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e and Demonic Doctor RAW novel - Chapter (376)
신마의선-376화(376/500)
신마의선 (376)
범계위는 순간 당황했다.
자신을 마주하는 순간 당연히 곧바로 부복해 살려 달라 애원할 줄 알았건만…….
겁을 먹기는커녕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채주 놈의 반응은 그만큼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처음에는 술 때문인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비록 술병을 끼고 있었지만 눈빛 어디에서도 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말없이 곽릉산을 응시하던 범계위가 피식 웃었다.
상대의 눈 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감정.
그것은 분명한 두려움이었다.
그런데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도끼를 움켜쥐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런 놈은 오랜만이네.”
하는 짓은 같잖았지만 공포에 굴하지 않고 맞서는 의연한 기개만큼은 높이 살 만했다.
“좋아. 상으로 네놈은 내 최고의 절학으로 시원하게 죽여 주마.”
하지만 범계위는 곽릉산을 죽이지 못했다.
언제 따라붙었는지 등 뒤로 내려서는 단악선의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재빨리 범계위 앞을 막아선 단악선이 곽릉산을 향해 외쳤다.
“상단과 표국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죠?”
물끄러미 단악선을 응시하던 곽릉산이 히죽 웃었다.
“표물과 함께 창고에 던져 두었지. 그래, 표물비와 몸값은 가져왔느냐?”
대뜸 반말을 던지는 곽릉산의 모습에 단악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그깟 돈이 문제가 아닐 텐데요.”
“뭐?”
“당신은 신마상단과의 협약을 어기고 우리 측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했어요.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한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생각인가요?”
“크큭. 협약? 책임?”
곽릉산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전서구를 통해 전달된 악호군의 명령서였다.
“나는 총표파자의 명을 따를 뿐! 우리는 더 이상 신마상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곽릉산이 집어 던진 명령서를 들어 내용을 확인한 단악선이 나직하게 한숨을 흘렸다.
그런 단악선을 향해 곽릉산이 으르렁댔다.
“몸값을 지불할 생각이 없다면 무기를 들어라.”
뒤늦게 실내에 들어선 초악량과 한설화가 어이없다는 눈빛을 흘렸다.
고작 일개 채주에 불과한 그가 대체 무얼 믿고 자신들 앞에서 이리 당당한지 의아할 뿐이었다.
단악선이 곽릉산을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디딘 것도 그때였다.
화들짝 놀란 곽릉산이 반사적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하지만 단악선이 그보다 더욱 빨랐다.
눈앞에서 단악선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사라졌다고 느낀 순간, 곽릉산은 이미 마혈을 짚여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어? 단 의원. 점혈 위치가 틀렸는데?”
범계위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사혈을 가리키자 곽릉산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단악선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우리 쪽 사람들의 안위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에요. 이 사람의 처분에 대한 결정은 그때 내리도록 해요.”
이후 단악선은 곧장 곽릉산이 언급한 창고로 향했다.
녹림도 몇 명이 창고 앞을 지키고 있었지만 무공 자체가 그리 높지 않아 제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신마상단 소속의 상인들과 천화표국의 표사들을 구출한 단악선은 내심 안도했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친 사람은 몇 명 있었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만큼 위중한 부상을 입은 환자도 없었다.
마침 철산채의 모든 녹림도를 제압하고 돌아온 세 사람을 돌아보며 단악선이 말했다.
“총표파자를 만나야겠어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악선이 신형을 뽑아 올렸다.
그리고 바로 녹림의 총채가 위치한 검단산을 향해 내달렸다.
* * *
한편 그 시각.
악호군은 한 사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녹림총회의 개최를 요구했던 와호채의 채주, 전굉이었다.
태연히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는 전굉의 모습에 악호군은 의외란 눈빛을 흘렸다.
자신을 실각시키기 위해 녹림총회라는 최후의 수단까지 사용하며 압박한 자치고는 눈빛이나 표정이 너무나 담담했기 때문이다.
“홀로 오거나, 잔뜩 데리고 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악호군이 전굉의 뒤에 시립해 있는 사내를 보며 말했다.
전굉과 달리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사내는 딱히 특별해 보일 것도 없는 평범한 자였다.
“내가 죽으면 산채를 이끌 놈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전굉의 대답에 악호군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래서 부채주는 남겨 두고 왔다? 그럼 저치는?”
