 눈살을 찌푸리며 창고 입구 쪽을 노려봤다.
이곳은 아무나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금역.
한데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을 힐끔거리며 어슬렁대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눈매와 고집스런 입매가 두드러진 머리 희끗한 늙은이였다.
“여긴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경고를 담아 나직하게 으르렁대는 강위룡의 음성에 노인이 반색했다.
“오! 당신이 이곳 책임자요?”
뻔뻔하게 되묻더니 오히려 성큼 창고 안으로 들어서는 노인의 모습에 강위룡이 살기를 쏟아 냈다.
“하도 오래 살아 이제 사는 게 지겨워지셨나? 세상에 미련이 없어졌어? 아니면 치매가 와서 꺼지라는 말도 이해 못 하는 건가?”
상대의 걸음이나 호흡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상대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백면서생.
반면 천하오절 중 한 명인 그가 작정하고 드러낸 살기는 평범한 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엄포가 되었으리라 생각했건만, 이건 웬걸?
눈앞의 노인은 되레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을 건네 왔다.
“허허. 듣던 대로 성격 한번 까칠하군그래. 내 할 이야기가 있어 왔으니 일단 여기 앉아 보시오.”
“나는 할 이야기 없다만.”
“그러지 말고 이야기나 들어 보라니까?”
태연한 노인의 대꾸에 도리어 강위룡이 당황한 사이.
노인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주단을 풀어 헤치더니 뻔뻔하게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듣자니 당신이 만든 술이 천하제일이라는데, 한 병만 얻읍시다. 물론 염치없이 공짜로 달라 할 생각은 없소. 대신 나는 이것을 내어 놓을 테니 서로 퉁치는 걸로 합시다.”
강위룡은 내심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천금을 싸안고 와도 거절할 마당에 고작 비단 한 필을 도원향과 바꾸려 하다니.
염치의 문제가 아니라 이 정도면 양심이 없는 거였다.
거절할 요량으로 노인에게 다가서던 강위룡이 멈칫한 것도 그때였다.
노인이 펼친 비단이 심상치 않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러다 문득 최근 들었던 소문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황제에게 헌상하는 비단을 만든다는 노인장이 바로 당신이었군?”
“뭐,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소. 그보다 이걸로 술 한 병만 얻을 수 있겠소? 내 아주 얄미운 놈이 하나 있는데, 마침 오늘이 그놈 생일이라…….”
강위룡이 유심히 비단을 응시했다.
술을 제외하곤 달리 내세울 견식이 없는 그였지만 눈앞의 비단은 실로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래도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도원향을 고작 비단 한 필에 넘겨주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돌아가시오. 고작 그런 일에 내어 줄 술이 아니외다.”
비록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염사인을 대하는 강위룡의 말투는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아무리 안하무인인 그라 해도 장인의 반열에 오른 상대의 실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쩨쩨하게 굴지 말고 한 병만 부탁합시다. 저렇게나 술이 많은데 죽을 때 다 싸 갈 거요?”
“뭐요?”
“내 뒷바라지한답시고 좋은 세월 다 보낸 가엾은 늙은이요. 뭐, 성격은 지랄 같지만 그래도 같이 지낸 세월이 수십 년이라, 늘그막에 선심 한번 쓰려 하니 좀 도와주시오.”
창고 안에 그윽하게 떠도는 주향을 음미하던 염사인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마시고 싶지만…….”
그러다 이내 고개를 내젓는 염사인이었다.
“아서야지. 그 망할 놈의 지겨운 잔소리를 어찌 감당하려고.”
향기만으로도 절로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도원향이었다.
하지만 한동안 술을 멀리하라 한 단악선의 엄명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그저 원 없이 눈에라도 담아 두겠다는 듯 염사인은 도원향이 담긴 술 항아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런 염사인의 모습에 강위룡은 흥미가 동했다.
고수가 고수를 알아보듯 술꾼도 술꾼을 알아보는 법.
“주도에 나름 조예가 있으신 모양이군?”
강위룡의 물음에 염사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일 년 전까지는 그랬지. 이제는 끊었지만.”
“술은 그리 쉽게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오. 아니면 지금껏 마셔 온 술이 제대로 된 술이 아니라서 그렇든가.”
강위룡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말아 올렸다.
“좋소. 내 받아들이지. 단, 조건이 있소.”
“조건?”
염사인의 비단을 챙긴 강위룡이 한 병의 술을 내어 줬다.
“나랑 내기 하나 합시다.”
의아해하는 염사인을 향해 강위룡이 한 병의 도원향을 더 얹어 건넸다.
“이 술을 노인장이 마시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면 노인장이 이기는 거요. 다만 도원향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노인장이 마신다면 내가 이기는 거지.”
염사인이 눈살을 찌푸리자 강위룡이 도발하듯 씨익 웃었다.
“어떻소? 술을 끊었다니 노인장에게는 매우 유리한 내기일 성싶은데?”
“아무에게나 줘도 상관없는 거요?”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일절 관여치 않을 테니까. 하지만…….”
“……?”
“이 술 향기가 완전히 날아가기 전에 주어야 할 거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위룡이 술병의 마개를 열었다.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도원향의 향기.
이를 접하기 무섭게 흔들리는 염사인의 눈빛을 확인한 강위룡이 자신만만한 웃음을 흘렸다.
‘술을 마셔 본 사람이라면 이건 못 참지.’
그렇지 않아도 심심하던 차에 잘되었다.
‘다른 건 다 끊어도 술과 내기는 끊을 수가 없거든.’
염사인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장인이라면 내기 상대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몇 번이고 입맛을 다시던 염사인이 술병을 덥석 움켜쥔 것도 그때였다.
“내가 지면 어찌 되는 건가?”
“처음 건넸던 그 술을 다시 회수하겠소. 물론 가져온 주단도 돌려주지 않을 것이오.”
“내 비단만 빼앗기는 셈이군?”
강위룡이 히죽 웃었다.
“덩달아 당신을 위해 수십 년 동안 고생한 자에게도 인망을 잃게 되겠지.”
자고로 줬다 뺏는 선물만큼 인심을 잃는 방법도 없었다.
강위룡을 빤히 응시하던 염사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거참 몹쓸 악취미로군.”
“내기 자체는 공정하다 생각하오만? 어디까지나 선택권은 노인장에게 있으니까.”
이윽고 염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 내기, 받아들이지.”
술병 두 개를 나눠 들고 염사인이 창고를 나섰다.
그런 그와 멀찍이 거리를 두고 강위룡도 따라나섰다.
“그럼 어디 확인해 볼까?”
강위룡이 흥미진진한 눈빛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