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75)
신마의선-375화(375/500)
신마의선 (375)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치솟는 노기.
그 이면에는 현 상황에 대한 자괴감이 깊게 깔려 있었다.
그런 총표파자의 모습에 석단평이 침음성을 흘렸다.
오랫동안 총사로서 악호군을 보필해 온 그였다.
그런 만큼 지금의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잘 아는 까닭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
평소라면 불같이 화를 냈을 악호군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침묵하며 속으로 분노를 삼켰다.
약해진 자신의 입지만큼 총표파자의 권위로 다져 왔던 녹림의 결속력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다른 채주들의 의향을 먼저 확인하도록.”
녹림총회가 열리기 위해서는 나머지 채주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렇게 석단평을 물리고 집무실에 홀로 남은 악호군이 마른 웃음을 풀썩였다.
“내 꼴이 참으로 우습게 되었군.”
한때 명성으로는 누구에게도 크게 밀리지 않던 자신이 이제는 여기저기 눈치를 봐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다니.
“무위로 가지 말았어야 했다.”
결국 이 모든 사달은 단악선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그 당시에 무림맹과 맞서 전면전으로 응수했다면 희생은 컸을지언정 지금처럼 녹림 전체가 삐걱거리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늘 그렇듯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인 셈인가.”
그렇게 발버둥 치며 애써 왔건만 정작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를 버티게 하는 건 오직 하나.
바로 마지막에 남은 오기였다.
“나는 악호군이다.”
다른 건 몰라도 누군가에 의해 실각하는 것만큼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녹림의 총표파자답게 적어도 마지막은 자신이 선택하리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악호군이 그대로 집무실을 나섰다.
“모든 산채에 알려라.”
가장 먼저 자신과 시선이 마주친 수하를 향해 악호군이 자신의 결정을 알렸다.
“이 시간부로 신마상단과의 협약을 파기한다.”
그 명령이 수많은 전서구를 통해 중원 전역의 녹림십팔채로 전달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양자강과 한수.
거대한 두 개의 물줄기가 끌어안은 무한은 호북성에서도 중요한 요지였다.
한때 무림맹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물길을 통한 신속한 정보 취합과 인력 파견이 수월했던 것이다.
그래서 무림맹을 결성한 직후 남궁백이 가장 먼저 한 일도 장강수로연맹을 밀어 버린 것이었다.
그 때문에 거경방(巨鯨房)을 비롯한 상당수의 수채가 본거지를 잃고 무한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이후 세력을 정비해 양쪽의 물길을 막아 버렸다.
그 바람에 엉뚱하게도 그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사람들은 이 지역 상인들이었다.
하지만 무림맹이 사라진 지금, 무한은 과거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표국과 상단들이 속속 들어서며 전례 없는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단악선이 방문한 천화표국 역시 크게 사업을 확장해 나가는 곳 중 하나였다.
천화표국의 국주 심대명은 이 업계에서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밑바닥 쟁자수부터 시작해 약관 무렵에는 표사로, 불혹에 이르러서는 표행을 진두지휘하는 표두가 되어 명성을 드날렸다.
그러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라 해서 망팔(望八)이라 하는 일흔한 살에는 표국을 설립했다.
모두가 늦은 나이라고 한결같이 만류했지만 머리칼이 새하얀 지금도 누구보다 혈기왕성하게 사업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단악선이 그를 만나러 온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오랜 세월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그였기에 이쪽 업계에 지닌 영향력도 상당했던 것이다.
심대명과 마주한 단악선은 서로의 근황을 짧게 묻고 답한 뒤 곧바로 방문 목적을 꺼냈다.
“예?”
심대명이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상단과 표국이 녹림에게 건네는 통행세와 상납금을 자체적으로 인상하란 말입니까?”
아무리 나이 차가 있다지만 단악선은 신마상단의 실질적인 주인.
최근 신마상단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표국주 입장에서는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단악선이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금액의 상승분은 저희 신마상단에서 지원할게요.”
“흐음……. 저희야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니 그리 상관은 없습니다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궁지에 몰린 쥐는 결국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까요.”
단악선의 말에 심대명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최근 들어 기세가 꺾였다 하나 녹림은 녹림.
그런 그들을 궁서설묘(窮鼠齧猫)에 빗대 약자로 취급할 수 있는 사람이 전 중원을 통틀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었다.
그러기를 잠시.
웃음을 거둔 심대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긴……. 퇴로가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물불 가리지 않는 건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를 바 없지요.”
“알고 계셨군요?”
단악선의 반문에 심대명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색이 표국이니까요. 중원 각지를 돌아다니는 만큼 누구보다 소문에 민감한 사람들이 표사입니다.”
최근 떠돌던 불길한 소문.
출처와 근거가 확실하지 않아 사람들을 통해 알음알음 전해지던 풍문이 최근 흑암방이 박살 나며 사실로 드러났다.
단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녹림이 앵속의 재배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새로운 협상안을 제시하려고 해요.”
“대의를 위해 스스로 손해를 감수하시는 겁니까?”
“앵속은 그만큼 위험한 물건이니까요. 무엇보다…….”
잠시 말끝을 흐리던 단악선이 심대명이 건넨 차로 목을 축인 뒤 말을 이어 갔다.
“녹림이 무너지면 그 여파가 실로 적지 않을 거예요.”
그나마 총표파자인 악호군이 녹림을 지배하는 것이 여러모로 강호에는 이득이었다.
심대명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들은 의원님 말에 따르겠습니다.”
“감사해요. 덕분에 걱정 하나를 덜었어요.”
“하하하. 감사는 저와 표사들이 해야지요. 신마상단 덕분에 전례가 없을 만큼 평화로운 시절을 누리고 있으니까요. 그 포악하고 탐욕스럽던 승냥이 떼들이 지금은 온순한 강아지처럼 꼬리를 말고 있지 않습니까.”