“염(殮)하는 솜씨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 녀석이오.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으로 머리를 눕힌다는데, 그 정도 호사는 누려도 되지 않겠소? 내 평생소원이었소. 와호채가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뼈를 묻는 것이.”
전굉의 말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그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온 것이다.
악호군이 피식 웃었다.
“나를 제치고 총표파자가 되는 것이 소원 아니고?”
자신을 비꼬는 악호군을 향해 전굉이 씁쓸하게 웃었다.
“정녕 그것 때문이라 생각하시오?”
침묵하는 악호군을 전굉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럼 답을 주시오. 대체 우리가 언제까지 질질 끌려다녀야 하는 거요?”
“신마상단과의 협약은 이미 파기했다.”
“그래서 저놈만 데리고 왔소. 이제야 총표파자께서 정신을 차린 것 같아서. 그렇지 않았다면 전력을 이끌고 왔을 거요.”
물끄러미 전굉을 응시하길 잠시.
저벅.
악호군이 전굉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늘한 눈빛을 뿜어내며 어느새 지척에 다가선 악호군을 한 차례 올려다본 전굉이 씁쓸하게 웃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턱.
묵직한 무언가가 전굉의 품에 날아들었다.
“이건!”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던 전굉은 악호군이 건넨 물건을 확인하곤 대경실색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희귀한 곤오강(昆吾鋼)을 통째로 주조해 만들었기에 은은한 붉은빛이 감도는 묵철패(墨鐵牌).
그 안에는 험준한 산세의 정상 위에서 천하를 향해 포효하는 대호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전굉이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녹림 총표파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유일한 신물이 바로 눈앞의 묵철패였기 때문이다.
떨리는 눈빛으로 묵철패를 들여다보던 전굉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죽으라는 뜻입니까?”
신마상단과의 약조를 파기했으니 머지않아 누군가가 이곳에 들이닥칠 터.
그야말로 천재지변에 가까운 재앙인 그들을 누군가는 맞이해 책임을 져야 했다.
그 말에 악호군이 황당하다는 눈빛을 던졌다.
“네 눈에 아무리 한심해 보여도 난 총표파자다. 그렇게까지 밑바닥은 아니야.”
“그럼……?”
“이번에 열리는 녹림총회에서 새로운 총표파자로 너를 추대하도록 석 총사에게 일러두었다. 임시직이긴 하나 그때까지 네게 총표파자의 모든 권한을 이양한다. 물론 정식으로 그 자리에 앉는 건 다른 채주들의 동의를 얻어야 할 테지만 말이야. 뭐, 그건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고.”
“총표파자!”
“우선은 지금 당장 혈랑대를 인솔해 총타를 벗어나라.”
전굉의 눈빛이 달라졌다.
혈랑대는 녹림 내에서도 가장 뛰어난 무공을 지닌 집단.
아울러 오직 총표파자의 명령만을 수행하는 수족과도 같은 직속 단체였다.
“그들을 전부 갈아 넣는다 한들 그 괴물들을 상대하는 건 무리다. 녹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최후의 저력은 보존할 필요가 있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죽는 건 나 하나로 족하다는 뜻이다.”
“총표파자!”
“내 죽음을 통해 녹림의 의지를 천하에 천명하는 것. 그것이 총표파자로서 내게 주어진 마지막 책무다. 그러니 너는 내가 죽으면 혈랑대를 이끌고 항전을 준비해라.”
전굉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제가 알던 총표파자로 돌아오셨군요. 저 또한 끝까지 총표파자 곁을 지키겠습니다.”
악호군이 희미하게 웃었다.
“조바심 낼 거 없다. 총표파자의 직책을 물려받은 이상 머지않아 네게도 순서가 돌아갈 테니까.”
과거에는 무림맹만 상대해야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신마곡과 적대하는 순간 구파일방을 비롯해 무위에 소속된 사파인까지 적으로 맞닥뜨려야 했다.
그야말로 천하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것이다.
“네가 할 일은 오직 하나. 앞으로 우리가 써 내려갈 피의 역사 속에서 녹림의 명맥과 의지가 끊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악호군의 눈빛과 음성에서 느껴지는 결연한 의지.
이를 읽어 낸 전굉의 눈빛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가라.”
