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63)
신마의선-363화(363/500)
신마의선 (363)
“단 의원이 너무 늦는 거 아니야?”
걱정 가득한 초악량의 말에 범계위가 한심하다는 눈빛을 던졌다.
“늦으면 좋은 거 아뇨? 안 오면 더 좋은 거고.”
“그래도 아직 외박은 이르지.”
퉁명스러운 한설화의 대꾸에 범계위가 코웃음을 쳤다.
“그건 마녀 네가 뭘 몰라서 하는 소리야. 원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는 거라고. 오죽하면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겠어?”
오랜만에 유식함을 뽐냈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하던 것도 잠시.
대번 핀잔이 날아들었다.
“그 말을 흔히 ‘만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본래의 쓰임은 다르다. 하룻밤을 보낸 대가로 죽을 때까지 만리장성을 쌓아야 한다는 의미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남녀상열지사와는 전혀 다른, 과욕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초악량의 딴지에 범계위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런 범계위를 벽화령이 다독였다.
“신경 쓰지 마세요, 가가. 실제로 우린 하룻밤 만에 새로운 역사를 썼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가가의 말은 틀리지 않았어요.”
“고마워, 내 여자.”
“가가…….”
서로를 향해 애틋한 시선을 보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초악량과 한설화가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잠잠하나 싶더니 또 시작이었다.
그러다 벽화령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신마곡 입구 쪽을 바라봤다.
“설마 진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
계곡 끝자락에 걸쳐 있던 석양은 어느덧 밀려드는 어둠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고 있었다.
이제 곧 머지않아 밤이 될 터.
지금이라도 마을로 내려가 볼까 초악량이 내심 고민하던 그때.
어스레한 노을을 뒤로한 채 단악선이 계곡 입구에 들어섰다.
“잘 만나고 왔느냐?”
짐짓 태연함을 가장한 채 단악선에게 다가서던 초악량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단악선의 표정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밝았기 때문이다.
아침만 해도 마지못해 신마곡을 나서던 것과 달리 지금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단악선이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손수건에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일반적인 재질이 아닌, 한눈에 봐도 무척 고급스러워 보이는 비단이었다.
누가 봐도 영순공주에게 받은 것이 분명했다.
이에 대해 초악량이 넌지시 운을 떼 보려는 찰나.
범계위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단 의원, 오늘 즐거웠어?”
단악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다음에도 만나기로 했고요.”
의외의 대답에 단악선을 제외한 모두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멀리서 지켜봤을 때와 다르게 적극적으로 바뀐 단악선의 변화가 그만큼 당혹스러웠다.
“아, 그리고 오늘 수련은 건너뛸게요. 지금은 따로 집중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그 말을 끝으로 단악선이 자신의 전각을 향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단악선의 모습이 전각 안으로 사라지자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초악량이 입을 열었다.
“이거 잘된 건가?”
범계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잘된 거겠지?”
반면 한설화는 의아함을 드러냈다.
“수련까지 거르며 단 의원이 집중해야 할 일이 뭐가 있지?”
이곳에 모여 연공을 시작한 이후 식사는 걸러도 수련은 거른 적이 없는 단악선이었다.
그러기를 잠시.
“뭐, 어찌 되었든 두 사람 사이가 진척이 있었다니 다행인 거 아닌가요?”
벽화령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저마다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단악선이 먼저 나서 관계의 진전을 이끌어 내지는 않았을 테니, 이 모든 상황은 영순공주가 주도해 이뤄 낸 것일 터.
그녀에게 건넸던 자신들의 조언이 그 과정에서 큰 몫을 했을 거라 저마다 자부하는 그들이었다.
한편 전각에 들어선 단악선은 곧장 탁자 위에 쌓여 있던 서적과 집기들을 치웠다.
그리고 영순공주가 건넨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손수건에 쌓여 있던 천의신단을 꺼내 손바닥에 올린 단악선은 마지막에 그녀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내기는 공정해야 하니,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상관없어요.