단악선이 곤혹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평소 녹림과 표국의 불편한 관계를 알기에 달리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만약 악호군이 들었다면 곧바로 칼을 빼 들었을 만큼 모욕적인 언사였다.
그렇게 협상이 마무리되던 그때.
국주의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중년의 장한이 창백한 얼굴로 뛰어들었다.
“아버님!”
심대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심 표두. 귀한 손님께서 방문하셨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죄송합니다. 아버……. 아니, 국주님. 한데 지급으로 보고가 올라와서…….”
심대명이 한숨을 내쉬며 단악선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원래 이렇게 경박한 녀석이 아닌데…….”
“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심대명이 엄한 눈빛으로 아들을 꾸짖었다.
“사안이 중대하지 않다면 크게 경을 칠 것이다.”
그러나 이어진 보고에 심대명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남을 넘어가던 표물이 철산채 소속의 녹림도들에게 털렸습니다!”
“뭐라?”
철산채는 녹림십팔채 가운데서도 거칠기로는 손에 꼽는 곳이었다.
게다가 표사들이 표물을 빼앗기는 걸 손 놓고 방관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분명 무력 충돌이 빚어졌을 터.
“표사들은? 그들은 어찌 되었느냐?”
“모두 붙잡혔다고 합니다. 표물을 돌려주는 대가와 별개로 그들의 몸값도 함께 요구하고 있습니다.”
“허…….”
심대명은 기가 막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래전에는 이와 같은 일이 상당히 빈번하게 발생하곤 했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이처럼 노골적인 갈등이 빚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심대명이 당황해 되물었다.
“하남으로 향하던 표물이라면 분명 신마상단이 동행하고 있었을 터인데?”
“신마상단 역시 철산채의 인질로 함께 구금되었습니다.”
그 말에 단악선도 깜짝 놀랐다.
“녹림이 결국…….”
단악선은 새어 나오는 한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다만 그 시기가 예상보다 훨씬 빨라 당혹스러웠다.
자신을 바라보는 심대명을 향해 단악선이 고소를 머금었다.
“이번 일은 제가 해결할게요.”
심대명의 인사를 뒤로한 채 단악선이 급히 천화표국을 나섰다.
* * *
하남성은 대부분 황하(黃河) 이남에 속해 있었다.
치수(治水)로 유명한 전설상의 임금이었던 우(禹)가 구주(九州)로 나누어 통치했을 때,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던 까닭에 지금도 이 지역을 중주(中州)라 부르기도 했다.
중원 전역에서 가장 큰 곡창 지대를 지니고 있는 데다,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를 차지한 지리적 여건 덕에 가장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반대로 평야가 반, 산악 지대가 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이 자리 잡은 곳이기도 했다.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비롯한 복우산맥(伏牛山脈)과 동백산맥(桐柏山脈), 대별산맥(大別山脈)이 반원 형태로 삼면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지역에는 녹림 소속의 산채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철산채 역시 그중 하나였다.
“채주님, 이래도 되는 걸까요?”
자신의 오른팔인 사촌 동생, 곽가의 우려에 이곳 철산채를 다스리는 채주인 곽릉산이 히죽 웃었다.
철산노호(鐵山怒虎)라는 별호답게 험악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지금까지의 험한 인생을 대변하듯 얼굴 곳곳에 새겨진 흉터가 호랑이 얼굴의 무늬와 비슷하다 해서 붙여진 명호였다.
그는 사나운 눈빛으로 눈앞에 포박되어 있는 서른 명의 인질들을 응시했다.
“그래도 돼.”
“하지만…….”
“이건 우리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리는 효시(嚆矢)다. 거창하면 거창할수록 좋아.”
“놈들이 과연 순순히 몸값과 표물비를 치를까요?”
“치르지 않으면?”
“행여 신마삼존과 같은 고수라도 들이닥친다면…….”
천화표국의 표사들은 몰라도 신마상단의 사람들까지 붙잡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곽가였다.
무엇보다 신마상단에는 무서운 고수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재앙과도 다를 바 없는 세 괴물을 제외하더라도 사무심과 능소밀을 위시한 내로라하는 사파의 고수들이 득시글대는 곳이 무위였다.
그야말로 용담호혈(龍潭虎穴).
자신들도 한때 총표파자를 따라 무위에 머물렀던 적이 있는 만큼 그곳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곽릉산은 태연했다.
오히려 히죽 웃으며 섬뜩한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럼 죽으면 그만이지.”
“예?”
“그게 우리 녹림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표국이나 상단의 눈치를 살피며 살았단 말이냐? 총표파자께서 신마상단과의 약조를 파기한 진정한 의미를 모르겠느냐?”
고집으로 똘똘 뭉쳐 완고한 채주의 태도에 곽가가 몰래 한숨을 삼켰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총표파자에 대한 지지를 꺾지 않는 강경파.
그중에서도 몇 안 되는 열혈 추종자가 바로 곽릉산이었다.
“쓸데없이 징징댈 거면 가서 술이나 가져와.”
“갑자기요?”
“그래.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술이라도 실컷 마셔 둬야지.”
곽릉산의 말에 철산채의 녹림도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개중에는 복잡한 눈빛을 흘리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날 밤.
늦은 시각까지 폭음을 이어 가던 곽릉산은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콰직.
갑자기 천장이 박살 나며 거대한 무언가가 뚝 떨어져 내렸다.
“네놈이 여기 두목이냐?”
다짜고짜 불쑥 말을 건네 오는 상대.
“크흐흐.”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곽릉산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무위에서 지내는 동안 몇 번인가 마주친 적이 있어 얼굴을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 최후의 상대가 망산초자라니! 죽어도 억울하지는 않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