“하오나…….”
“총표파자로서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다. 아무리 내가 우습다 해도 이마저 거부할 셈이냐?”
한참 동안 말없이 악호군을 응시하던 전굉이 결국 묵철패를 품에 갈무리한 뒤 깊게 읍을 했다.
“총표파자의 명을 받듭니다.”
* * *
단악선이 녹림의 총타가 위치해 있는 검단산에 도착한 것은 철산채를 떠나온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범계위가 은근슬쩍 단악선을 부추겼다.
“이참에 산적 두목을 처리해 버리는 게 어때?”
신마곡을 나섰을 때만 해도 모처럼 손맛을 보게 되었다며 한껏 몸이 달아 있던 범계위였다.
그런데 연달아 허탕을 치게 되니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사정을 봐주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오를 거야. 흑도 놈들이 원래 그래. 고마운 건 금세 잊고 원한은 두고두고 가슴에 새기지. 그러니까 응? 이번 일은 내게 맡겨.”
흑도 놈들 운운하는 그 모습에 초악량은 기가 차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망산초자라 불리며 일찌감치 흑도 무림의 공포로 자리매김한 그가 입에 담을 말은 아닌 것이다.
“그 피해가 어마어마할 거예요.”
당장 악호군과 총채는 밀어 버릴 수 있다 해도 이후가 문제였다.
녹림은 강호 전역에 위치해 있었고, 그들이 잔존 세력을 이끌고 끝까지 항쟁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그 지역의 백성들에게 돌아가리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무엇보다 중원 전역에서 활동하는 신마상단의 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야말로 마교와의 일전을 목전에 두고 중원 무림의 힘만 소진하는 셈.
녹림 전체를 소탕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구파일방에 도움을 청하면 대부분이 탕마멸사의 기치 아래 뜻을 함께할 것이고, 능소밀을 통해 조정으로 하여금 관군을 동원한 대대적인 토벌을 시도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한시적이었다.
현실의 가혹한 삶에서 달아난 이들은 결국 산으로 숨어들 테고, 살아남기 위해 다시금 칼을 들게 될 터.
녹림이 사라지는 건 전설에서나 언급되던 요순시절의 태평성대가 도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과거에도 수많은 영웅과 방파가 녹림 토벌을 시도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성공을 거둔 곳도 있었다.
하나 완전히 쓸려 나간 것 같다가도 지나 보면 어느새 다시 세를 회복해 있었다.
“놈을 설득할 자신이 있느냐?”
초악량의 물음에 단악선이 자신 없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어요. 사실 저 스스로도 혼란스럽고요.”
“혼란스럽다니?”
“무림에 녹림이 필요한 이유를 모르겠어요.”
과연 이렇게까지 그들을 배려해야 하는지, 근원적인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결국 녹림은 산적 집단.
당장은 어르고 달래 잠잠하다 한들 언젠가는 다시 표사와 상인들을 향해 칼을 들어 올릴 게 분명했다.
초악량이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악이라 하지만 놈들은 필요악이다.”
“필요악이요?”
“마교가 중원으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자들이 누구라 생각하느냐?”
마교의 세력이 당당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채 움직일 리 만무했으니 당연히 인적 드문 산길을 이용할 터.
당연히 중원 전역의 요지에 위치한 녹림의 이목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실제로 녹림은 과거에도 정마대전에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었지. 정사를 떠나 어쨌거나 그들도 중원에 발을 붙인 무림인이니까.”
“그렇다곤 해도 이대로 좌시할 수는 없어요. 나중의 이익을 위해 당장의 피해를 묵인하는 건, 과정을 배제한 채 결과만을 중시하는 마교와 다를 바 없으니까요.”
단악선의 목소리는 어느새 착 가라앉아 있었다.
“실제로 마교보다 더 지독한 폐해를 야기하기도 했고요.”
앵속으로 인한 피해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고 있었다.
무림인이기 앞서 한 사람의 의원으로서, 이를 직접 목도한 이상 결코 유야무야 넘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행은 녹림의 총단인 거령채에 도착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예전과 달리 거대한 목책 입구는 활짝 열려 있었고, 평소처럼 외부를 감시하던 초병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범계위가 황당함을 금치 못하며 버럭 했다.
“이 자식! 도망쳤군!”