단악선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단악선이 선반 위에 올려져 있던 도구 몇 개를 가져와 탁자 위에 정리했다.
그러곤 천의신단을 감싸고 있던 밀랍을 벗겨 냈다.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향기가 순식간에 실내를 가득 메웠다.
그 향기를 음미하던 것도 잠시.
단악선은 미련 없이 천의신단을 유발(乳鉢)에 담은 뒤 막자를 이용해 으깨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기겁할 일이었지만 정작 단악선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약효와 성분을 정확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일단 곱게 가루를 내어야만 했다.
황실의 비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영단이 연구를 위한 일개 시료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 * *
흔히 세월을 가리켜 유수와 같다 표현한다.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잠시 눈을 떼면 이미 저만치 성큼 지나쳐 있기 때문이다.
이곳 무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사이 계절이 바뀌어 겨울을 맞이했고,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또다시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겨우내 얼어붙은 땅 밑에서 웅크리고 있던 씨앗이 새싹을 틔우기 시작할 무렵.
무위는 더 이상 마을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외형 자체가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무위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서역 상단과의 교역은 말할 것도 없고,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을 찾는 중원 전역의 상인들로 인해 어마어마한 인구의 유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미 몇 차례나 숙박 시설을 증축했음에도 밀려드는 사람이 워낙 많아 주변 객잔이 모자랄 정도였다.
말 그대로 단순히 이름뿐인 행정 단위에 그치지 않고 직예주에 걸맞은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그 빠른 변화는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였다.
문제는 그나마 추운 겨울에는 주춤하던 성장세가 날이 풀리기 시작하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고, 곳곳에서 크고 작은 잡음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에 신마상단은 관과 협력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외지인에 밀려 토박이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우선적으로 좋은 일자리를 제공했고, 이를 통해 그들이 무위의 발전을 주도하는 중심 역할을 담당하게 한 것이다.
중원의 상단과 상인들에게 단숨에 성공의 땅으로 부상한 무위의 위상은 과거 남송의 불야성과 비견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거리 곳곳에는 상인들과 백성들의 웃음이 넘쳤다.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행정 책임자인 능소밀의 일거리는 더욱 늘어나, 일과 대부분을 사무에 매달려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신마곡 소속의 상단과 의가를 관리하는 중책을 떠안은 사무심 역시 마찬가지.
총관으로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신마의가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입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난 만큼 환자의 수도 급증했기 때문이다.
연일 밀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의원들의 입에서는 단내가 풍길 지경이었다.
그나마 신마상단에서 직접 나서 새로운 의원들을 수급해 주었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의원이 먼저 과로로 죽어 나갈 정도였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떠들썩한 무위였지만 반대로 더없이 무거운 분위기가 내려앉은 곳도 있었다.
바로 신마곡이었다.
이른 새벽.
처마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범계위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범계위가 바닥에 내려서자 때를 같이해 처소 문이 열리며 초악량과 한설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 벽화령은 무위에 볼일이 있어 신마곡을 떠나 있는 상태.
“단 의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단악선이 머무는 전각을 응시하는 범계위를 향해 초악량이 진지한 표정으로 충고했다.
“그냥 지켜봐라.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설화 역시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악선의 전각에서 흘러나오는 묘한 기류를 이미 감지한 범계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이거 나만 느끼는 거 아니지?”
“불길하거나 불안정한 느낌은 아니다. 어쩌면…….”
살짝 말끝을 흐리는 초악량을 향해 범계위가 되물었다.
“이번에야말로 벽을 넘을 수 있을까?”
“모르지. 이미 이론적으로는 우리도 따라갈 수 없는 상태니까.”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이번 수련에 참여한 모두가 저마다 큰 성과를 얻었다.
자신들과 벽화령은 말할 것도 없었고 심지어 사무심과 능소밀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성취를 이뤄 낸 것이다.
반면 오직 단악선만이 제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단악선의 오성과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못내 의아한 그들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깊은 삼매(三昧)에 빠져 있는 주장명 뒤에 단악선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러곤 주장명의 명문혈에 손바닥을 붙이고 위화신공을 흘려 넣었다.
매일 아침마다 해 왔던 치료였다.
하지만 오늘은 거기에 한 가지를 더했다.
영순공주에게 받았던 천의신단을 연구하던 과정에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기존에 널리 알려진 강호의 영단과는 다르게 천의신단은 철저히 구명(救命)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내공을 증진하는 대신 선천지기를 자극해 몸 안의 독소를 배출하고, 재생력을 순간적으로 극대화하는 효과였다.
목이 잘리거나 온몸이 불타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 이상,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한 번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천고의 영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위화신공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위화신공 자체가 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위화요법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도가 성공한다면 주장명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될 터.
만약 상대가 일반인이었다면 섣불리 엄두를 내지 못했을 일이었지만 다행히 주장명은 단악선과 마찬가지로 위화신공을 익히고 있었다.
혹시 모를 이변이 생긴다 해도 서로 다른 진기가 충돌하는 부작용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몇 번이고 주장명의 운공을 도왔기에 심맥과 기혈의 위치는 머릿속에 하나의 지도처럼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마음을 굳힌 단악선이 주장명의 명문혈을 통해 불어 넣던 진기의 양을 천천히 늘려 가기 시작했다.
일단 선천지기를 깨우기 위해서는 상대의 진기를 완벽히 지배해 주도권을 잡아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감은 채 무아지경의 상태를 거닐고 있던 주장명이 움찔했다.
동시에 단악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성공했어!’
깨어난 선천지기가 위화신공의 흐름을 타고 전신의 기맥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를 느낀 단악선은 준비했던 다음 수를 실행에 옮겼다.
일그러지고 협착되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던 주장명의 심장 혈관과 근육.
그 사이로 응집된 진기를 밀어 넣어 억지로 틈을 만들어 낸 것이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지극히 섬세한 진기의 운용이 필요했다.
그만큼 상당한 집중력과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단악선의 이마에서는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혀 갔다.
그 순간.
새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흐르기 시작한 위화신공의 진기를 따라 선천진기가 파도처럼 밀려들며 뒤틀리고 어그러져 있던 부분들을 바로잡기 시작했다.
비록 부분적이긴 했으나 이는 분명한 환골탈태였다.
정작 이를 주도한 단악선만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
주장명의 허리에서 손을 떼고 물러난 단악선이 탄성을 흘렸다.
평소 보랏빛이 감돌던 주장명의 입술에 온전한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진맥을 통해 이상 유무를 재차 확인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불규칙하던 맥박은 찾아볼 수 없었고, 심장도 매우 힘차게 뛰고 있었다.
“그동안 고생했어, 장명아.”
들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단악선은 조용히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자신의 시도가 주효한 것은 둘째 치고, 주장명의 정순한 심법이 받쳐 주지 못했다면 처음부터 시도조차 해 볼 수 없는 치료였다.
두 개의 위화신공.
동일한 심법의 상호 작용을 통한 상승효과가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무엇보다 주장명의 노력이 컸다.
‘공주마마께도 감사의 말을 전해야겠구나.’
주장명을 치료할 수 있었던 발상이 그녀가 제안한 내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단악선은 실로 오랜만에 뿌듯함을 느꼈다.
그야말로 모든 내력과 정신력을 쏟아부은 뒤 찾아온 해방감.
‘그러고 보니…….’
문득 자신이 받고 이름까지 지어 줬던 아기가 떠올랐다.
그때도 분명 지금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러다 일순 멍한 상태가 되어 그 자리에 굳어졌다.
깊게 묻혀 있던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노자가 그랬다. 학문을 닦으면 나날이 늘어날 것이고, 도를 행하면 나날이 줄어들 것이라고.
부친인 성수신의가 했던 말.
그 순간, 단악선이 인지하던 모든 감각이 꿈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